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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54화 (154/283)

##  154화. 도주 중에 만난

일단 개원이를 따라 나오긴 했는데. 이게 잘하는 짓인진 모르겠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나는 천년비 몸으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 이제 천소여의 몸에서 그냥 쭉 지내려 했는데…….

개원이를 따라가는 건 다시 천년비일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게다가…….

“황제 때문에 그래?”

내가 계속 뒤를 돌아봐서인가.

개원이는 말없이 걸어가다가 좀 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뭐가. 아니야. 난 원래 자주 뒤 돌아보고 그래.”

사실은 아니었지만 이런 화제로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개원이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는지 더욱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를 좋아해?”

나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부정했다.

“내가 그 인간을 왜 좋아해? 속 좁고 쪼잔한 놈인데.”

잘생기긴 했지만. 칭찬은 일부러 뺐는데도 개원이는 괴로운 얼굴로 쓸쓸하게 웃었다.

그 표정을 보자 뒤를 돌아볼 마음이 싹 사라져서, 나는 주먹을 쥐고 성큼성큼 앞으로만 걸어갔다.

하지만 황제 생각을 하지 않자, 이번에는 개원이 생각으로 머리가 아파졌다.

개원이가 날 죽인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한편으로, 그가 날 죽인 게 아니라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더 막막해진다.

범인이 생판 남이라면 쉽다. 복수하고, 개운해지는 거지.

그런데 그의 쌍둥이라면? 과연 난 뭘 할 수 있지? 용서? 개소리. 그럼 복수? 아이고.

나는 날 속여서 죽인 사람을 죽이고 싶다.

그런데 개원이는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이 생각을 하면 저절로 넋이 쏙 머리 위로 빠져나갔다.

“둘이서. 먼 외국에 가서 살까.”

그러다가 개원의 슬픈 목소리에, 나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옆을 보았다.

개원이가 슬프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야. 우리 둘이서…… 아주 멀리 가서 살까?”

“네 가족들은?”

“잘 살거다. 여럿이니.”

“내가 네 동생을 죽여버려도?”

저 봐. 거 봐. 눈동자 흔들리는 거 보라고. 아무리 사이 나쁜 가족이라도, 절연에서 끝이다.

해치고 죽이고 할 정도면 진짜 바닥까지 찍은 관계인데, 보통 그 정도로는 안 하지.

특히 개원이처럼 정의감에 똘똘 뭉친 사람. 심지어 가족끼리 사이좋은 사람은 더더욱 못 하지.

그런데 뭐? 둘이서 멀리 가서 살자고?

“내가 네 동생을 죽이고 널 데리고 떠나면 너희 가족들이 그래도 잘 살 거 같아? 너는? 너는 잘 살 자신 있어?”

* * *

아유정은 멍하게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엄지부터 검지, 중지, 약지, 소지까지. 천천히 하나하나 움직여 본 다음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손은 제대로 움직였지만 그래도 아유정은 꾸준하게 이 모든 행동을 반복했다.

“왜 그러지요?”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를 듣고서야, 그녀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리고 돌아섰다.

타천천이 표정이 거의 없는 권태로운 분위기를 하고서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유정은 바로 사과했다. 왜 사과하는지 스스로도 몰랐지만.

타천천 역시 비슷한 생각이 드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난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 죄송할 일을 하고 있었나 봐요.”

아유정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타천천이 서늘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누군가 내게 숨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유정은 괴로움을 느끼고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타천천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누군가 영혼을 쥐어짜는 고통을 느끼고 몸부림쳤다.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나, 타천천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아유정은 말도 못 하고 끙끙거리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몸이 말을 안 들었습니다.”

대답을 하자마자 바로 고통이 사라졌다. 아유정은 헐떡이면서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튼튼한 강시의 몸은 그런 고통이 있고 난 후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으나, 정신이 흔들렸다.

“몸이 말을 안 듣는다니요?”

