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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47화 (147/283)

##  147화. 그 뒷말은 하지 마세요!

다행이라 해야 할지 다행이 아니라 해야 할지 기몽 장군이 마침 함께 행궁에 내려와 있었다.

황제가 기몽을 총애해서 불렀다는데, 그건 상관없고.

어쨌든 수사청의 기몽 장군이 와 있기에 부성은 그쪽으로 잡혀갔다.

나는 날이 밝자마자 임시 수사청으로 쓰는 건물에 찾아가 기몽을 불렀다.

“기몽 장군은?”

“아직 등청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

하지만 기몽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니,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갑갑해서 내가 탄식하자,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묘시입니다, 마마.”

돌아보자 마침 기몽이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손가락으로 ‘안, 안, 안’이란 신호를 해 보였다. 둘이서 얘기 좀 해. 얼른!

다행히 이맛살을 찌푸리긴 했어도 기몽은 내 부탁을 들어주어서, 수사청 안의 한 방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그래, 내가 수사청에 들락날락하면서 얘랑 쌓은 정이 얼만데! 정? 그걸 정이라 해도 되나? 하여튼!

“제게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친구잖는가.”

“친구 기준이 낮으시군요. 제게는 마마가 친구가 아닙니다.”

“그럼 이렇게 해. 자넨 날 친구로 여기지 않으니 난 자네에게 친한 척 않겠네. 하지만 난 자네를 친구로 여기니, 자네는 내 친구처럼 굴어.”

“그러지요.”

기몽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러겠다 말하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그거 제 손해 아닙니까?”

“괜찮아. 그보다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제가 안 괜찮습니다.”

“부성이 어젯밤에 잡혀 왔지?”

“제 말 들리십니까?”

“그 애 수사는 시작했는가?”

초조하게 묻자 기몽은 한숨을 내쉬고서 관자놀이를 몇 번 엄지로 눌렀다.

그러면서 얼마나 꾸물거리는지, 나는 답답해서 벌떡 일어나 그의 관자놀이를 대신 엄지로 꽉꽉 눌러줬다.

“마, 마마! 마마!”

기몽은 당황한 듯했으나 내가 손을 내리고 “어때?” 하고 묻자 즉답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머리 아프지 않습니다.”

내가 다시 의자에 앉자,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대꾸했다.

“마마의 궁녀라면 어제 여기로 온 게 맞습니다.”

“그 애는 범인이 아니야, 장군. 그건 개 답응이 내게 준 선물이었어. 내 처소의 모든 사람이 그걸 봤어.”

초조해서 손으로 탁자를 빠르게 두드리자, 기몽은 또 한숨을 내쉬고서 천천히 말했다.

“저는. 절대로 수사에 사감을 섞지 않습니다.”

“내 말을 못 믿겠다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수사할 거란 뜻입니다.”

“정말인가?”

묻고 나니 정말일 것 같다. 그는 나를 범인이라 여길 때도 날 위해 수사를 열심히 해 줬으니까.

“기몽…….”

내가 감동하여 이름을 끈적하게 부르자, 기몽은 움찔하더니 먼저 몸을 일으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염려 마시지요. 이 기몽은 그 정도 능력은 되니까요.”

“몇 달 전에 자네를 속으로 욕했어. 최근엔 안 했고. 오래된 일이지만 취소할게.”

“그런 건 속으로만 하시지요. 굳이 안 알려주셔도 됩니다.”

* * *

수사청에 다녀온 개시시가 힘없이 자리에 앉자, 그녀의 측근 궁녀가 걱정하는 얼굴로 차를 가져다 앞에 놓았다.

“소주. 괜찮으세요?”

“아니.”

궁녀는 처량하게 앉은 개시시를 보다가 조금 화가 나는지 뾰로통해져서 툴툴댔다.

“천빈도 정말 너무하네요. 자기에게 그런 일이 생긴 건 안 됐지만, 그래도 마마까지 휩쓸리게 하다니요.”

