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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52화 (152/283)

##  152화. 난 자결한 적 없어

유난히 추운 오늘은 천년비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날이었다.

개원은 평소보다 거울 앞에서 좀 더 신경 써서 의복을 차려입고 서둘러 행궁으로 걸어갔다.

천년비에게 무공을 가르친다니. 생각만으로도 우스웠지만, 어쨌든 이렇게라도 그녀를 볼 수 있으니 좋았다.

배우는 본인은 꽤 갑갑하겠지만.

‘무공 이야기만 나오면 의견이 항상 달랐지.’

워낙 방식이 다르다 보니 무공 이야기로는 웬만해선 의견이 같기가 힘들었다.

천년비는 절대로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그도 무공에 관련해선 자기 의견을 누르지 않았다.

천년비가 보기에 그의 무공은 너무 고루했고, 그가 보기에 천년비의 무공은 너무 위험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내가 네게 가르치는 입장이 됐구나.’

마음이 아픈 가운데도 옛일을 떠올리자 웃음이 나와서, 개원은 좀 더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천년비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좀 늦는구나, 생각하고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기는 마찬가지.

‘어디 몸이 안 좋은가.’

걱정이 되어 연무장을 서성이고 있자니, 한 태감이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알려주었다.

“개 대인. 혹시 천빈 마마를 기다리십니까?”

“그렇소만. 왜 그러시오?”

“어휴, 그러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천빈 마마 처소에 사람을 보내 내일이나 모레쯤으로 날을 옮기자 하고 그냥 돌아가시지요.”

“왜 그러오? 무슨 일이 있소?”

“어휴, 큰일이 있었죠.”

“큰일이라니?”

“천빈 마마께서 촉비 마마가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발고하여 촉비 마마를 공격하셨는데, 알고 보니 그 물건이 선제 폐하의 유품이지 뭡니까.”

“그게 큰일이오?”

“별일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지만, 안에 묘한 내용이 있어서요.”

개원은 더 말해주길 기다렸으나, 그 태감은 자기 입을 두드리더니 후회하는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하여튼 이 일로 폐하께선 몹시 화나셨습니다. 천빈 마마는 용서를 청한다고 폐하가 계신 전각 앞에 서 있으신데…… 들여보내 주지도 않고 계시지요. 나중에 화해한다 해도 오늘은 무공을 배우기 힘드실 겁니다, 대인.”

개원은 그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그는 이런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감이 다른 방향으로 가자 황급히 예전에 황제가 그를 불렀던 그곳으로 가보았다.

역시. 천년비는 그곳에 있었다.

날씨가 추워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입김이 나는데, 그곳에 서서 하염없이 전각만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를 늘 따라다니는 태감이 전각 안과 천년비 주위를 오가며 무어라 말을 계속 전했으나, 그래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를 보는 개원의 주먹이 서서히 꽉 다물리며 손등에서 파랗게 핏줄이 올라왔다.

분노로 턱에서 바위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폐하 총애를 과시하더니만.”

“유세를 부리더니. 제 발에 걸려 제가 넘어진 거지.”

“앞서 다른 후궁들 무너지는 걸 보고도 느끼는 게 없었나 봐.”

“자기는 예외라 생각했겠지, 뭐.”

“그래도 안 됐지 뭐야. 촉비가 그런 걸 가지고 있을 줄 알기나 했겠어?”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며 후궁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몇은 천빈이 황제에게 미움을 산 걸 그저 재밌게 여겼고, 몇몇은 통쾌하게 여기는 듯했다.

개중 몇몇은 가엾게 여겼으나 그 수는 적어 보였다.

천빈이 총애를 잃는다는 건 그들 중 누군가가 총애를 받을 수도 있단 뜻이었다.

사람 하나를 놓고 여럿이 겨루는 처지이다 보니, 마음이 좋은 사람이어도 동정심을 발휘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개원은 화가 났으나 꾹 눌러 참았다. 여기서 자신이 나서봤자, 오히려 천년비에게 더 좋지 않단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없어서, 먼발치에서 그 자리에서 천년비를 계속해 지켜보았다.