“전에…… 단주님의 명령으로…… 개원을 찾으러 갔을 때 일입니다. 그자가 술에 취해 제 손을 잡았는데 뿌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손에 아예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타천천이 흥미가 가는지, 권태로운 표정을 조금 바꾸었다.

“재밌군요. 또?”

아유정은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심장 부근이…… 너무 아파서…….”

타천천은 더욱 흥미로운지 입꼬리를 올렸다.

“몸에 영향을 받고 있단 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는 바가 없으니까요.”

“아니면 단순히 실패란 걸까.”

타천천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아유정은 오싹해졌다.

이 일에 자원한 건 그녀였으나, 죽기 위해 자원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타천천은 아유정이 천년비의 몸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진다면 당장에라도 영혼을 빼내버릴 것이다.

그녀의 사정은 봐주지도 않고.

비틀린 방식이지만, 타천천이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걱정하는 건 이 세상에 단 하나. 천년비뿐이니까.

타천천이 그녀의 미래를 판결 내리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아유정은 눈을 내리깔고 공포를 누르기 위해 자신이 존경하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천년비의 모습을 떠올리려 해보았다.

언젠가 본 그녀처럼 용기를 가지려 해보았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고 있어도 타천천의 눈은 까만 어둠 속에 그려진 빨간 눈동자처럼 아유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유정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타천천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타천천과 아유정의 사이로 웃는 모양의 가면을 쓴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요.”

이미 가면 쓴 사람이 지척에 온 걸 알았던지, 타천천은 놀라지도 않고 태연히 물었다.

가면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빠르게 보고했다.

“개원이 후궁 하나를 데리고 궁을 나갔다고 합니다.”

“개원이?”

개원의 이름을 듣는 순간. 아유정은 놀랍게도 몸의 떨림이 멈추면서 저절로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으나, 무의식중에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타천천은 그 반응을 발견하고는 웃으며 “재밌네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유정에게 다시 확인차 질문했다.

“개원을 보면 몸이 말을 안 듣는다 했던가요?”

* * *

개원이의 본가는 수도에 있다 보니, 내가 다른 후궁들과 내려와 있던 행궁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하긴. 거리가 머니 날씨가 달랐던 거겠지만.

어쨌든 너무 먼 거리인 탓에 이동하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나는 빠르게 경공을 펼칠 수는 있었으나, 먼 거리를 쭉 이동할 정도는 아니었다.

영약을 먹어서 내공이 한 번에 늘어났다지만, 아직 이걸 완전히 소화하진 못한 상태라 그랬다.

게다가 내공이 늘어난다고 해서 체력이 좋아지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 보니, 분명 처음 천소여 몸에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해져 있었지만 열심히 이동한다고 이동했는데도 수도로부터 한참 먼 마을에 멈춰서야 했다.

개원이는 길을 안내하듯 앞서 뛰다가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멈춰 서며 중얼거렸다.

“노숙하지 않으려면 여기서 자고 가야 할 것 같은데.”

“난 돈 없어.”

녹봉 받아서 열심히 모았는데 전부 두고 왔단 말이야. 사실 가지고 오고 싶었는데.

개원이 저놈이 내가 나갈 준비 하는 동안 너무 빤히 보는 바람에 못 챙겼다.

개원이는 웃으면서 허리춤에 매단 자기 주머니를 가리켰다.

“내가 있어.”

“웃지 마. 정들어.”

개원이가 바로 슬픈 표정을 짓는 바람에, 나는 덩달아 속이 괴로워져서 얼른 앞서가 버렸다.

참 곤란해. 내게 용고를 먹인 게 개원이 아니기를 그렇게 바랐는데. 그게 실현되게 되었는데도 이렇게…… 기쁘지 않다니.

개원이 입장에선 내가 이러는 게 서운하겠지만, 내 입장에선 그렇다.

개원이를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더 혼란스러워져 버렸어.

