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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50화 (150/283)

##  150화. 내가 비가 못 된다면 네가 빈이 되어라

“마마, 이제 잠옷이 다 완성됐어요.”

아침 햇살이 창틀 사이로 납작하게 들어와 바닥에 이상한 무늬를 만드는 걸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신이 나서 들어온 원웅이 같은 색상에 크기만 조금 다른 잠옷 두 개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운문 비단으로 만든 잠옷이죠. 폐하랑 마마가 함께 입을 잠옷이요. 같이 입으면 금실 좋은 부부처럼 보일 거예요!”

원웅이 멋대로 잠옷을 안겨주는 바람에, 나는 그것들을 받아 안았다.

운문 비단 잠옷은 내 품 안에서 흐느적거리며 축 늘어졌다. 너무나 가볍고 부드러운 느낌.

“어때요, 마마?”

“…….”

“마음에 안 드세요?”

“옷은 마음에 들어. 옷을 받을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 그렇지.”

“폐하랑 싸우셨어요?”

내가 떡돌이랑 싸웠냐고? 차라리 싸웠으면 원인이라도 알 테지.

어제 우리는 싸운 게 아니다. 떡돌이가 일방적으로 달아난 거지.

난 지금까지, 회임을 거절하고 있는 건 확실하게 내 쪽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 나를 잔뜩 약 올려놓고서는 달아난 떡돌이를 보자, 글쎄. 운우지정을 거절하는 게 과연 누구일까 모르겠네.

“그럼 마마. 폐하와 약속하신 수도 안 놓을 거예요?”

“수라니?”

“폐하께서 잠옷에 원앙을 놓아 달라고 하셨잖아요.”

“떡돌이는 왜 나한테 그런 걸 시키고 그런데? 수 놓는 게 쉬운 줄 아나?”

“그야…… 마마께서 먼저 놓아주겠다고 하셨으니까…….”

원웅인 내 편이 아니구나. 원웅이는 절로 가.

내가 정색하고서 돌아앉자, 원웅은 히히 웃으면서 다가와 내 어깨를 주먹으로 두드려주었다.

“자, 화 푸시고요. 왜 싸우셨는진 모르겠지만 폐하는 어쨌든 마마를 제일 좋아하시잖아요. 곧 화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수를 놓아서 보내면 화를 푸실지도 모르고요.”

“화는 내가 난 거야.”

“아아.”

이쯤 되니 뭐라고 해야 할지 바로 판단이 안 서는 듯, 원웅이 괜히 잠옷 소맷자락만 만지작거린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지시했다.

“알았어. 수틀이랑 바늘이랑 실. 일단 가져와 봐.”

약속한 거니까 만들어 주긴 해야지. 나는 대인이니까.

하지만 수틀에 수를 놓으면서도 내 머릿속은 어젯밤 온천에서의 일로 가득했다.

떡돌이가 그런 식으로 날 대하는 걸 보니 회임해서 품계가 올라가는 게 더 힘들 것 같아.

그리고 어젠 떡돌이가 너무 아름다워 보여서 잠시 생각이 들쑥날쑥했는데, 아이를 가진 채 복수하는 것보단 아이를 가지기 전에 복수하는 게 나아.

복수를 먼저 하고 몸과 마음을 정화한 다음 아이를 가지는 게 맞는 순서 아닐까?

“마마. 새 날개가 너무 커지고 있어요……. 다른 생각 하면서 바느질하지 마세요…….”

“중요한 생각 중이라 그래.”

“무슨 생각이요?”

촉비를 무너뜨릴 방법.

비로 품계를 올려서 감히 날 못 건드리게 하려 했는데, 그게 힘들다면 역시 촉비를 먼저 쳐내야지.

품계랑 별개로 촉비에겐 복수할 생각이기도 했고.

* * *

수를 놓다가 손가락이 아파 잠시 밖으로 나와보니, 하늘에서는 또다시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귀자는 창고에서 화로를 하나 더 꺼내왔고, 부성은 샛노란 피풍의를 가져와 내게 덮어 주었다.

