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개원의 집으로
“내가 자결하다니? 무슨 개소리야? 난 천라지망으로 쫓기면서도 살고 싶어서 며칠을 굶고 숨고 도망 다닌 사람이라고. 굳이 자결을 안 해도 죽을 방법이 지천에 널려 있었어! 근데 내가 자결을 왜 해?”
나는 발끈해서 소리 질렀다.
내가 아등바등 살려고 노력한 게 얼마인데. 내가 자결을 하다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아는 그가 이딴 변명을 늘어놓는 게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갔을 때 넌 죽어 있었다.”
“네가 죽였으니까! 죽이고 갔겠지!”
개원은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내가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네가 죽어 있었어.”
“그러니까, 네가 죽였다는 데도?”
“난 그런 적이 없다, 비야.”
“아, 이 사람 이거 진짜 말 안 통하네?”
말이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나중엔 참지 못하고 언성을 올리자, 문밖에서 원웅이 “마마?” 하고 불렀다.
“아니다. 혼자 화내는 중이니 괜찮아.”
나는 문 너머로 원웅에게 괜찮다고 말한 다음, 다시 개원을 향해 목소리를 낮춰서 하나하나 똑바로 알려주었다.
“여보세요, 개 소협. 네가 나한테 과일이라면서 용고를 건넸어. 내가 다 못 먹고 쓰러지니까, 네놈이 안 먹은 부분까지 하나하나 다 내 입에 넣어줬다고. 알았어?”
개원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정말로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로.
“하지만 내가 돌아왔을 때, 너는 죽어 있었어. 다른 사람이 다녀간 흔적도, 너와 싸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어.”
다른 사람이랑 싸운 흔적?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지.
“내가 너랑 싸울 리가 없으니까. 당연히 안 남지.”
그가 내게 남은 용고까지 억지로 먹게 했을 때, 이미 난 쓰러져서 내 몸 하나 제대로 까딱하지 못할 수준이었고.
그러나 개원은 여전히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너보다 강한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수는 있겠지. 은거고수는 갑자기 튀어나오곤 하니까. 하지만 너보다 강한 고수가 나타난들, 네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할 실력은 아니잖아. 그런데 싸운 흔적은 없고 너는 조용히 죽어 있으니 난… … 당연히 네가 자결했다 생각했어.”
“네가 와서 나한테 용고를 줬다니까?”
대체 이 얘기를 몇 번이나 해야 하는 거야?
“아니라고 천년비. 아니라고.”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개원의 눈에 화난 빛이 어렸다.
“몇 번을 말해.”
그도 자기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단 건 아나 보다.
“네가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어. 내 눈으로 보고 내 눈으로 느꼈으니까.”
이거보다 더한 증거가 어디 있다고.
개원은 멍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지으며 항의했다.
“말도 안 돼. 내가 왜 널 죽이겠어?”
“명성? 정의감? 나야 모르지.”
기가 막힌다는 듯, 개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흠칫하더니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무언가 퍼뜩 떠오른 사람처럼.
“왜 그래?”
이상해서 묻자,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하는 바가 없는 건 아닌데.”
“생각하는 바라니?”
이번에는 그가 대답 대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나는 더 갑갑해졌다.
“말을 했으면 끝을 내.”
왜 말을 하다 말고 혼자 괴로워해? 차갑게 노려보자, 개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쌍둥이…… 동생이 있다.”
“쌍둥이 동생?”
“나와 똑같이 생긴.”
개시시가 바로 떠올랐다. 사촌인 데다 성별이 다른데도 개원이랑 똑같이 생겼지.
그보다 더 닮은 형제가 하나 더 있단 건가?
“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아?”
하지만 개원의 말이 곧이곧대로 믿기진 않았다.
쌍둥이라고? 그가 날 죽여 놓고 쌍둥이 탓을 하는지 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게 쌍둥이라면 그 쌍둥이는 개원이 자리를 비운 틈에 교묘히 들어와서 날 죽이고 갔단 거야?
이죽거리려다 보니 개원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아서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개원이 가족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없긴 해. 개원이 가족들 모두가 날 싫어했단 것밖엔…….
어이없다는 듯 한 번 더 코웃음을 쳤으나, 이번에는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만약 날 죽인 게 정말 개원이 아니라 개원의 쌍둥이면 어쩌지?
‘오해가 풀렸으니 이제 다시 둘이 사랑하자’라고 하기엔, 날 죽인 게 개원의 동생이라고 해도…… 좀 그렇잖아. 그는 자기 동생이 날 죽였는데, 날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이후에 우리가 다시 잘 지내더라도, 그가 날 보는 감정이 사랑과 애정인지, 동정심과 죄책감인지 과연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가 사랑과 애정이라고 해도 내가 믿을 수 있나? 어떻게 구분하지?
개원이 동생과 크게 싸우고, 동생을 떠나 내게 와 준다면 나는?
나는 개원이를 보면서 이전처럼 그저 밝게 맑게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할 수 있을까?
그가 나 때문에 가족들과 거리가 멀어졌단 걸 하나도 떠올리지 않고?
내가 넋을 놓고 멍하게 바라보자, 개원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여줄게.”
“보여주다니?”
“지금 모습으로 널 봐도 천년비란 걸 모를 테니까. 내 말이 사실이란 걸 보여줄게. 내 집에 같이 가자.”
나는 여전히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뭔가 생각해야 할 게 많은데, 갑작스러운 소식으로 제대로 뇌가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보면……? 보면 뭐가 변하는데?”