한 시진 전. 기몽이 사람을 보내어 개시시를 수사청에 불렀다

수사청에 가 보니, 그는 천빈이 가지고 있던 가면을 준 사람이 개시시란 말을 들었다며 사실이냐고 물었다.

궁녀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개시시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만해. 천빈은 자기 궁녀를 구하려고 아는 걸 전부 말했을 뿐이야.”

“그래도요!”

“그리고 이 일은 천빈이 누군가의 계략에 걸린 거야. ……어쩌면 촉비가 연루된 건지도 몰라. 촉비는 내가 천빈에게 하얀 가면 선물한 걸 봤으니까.”

그래도 궁녀는 여전히 화를 풀지 못했다.

“그것과 이건 별개예요, 소주. 어쨌든 거기에 소주를 끌어들이면 소주가 곤란해지는 문제잖아요. 그런데도 천빈은 소주 이름을 말했어요. 천빈이 소주를 염려한다면 소주에게 먼저 언질이라도 해줘야 했어요.”

“됐어. 그만해.”

개시시가 단호하게 말하자 궁녀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으나 화난 기색은 풀지 못했다.

개시시는 미간을 찡그리고서 커다란 귀걸이를 빼내 ‘탕’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두었다.

* * *

부성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촉비랑 궁녀가 도둑이 들었다고 주장한 시간에요. 마침 제가 내무부에 있었더라고요.”

돌아온 부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씩 웃었고, 나와 원웅, 귀자는 부성을 둘러싸고서 다행이라고 코를 훌쩍였다.

물론 나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부성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전에 배신 비슷한 걸 해서 못 믿을 사람이라 여겼는데. 부성이 나를 위해서 저런 말도 해주다니…….

부성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웃으면서 부끄러워했다.

원웅은 그런 우리를 번갈아 보다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이 일에 개 답응이 연루되어 있는지, 촉비 개인의 짓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심해야겠어요, 마마. 촉비가 전에 마마와 부성이 자기 필첩 본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아아. 그 필첩. 시체들 발견 위치가 적혀 있던 그 필첩.

“그래야겠어.”

내가 중얼거리자 부성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물로 보이나 봐.”

“그럼요!”

“물은 물이지만 난 핏물이란 걸 모르네.”

“그럼! ……예?”

성질 같아서야 당장 달려가서 담장 너머로 던져 버리고 싶다.

하지만 무공을 안 익힌 촉비는 그러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지겠지.

물론 부러져도 상관없지만 그건 궁중 암투가 아니라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궁중답게 촉비에게 이 일을 돌려줄 수 있을까.

개시시는…… 일단 넘어가자. 개시시가 연루됐는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니까 지켜보겠어.

우선은 촉비부터 어떻게 해야 할 텐데.

그런데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원웅이 차를 타 오겠다고 밖으로 나갔는데,얼마 안 가 “마마! 마마!”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달려나가자 태감 여럿이 우르르 몰려와 원웅을 끌고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살기를 섞어 외치자, 태감들은 원웅을 끌고 가다가 황급히 멈춰서 무릎을 꿇었다.

근데 부성아…… 넌 왜 꿇는 거야.

“일어나 부성.”

“죄, 죄송해요, 마마. 습관적으로…….”

나는 부성을 일으켜 세우고서 태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왜 내 사람을 끌고 가고 있지?”

그 말에 태감들이 우물거렸다.

개중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선 건 전에 꾀병을 부리다가 황제에게 혼난 책임자 태감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천빈 마마. 살인사건이 끼지 않은 일은 원래 수사방 소관인데, 부성 낭자가 끌려간 건 수사청이었지요.”

“뭐라.”

태감은 움찔하면서도 자기 할 말을 끝까지 다해냈다.

“부성 낭자의 오해는 풀렸지만, 어쨌든 가면은 여기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니 원웅 낭자를 데려가는 겁니다.”

말을 마친 태감은 나를 힐긋 보더니 기분 나쁘게 웃었다.

“이미 가진 게 많으신 천빈 마마께서 고작 보옥 하나를 훔칠 것 같진 않으니까, 죄가 있다면 분명 아랫것들이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대답 대신 먹던 떡을 집어 던졌다.