행궁 변두리에는 호수인지 큰 개울인지 모를 물이 있는데, 만약 그 물이 꽝꽝 얼었다면 위에서 놀 수 있지 않을까?

하늘을 향해 입김을 불면서 용인 척해보다가, 나는 얼른 호수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절반 정도 이동했을 즈음. 행궁에 없는 줄 알았던 사람이 겨드랑이에 얇은 책을 끼고 걸어가는 게 보였다.

날씨가 추운데 피풍의조차 두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문관 차림의 비원이었다.

내가 그를 발견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비원도 나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추어 섰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게 따라오란 눈짓을 하고 길을 벗어나 수풀 사이로 들어갔다.

“원웅아. 만약 호수가 얼었으면 얼음을 탈 건데, 지금 옷이 너무 긴 거 같거든?”

“옷 갈아입고 가시겠어요, 마마?”

“아니. 네가 짧은 옷을 가져다줘. 아니면 격구할 때 입는 옷이나. 옷 가지고 바로 호수로 와.”

나는 눈치 좋게 원웅에게 심부름을 시킨 다음, 비원이 들어간 곳으로 따라갔다.

그러고서도 좀 걸어가니, 겨울잠에 빠진 나무에 비원이 기대어 서 있었다.

“왜 여기 있어?”

다가가면서 묻자 비원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대답했다.

“황후가 불러서 왔습니다. 전에 말했다시피, 황후는 절 꽤 신뢰하니까요.”

황후는 겨울에 춥다고 행궁에 부를 정도로 비원을 신뢰하는구나. 안목이 없네. 비원이는 수상쩍은 인간인데.

“황후가 절 신뢰한다는데 왜 그렇게 가련한 표정을 짓는 겁니까.”

“아니야.”

“아닌 게 아닌데요.”

“진짜 별거 아니야. 그냥 조금 속으로 네 흉을 봤어. 그보다 제안할 게 있는데.”

“제안하기 전에 흉본 내용을 뺄 생각은 안 하십니까.”

“사실은 네 흉을 보지 않았어. 그러니 제안할 게 있는데.”

비원은 날이 추운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피풍의 좀 걸치고 다니지. 뭐 얼마나 튼튼해 보일 거라고 이 날씨에.

어쨌든 그가 내 말을 들어보긴 할 것 같아서, 나는 아까 수를 놓으면서 내내 생각한 계획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너도 촉비와 안 좋은 일이 있었고 나도 촉비와 안 좋은 일이 있었잖아. 그러니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촉비를 무너뜨리자.”

비원은 내 말이 의외인지 눈썹을 치켜올렸다.

“후궁들에겐 별 관심을 안 두시더니. 심경에 변화라도 왔나 봅니다?”

왔지. 천소여가 진짜 죽었단 걸 알게 되어서, 이젠 이 몸을 알차게 사용하기로 했거든.

내 몸으로 돌아가 봐야 강시 몸이고, 네 상사 손바닥 안에 있게 되니까. 하지만 이 얘긴 하지 말자.

“자꾸 시비를 걸잖아.”

“하긴. 복수하면 악적 천년비죠. 달리 생각한 방도는 있습니까?”

“열심히 생각해 보긴 했어.”

“하지만 답이 안 나왔군요.”

고개를 끄덕이자, 비원은 그럴 줄 알았다고 중얼거리더니 자기 관자놀이와 눈가를 엄지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너는 뭐 좋은 방법이 있어? 네가 생각하면 내가 실행할게.”

이러면 좀 공평하지 않을까?

비원은 내 제안에 계속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생각하더니, 갑자기 손을 떼고서 물었다.

“전에 촉비가 가지고 있던 그 ‘물건’이 기억납니까?”

“안에 뭐가 있는지 본 적 없는데. 뭘 숨겨두고 있단 건 알아.”