그러다 결국 천년비가 끝까지 황제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자, 개원은 사람들이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도록 은신해 그 근처를 맴돌았다.

개원은 전형적인 정파인이었기에 은신술은 그의 주요 장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손꼽히는 고수인 그가 작정하고 자신을 감추려 들자,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밤이 될 때까지도 개원은 그렇게 하염없이 전각 근처만 맴돌았으나, 안쪽에서 희미하게 훌쩍이는 소리가 나자 결국 참지 못하고 창문 뒤로 가 그녀를 부르고 말았다.

* * *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아차렸다.

‘개원이다.’

나는 이불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방 안에 나뿐이란 걸 알면서도 괜히 주위를 살피고 창문 옆에 딱 달라붙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개원이가 왜 여기 있대?

‘아아. 그래. 오늘이 무공 익히는 날이지.’

행궁에 왔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나 보구나.

하지만 이런 데 있지 말고 같이 떠나자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모르겠다.

얘 꼭……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말하잖아?

……가 아니라! 천년비라고 했네! 나를 천년비라고 불렀어! 비명이 튀어나올 뻔해서, 나는 얼른 두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놀라서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니, 이번에는 개원이 다르게 물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안 된다고 하고 싶은데, 내 입에서는 “어.” 하는 퉁명스러운 소리가 나갔다.

나는 다시 침상으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창문을 훌쩍 넘어 들어온 이는 정말로 개원이었다.

평소보다 좀 더 잘 차려입은 개원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데 기분이 얼마나 이상하던지. 나는 입술을 깨물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날 천년비라 부른 거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천년비.”

아니구나. 그가 나를 제대로 내 이름으로 부른다.

내 정체를 모두에게 고래고래 알릴 예정은 아닌 듯 목소리가 아주 작긴 하지만.

그래도 갑자기 개원이 내 정체를 알고 찾아올 줄은 몰랐던지라, 나는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서 그를 차갑게 노려보기만 했다.

내 계획대로라면 그가 ‘천소여’에게 반하게 해야 하는데.

천소여에게 반하기도 전에 개원이 내 정체를 알고 찾아오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지금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않을까? 검을 꺼내서 개원을 공격해야 하지 않나? 개원은 또 나를 노리고 있잖아?

그러나 경계심이 최고로 고조될 때까지도, 개원은 한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는 아련해 보였고 물기로 촉촉해 보였지만, 그가 왜 이렇게 슬픈 표정인 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가 말을 잇지 않아서, 나는 이불을 여전히 뒤집어쓴 채 그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무슨 소리냐. 나는 천빈 마마다. 함부로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큰 소용은 없었다.

“천년비. 비야.”

그는 이미 내 정체를 확신하고 찾아온 것 같았으니까.

날 확실하게 죽이러 찾아온 것 치고는 표정에 비련이 가득해 보였으나, 원래 쟤는 저런 얼굴로 뒤통수를 치니까 넘어가면 안 된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본궁이 왜 널 따라가느냐.”

그래도 차갑게 내가 모른 척하자, 개원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비야. 네가 그자를 사랑하니까. 과거를 지우고 살고 싶어하니까. 널 아는 척하지 않고 이번에는 내 마음을 묻으려 했다. 난 결국 널 지키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정말로 아니야.”

그의 목소리에는 슬픈 기색이 가득했으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성질이 났다.

날 사랑해? 과거를 지워? 마음을 묻어? 이 거짓말쟁이가 미쳤나?

“무슨 개소리를 구구절절하게 해? 네 손으로 날 죽여 놓고, 어디서 날 사랑한 척 아직도 거짓말을 해? 사람이 죽으면 그때 기억이 다 사라지는 줄 알아?”

목소리를 마음껏 높일 수 있었더라면 그랬을 거다.

나는 발끈해서 최대한 목소리를 억누른 채 분노를 토해냈다.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서 씹듯이 뱉었다.

이불을 두르고 있기도 성질나서, 나는 이불을 돌돌 말아 그에게 던져버렸다.