이전엔 그에게 복수해야 한단 마음뿐이었다.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복수를 목표로 노력하면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이젠 꼬이고 꼬여서, 복수를 하면서도 개원이의 눈치를 봐야 하게 생겼다. 젠장.

어쨌든 우리는 근처에 객잔을 잡고 나란히 붙어 있는 방도 두 개 잡았다.

“밥은…….”

“배불러.”

나는 방 안을 확인하자마자, 얼른 방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문에 귀를 대고 딱 붙어 섰다.

그리고 개원이가 옆방에 들어가는 소리를 똑똑히 확인한 다음에야 침상으로 걸어가 엎어졌다.

‘피곤해…….’

수도까지 가는 내내 이런 분위기겠지.

‘……돌아눕자. 엎어져 있으니 개원이 생각만 나네.’

하지만 몸을 돌려 천장을 보자 이번에는 떡돌이 생각이 나서 성질이 난다.

“나쁜 놈. 우리 사이에 오고 간 떡을 다 합쳐도 제가 나한테 보여준 신뢰보단 끈끈할 거다, 나쁜 놈아.”

툴툴거리다가 나는 황제가 있을 방향으로 주먹 욕을 날렸다.

진짜로 거기에 있진 않겠지만, 내가 그의 꿈에라도 나타나서 욕해주길 바라면서.

“이거나 먹어라.”

그 순간. 놀랍게도 딱 그 시기에 맞춰서 ‘콰콰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건물이 살짝 흔들렸다.

“아이고!”

놀라서 침상에서 떨어졌다가, 나는 얼른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내가 한 거 아닌데. 대체 뭐지? 창틀을 잡고 쳐다보자, 저 아래쪽에 원흉들이 보였다.

금색과 적색 피풍의 차림을 한 사람들이 줄지어서 걸어가고 있는데, 그들이 걸어갈 때마다 멀쩡하던 길이 뒤집히고 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건물까지 흔들린 것 같고.

‘뭐야 저것들은? 왜 길을 뒤집고 다녀?’

황당해서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사람들이 난데없는 미친 놈들의 길 뒤집기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게 보인다.

“비야! 괜찮아?”

이런 큰 소란을 개원이라고 모를 수가 없는지라, 곧 뒤에 있는 방문이 열리며 개원이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저거 봐.”

내가 괜찮으리란 건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을 거라,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개원이는 가까이 오더니, 나를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팔을 뻗어 내 몸을 감쌌다.

“봤어.”

“저거 뭐야?”

“나도 모르겠다. 어디서 본 무늬 같긴 한데.”

“어디서 봤다고? 어디서?”

그 순간. 줄지어 가던 피풍의 차림의 사람들 중 하나가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려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개원이 쪽을 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나는 작게 물었다. 그 사람이 이동하면서 계속 개원이를 쳐다봐서.

하지만 개원이가 뭘 대답할 거라고 여기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피풍의로 얼굴을 반이나 가렸는데 어떻게 알아봐?

그러나 개원이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다.”

게다가 그 대답이 아주 이상했다.

“뭐? 내가 왜?”

“네 몸이다.”

“무슨 소리야?”

나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다가, 뒤늦게 개원이의 말뜻을 이해하고서 펄쩍 뛰었다.

“저 중 하나가 내 몸이라고? 확실해? 얼굴이 안 보이는데?”

“저 복장. 내가 어디서 봤다고 했지.”

“어. 어어.”

“생각났다. 네 몸이 저 차림이던 걸 봤어.”

그래도 그렇지, 얼굴도 안 보고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려는 순간.

한 무리의 무림인들이 마침 근처 객잔에 있었던 듯 붉은 피풍의 차림들에게로 달려왔다.

그러자 개원이를 올려다보았던 그 피풍의가 쓰고 있던 모자를 뒤로 넘겨 벗는데…… XX. 진짜 내 얼굴이었다.

“나잖아?”

타천천 이 개새끼. 자기가 구해줬다고 내 몸을 너무 막 쓰고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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