그중 하나가 죽은 태감과 궁녀들의 이름과 위치를 적어둔 필첩이었지.

당시 나는 그걸 떡돌이에게 얘기했지만, 촉비는 아무 벌도 받지 않았다.

비원이 촉비를 몰아붙여서 숨긴 물건이 뭔지 거의 캐낼 뻔했으나, 촉비의 물건을 훔쳐 갔던 태감이 먼저 촉비에게 숙이고 들어가면서 그 일도 엎어졌다.

이후 이 일은 나나 비원 둘 다 언급하지 않았는데. 왜 인제 와서 또 이 일을 얘기하는 걸까?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냈어?”

“굉장히 교묘하게 감춰뒀습니다. 사실 이후에도 몇 번 방을 뒤졌지만 찾아내지 못했어요.”

“그럼 그게 왜?”

“하여튼 촉비가 감추는 게 있단 건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게 뭔지 우리는 모르잖아. 그러면 그 물건으로 촉비를 공격할 순 없어.”

“아니죠.”

아니라고?

비원은 내 말에 씩 웃더니 고개를 가볍게 젓고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촉비가 사망자들의 이름과 시체 위치를 적어뒀단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타격은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을 죽인 게 촉비라고 몰아가진 못해도 품계 정도는 내릴 수 있지요. 아니면 우 답응처럼 몇 달간 처소에서 못 나오게 막거나요.”

가능한진 모르겠지만 비원이 나보단 똑똑하니까, 아마 가능한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우선…….”

* * *

비원과 나는 촉비의 필첩에 있던 내용을 최대한 복구해서 새로운 필첩에 적어 넣었다.

물론 대부분은 비원이 기억한 거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그다음에는 이걸 까만 보따리에 넣은 다음, 촉비가 사용하는 방 근처의 나무 꼭대기 위에 가져다 두었다.

어두운 나뭇잎 사이에 까만 보따리를 넣어두자 감쪽같았다.

이 절차가 마무리되자, 비원은 다시 내게 더 설명했다.

“촉비에게 ‘네 비밀을 안다’ ‘어떤 내용을 숨겨두었는지 안다’ ‘네가 뭘 감추려는지 안다’ 같은 말을 계속 보낼 겁니다. 촉비는 실제로 감추는 게 있죠. 작지 않은 보따리요.”

감추다뿐이겠어? 내가 전에 봤을 땐 아예 품에 끼고 다니던걸.

“계속해서 추궁하면 그녀는 안전을 위해 보따리 위치를 한 번 바꿀 겁니다. 그때 촉비의 보따리 위치를 알아뒀다가, 이동 전에 우리가 준비한 저 보따리와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촉비가 물건을 옮기고 있을 때 다가가서-.”

“그 물건을 뺏어서 사람들에게 공개한다?”

“네. 안에서 죽은 궁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촉비도 뭘 어쩌진 못할 겁니다.”

“보따리 위치 바꾸는 건 누가 해?”

“시간이 되는 사람이 하는 거로 하죠. 억지로 시간을 빼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겁니다.”

우리는 상황을 몇 번이나 재연해 가면서 촉비의 주머니를 바꿔치기할 방법을 연습했고, 며칠이 지나자 마침내 연습한 걸 실전에 써먹을 기회가 왔다.

촉비가 연신 방문에 끼워져 있는 종이가 신경 쓰이는지, 드디어 보따리를 자기 상궁을 통해서 옮기려 시도한 것이다.

촉비가 상궁에게 당부하는 틈을 타서 비원은 그들의 보따리를 바꿔치기했고, 이를 모른 채 촉비는 자신의 상궁에게 바뀐 보따리를 들려 보냈다.

비원은 일이 이렇게 되자 내 방에 몰래 잠입해서 알려주었다.

“촉비의 상궁이 동쪽 끝에 있는 창고로 갈 생각입니다. 마마는 기몽 장군을 그쪽으로 데려와 주십시오. 저는 혹시 모르니 먼저 그곳에 가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겠습니다.”