개원은 바로 이불을 손쉽게 잡아내서 나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나쁜 자식. 내가 먹을 걸 좋아한다고, 먹을 거로 낚아서 죽여? 너는 나쁜 놈이야. 너는 진짜 나쁜 놈이야. 너는 내가 사랑한 만큼 나쁜 놈이야. 진짜 개자식이라고. 너희 집안 성이 개씨인 건 너희 집에 개 피가 흐르기 때문이야, 이 개놈의 자식아!”

말하다 보니 그의 조상까지 욕하게 되었지만 괜찮다.

그의 조상이 좋은 사람이라면 자기 후손에게 배신당한 내 감정을 이해해 줄 거고, 그의 조상이 나쁜 사람이라면 나쁜 놈이니 같이 욕해도 되는 법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불을 두르고서 소리 나지 않게 놈을 퍽퍽 두드리고 있자니, 그 사이에서 팔 한 짝이 나와서 나를 붙잡았다.

“비야. 잠시만.”

“뭘 잠시야? 더 맞아. 더 맞아. 너는 더 맞아도 싸!”

그래도 내가 멈추지 않고 퍽퍽 두드리자, 이번에는 다른 손이 나와서 내 다른 쪽 손까지 붙잡았다.

이불을 들고 있던 그가 두 손으로 나를 붙잡자, 두꺼운 이불이 우리 사이에 툭 떨어졌다.

나는 씩씩거리면서 그를 노려보다가 경고했다.

“내가 지금 네 손을 그냥 놔두는 건, 내가 네놈 손을 꺾으면 네가 비명을 지를 거고, 그게 나한테도 좋지 않기 때문이야.”

그래도 개원은 내 손을 놓지 않고서 다급히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널 먹는 걸로 낚아서 죽이다니? 내가 널 왜?”

이걸 말이라고 해? 나는 이마로 놈의 머리를 힘껏 부딪쳤다.

“윽.”

“아.”

나 역시 통증이 상당했으나 개원이 역시 이건 좀 아팠는지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나는 그에게 이불을 던져놓고서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서 내가 그가 한 짓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네가 나한테 용고를 먹였잖아. 내가 그걸 잊어버릴 거 같아?”

“무슨 소리야?”

그러나 개원은 내 말에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내 어깨에 매달리듯 손을 얹고서 다급히 말했다.

“넌 자결한 거잖아.”

뭐?

* * *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제가 서재에서 나가지 않은 채 계속 서성이다 앉기만 반복하자, 오원요가 걱정스레 물었다.

신경이 쓰이면 그냥 천빈을 부르거나 직접 가시거나 하지. 이럴 거면서 왜 얼굴도 안 보시고…….

저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왔으나, 감히 주군을 앞에 두고 그럴 수는 없기에 오원요는 애써 혀를 깨물고 있었다.

오원요가 무어라 하지 않더라도, 월요 역시 이미 후회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암투에는 넘어도 좋은 선이 있고 넘지 않아야 할 선이 있는 거다, 오원요. 그 문서는 과하게 해석하면 역심과도 엮을 수 있는 문제였어. 역모할 마음이 있다고 상대를 몰아가면 촉비 본인뿐만이 아니라 한 가문 전체가 몰락할 수도 있는 있이란 말이다. 천빈은 그런 일에 촉비를 몰아넣으려 했어.”

“폐하…….”

“난 천빈이…… 그럴 사람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월요는 미간을 찡그리고서 이마를 짚었다. 고궐 때의 악몽이 다시 되풀이되는 것 같았다.

눈앞에서 달려가 호수에 빠져버리던 누님의 옷자락이 떠오르자 심장이 갑갑해져 왔다.

어린 시절부터 월요를 계속 보아왔기에, 오원요는 그래도 걱정스럽게 다시 말해보았다.

“그래도 신경 쓰이신다면 한 번 가보시지요, 폐하. 천빈께선 이런 일이 익숙지 않으시니, 어쩌면 그게 역심과 엮을 정도로 엄청난 일이란 걸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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