천천히 손을 올려서 나는 내 심장, 정확히는 천소여의 심장이 있어야 할 곳에 손을 올렸다.
“내가…… 다시 살아나?”
이미 내 몸은 죽어 강시가 되었고 그 안에는 다른 사람이 있는데?
“!”
* * *
월요는 가마에 앉은 채, 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등불을 바라보았다.
천빈을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까. 뭐라 말문을 여나.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하고 막막했다.
늘 이 길은 즐거웠는데.
그러는 사이. 천빈이 머무는 전각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그 전각은 월요의 전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 가는 게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태감들이 가마를 내리자, 월요는 느리게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속마음은 검은 파도처럼 제멋대로였으나, 겉으로 보는 그는 침착하기 짝이 없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오원요가 외치자, 문 근처에 서 있던 궁녀와 태감들이 얼른 앞으로 나와 인사를 올렸다.
월요는 그들 사이를 지나쳐 천빈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천빈이 없었다.
월요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안쪽에 놓인 침상으로 다가갔다.
“천빈.”
그러나 침상 위 이불은 평평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자신이 나간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이불을 말아놓는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불 위에 놓인 운문 비단으로 만든 잠옷 두 벌. 월요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침착하게 손을 뻗어 그중 한 벌을 손에 들었다.
부드러운 비단은 월요가 집어 들자 보드라운 미역처럼 축 늘어졌다.
월요는 잠옷 끄트머리에 작게 수놓아진 원앙을 발견했다.
월요는 다른 쪽 잠옷을 보았다. 다른 쪽에는 원앙이 없었다.
한 쌍의 잠옷이 있었으나, 원앙은 한 마리뿐이었다.
“폐하.”
가까이 온 오원요도 아예 천빈이 방 안에 없자 놀라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니, 멀리서 봤을 땐 천빈이 침상 귀퉁이에 있거나 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월요는 이불을 꽉 움켜쥐고서 이를 악물었다.
그 눈빛이 너무 흉흉해지자, 오원요는 급히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천빈-.”
‘천빈 마마께서 없어졌다’라고 외치려는 것이었으나, 뒷말이 나오기 전에 월요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 표시를 본 오원요는 재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소리를 들은 원웅과 부성이 들어온 뒤였다.
두 궁녀는 황제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다가, 빈 침상을 발견하자 놀라 멈춰 섰다가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월요는 뒤돌아선 채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물었다.
“천빈은.”
원웅은 우물거리다가 큰 결심을 하고 거짓말했다.
“그게…… 잠시 산책 나가신 것 같습니다, 폐하. 마마께선 원래 홀로 자주 산책 나가십니다.”
황제에게 거짓을 고한 죄로 혼이 나더라도, 일단 천빈이 가출했단 쪽으로 흘러가는 건 막으려는 듯했다.
“홀로 산책하러 가는데. 나간 줄도 몰랐다?
그러나 황제가 빈정거리자, 원웅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부성은 잔뜩 겁을 먹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 두 사람은 천빈이 나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갑자기 둘을 부른 천빈이, 황제가 화가 풀릴 때까지 잠깐 나갔다 오겠단 말을 했으니까.
같이 가자는 말도 했으나, 두 사람은 당연히 따라가지 않았다.
천빈이 무사히 밖으로 빠져나갈 가능성도, 세 사람이 안전할 가능성도, 둘이 여기에 남아 있는 편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빈이 가출했다가 잡혀 오기라도 하면, 둘이 여기에 있는 편이 나중에 천빈을 보살피기 나았다.
물론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황제가 천빈이 사라진 화풀이를 둘에게 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래도 막상 황제가 서늘하게 앞에 서 있으니 두려워져서, 두 궁녀는 연신 심장이 쪼그라드는 마음으로 덜덜 떨기만 했다.
하지만 황제는 궁녀들을 보는 게 아니라, 텅 빈 침상을 다시 바라보면서 전에도 천빈이 멋대로 궁전 밖으로 나갔다가 새벽이 되어서 돌아온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한자리에서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천빈이 쉽게 돌아오지 않으리란 게 감으로 느껴졌다.
헤어지기 직전의 분위기 때문일까.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월요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천빈이 사라진 건 함구하라.”
원웅과 부성은 물론 오원요까지 놀라서 황제를 쳐다보았다. 월요는 침상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천빈이 전염성 있는 병에 걸려 방에 틀어박혔다 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라.”
이만 나가보라고 황제가 손짓하자, 원웅과 부성은 얼른 밖으로 달아났다.
월요는 이어서, 천빈의 태감이지만 자신이 붙여둔 귀자에게도 물었다.
“너도 아무것도 못 보았느냐.”
“제 실책입니다.”
귀자가 무릎을 꿇자, 월요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서 눈을 감았다.
“천빈은…… 소리 없이 나갔으니 소리 없이 돌아올 방법도 알 거다. 이 주위를 지켜서 그 아이가 돌아오는지 살피거라.”
“예, 폐하.”
꽤 침착한 대응에, 오원요와 승언은 황제가 생각보다는 화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 전에 촉비의 보따리 사건으로 분위기가 나빴던 걸 떠올리면, 파격적일 만큼 조용한 대처였다.
어쨌든 천빈이 지금 가출했다는 걸 묻고 가겠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월요의 표정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오원요.”
“예, 폐하.”
“그림자들을 풀어서 천빈을 찾아라.”
“예.”
“찾거든 바로 접근하지 말고. 위치만 파악하고 내게 알려야 한다.”
“예.”
“개원. 그자의 집에도 가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