나는 대쪽같은 사람이라 이런 일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어떤 건지 모른다.

그러니 촉비가 새로 물건을 감추려는 곳엔 비원이 가 있는 게 나았다.

나는 비원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본 다음, 기몽 장군이 있는 행궁 수사청으로 달려갔다.

기몽 장군은 행궁에 와서도 화로 근처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었는데, 내가 나타나자 ‘또 왜 왔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가라고 하진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와 봐요. 촉비가 이상한 물건을 가져가는 걸 봤어요. 얼른.”

수사에는 사감을 안 섞는다는 기몽은 ‘이상한 물건’이란 말을 듣자마자 바로 쫓아와 주었다.

“이상한 물건이 무엇이었습니까? 봤습니까?”

“모르겠어요. 죽은 사람 이름이 들어가 있긴 했는데.”

“죽은 사람이요?”

고개를 끄덕이자 기몽이 다시 뛰기 시작했고, 우리는 머지않아 비원이 내게 말해준 그 장소에 도착했다.

촉비의 상궁은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와 기몽 장군이 나타나자 놀란 듯 그 자리에 위태롭게 멈춰 섰다.

“저거예요.”

내가 손가락으로 그녀가 안은 보따리를 가리키자, 촉비의 상궁은 화들짝 놀라 자기가 안은 보따리를 끌어안았다.

기몽은 내게 더 뭐라 하는 대신, 그녀 쪽으로 다가가 물었다.

“소저. 그 물건을 한 번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촉비의 상궁은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엔 마마의 속곳이 들어 있습니다. 안 됩니다.”

하지만 기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재차 요구했다.

“잠깐 확인만 하면 됩니다. 안쪽에 다른 위험한 물건이 들어 있단 제보를 받아서 그럽니다.”

한 명은 외나무다리에 서 있고, 사냥개로 유명한 기몽 장군은 앞에서 저러고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촉비의 상궁은 나를 짧게 노려보았으나, 곧 뒤로 반보 더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이 안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장군.”

“그건 제가 판단할 일입니다.”

기몽 장군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상궁이 다리에서 떨어질까 봐 신경이 쓰이는 듯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가 떨어지지 않고 이쪽으로 오도록 잡아주었다.

그러고는 땅을 딛고 서자, 상궁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기몽 장군은 촉비가 그녀에게 맡긴, 하지만 중간에 비원이 내용물을 바꿔치기한 것을 꺼내 펼쳤다.

좋아. 이대로 가면 촉비도 비가 아니라 빈이나 귀인이 되겠지.

그러면 더이상 나나 내 궁녀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거야.

나는 흐뭇하게 올라오는 미소를 참기 위해 애써 정색하고 기몽이 꺼낸 물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

기몽이 꺼낸 물건은 나와 비원이 준비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의 서신이었다.

저게 뭐지? 나랑 비원은 서신을 쓰지 않았는데? 필첩은 어디 가고 서신이 나와?

의아해서 쳐다보는 사이. 서신을 다 읽은 기몽이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거기에 대고 절을 하지 않은가.

뭔가 싶어서 멍하게 보고 있자, 그는 서신을 챙겨 다시 일어난 다음 내게 물었다.

“혹시 봤다는 그 ‘죽은 사람 이름’이…… 선제 폐하입니까?”

“어?”

아닌데? 태감이랑 궁녀인데? 황당해 쳐다보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건 선제 폐하의 서신입니다.”

선제 폐하라면…… 떡돌이 아빠? 떡돌이 아빠가 쓴 편지가, 비원이 바꿔치기한 보따리 안에 있었다고? 어떻게? 아니, 떡돌이 아빠는 죽었잖아?

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쳐다보자, 기몽이 어두운 얼굴로 아주 작게 알려주었다.

“내용이 좋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힐긋 눈을 내리깔자, 편지 뒤편으로 몇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후계자’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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