내공을 약간 섞어서 던지자 태감은 “악!” 소리를 내면서 이마를 짚고 굴렀다.

동료 태감들은 ‘너무 과장하는데?’ 싶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책임자 태감은 아마도 진짜로 고통스러워서 구르는 걸 거다.

그 모습을 싸늘하게 보고 있으려니, 귀자가 뒤로 다가와 작게 알려주었다.

“여기선 보내는 게 낫습니다, 마마.”

“하지만 원웅이……!”

“소인도 원웅 낭자가 범인이 아닌 걸 압니다. 이 일은 소인이 처리할 테니, 마마는 나서지 마십시오.”

* * *

“폐하. 귀자가 왔습니다.”

기몽이 적어 올린 보고서를 읽던 황제에게 오원요가 다가와 알렸다.

월요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원요는 밖으로 나가더니 귀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귀자가 들어와 인사를 올리자 월요는 보고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천빈은?”

“몹시 속상해서 흐느끼십니다.”

승언이 ‘설마?’ 하는 시선을 보냈으나 귀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비록 황제가 천빈을 호위 겸 감시할 목적으로 보냈다고 하나, 어쨌든 그는 이제 천빈의 측근이기 때문이다.

황제가 그를 다시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그의 모든 영달은 천빈과 함께하게 되었으니, 그는 충심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선 천빈을 감싸고 지켜야 했다.

“우리 반숙이는 양파 깔 때 외엔 안 울 텐데.”

하지만 월요는 귀자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신경이 쓰이는 듯 월요는 인상을 찡그리고서 보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천빈도 천빈의 궁녀들도 범인이 아닐 거다. 그렇지?”

“그럼요. 그건 선물 받은 겁니다. 선물 받을 때 소신이 그 자리에 있었는걸요.”

“원웅이 잡혀갔다고.”

“예. 폐하께서 신에게 그 가면을 잠시 주신다면, 신이 가짜 범인을 만들어 원웅 낭자가 나올 수 있게 하겠습니다.”

월요가 고갯짓을 하자 오원요가 기몽에게 받은 그 ‘증거품’을 귀자에게 내밀었다.

귀자는 얼른 상자에서 가면만 빼내 품 안에 챙겼다.

“얼른 가서 천빈을 달래주어라.”

“예.”

황제의 이 ‘달래주라’라는 말은 얼른 이 일을 해결하란 뜻이다.

귀자는 영민하게 알아듣고서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귀자가 나가자 오원요는 문 쪽을 가만히 보다가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진심으로 이 일을 천빈 마마가 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텐데. 촉비 마마는 왜 이런 일을 꾸미셨을까요?”

황제가 천빈을 가장 총애한단 건 누구보다도 후궁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물론 여기서 황제가 아무런 증거나 정황 없이 천빈을 무조건 두둔하고 편든다면, 그가 ‘후궁에게 빠져 눈이 어두워졌다’고 수군댈 이들이 많았지만, 이런 일은 그렇게까지 가지 않고도 빠져나갈 방도가 있었다.

설령 빠져나가지 못하더라도 천빈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없었고.

그런데도 촉비가 굳이 이런 수를 쓴 게 오원요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월요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천빈을 도둑질에 얽으려는 게 아니다.”

“예? 그럼…….”

“천빈과 개 답응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거지. 천빈을 가장 잘 따르는 게 온 귀인과 개 답응이니까.”

“아!”

오원요는 당황해서 얼른 물었다.

“그럼 이걸 개 답응께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알리면?”

“예?”

“이미 천빈은 개 답응 이름을 기몽에게 말했지. 그걸로 개 답응은 서운한 마음이 생겼을 거다.”

“아…… 그럼 천빈 마마께라도 말씀드리면…….”

“개 답응은 이미 천빈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겼는데, 천빈이 홀로 마음을 풀면 경계심만 흐트러지지. 차라리 어느 정도 경계하게 두는 게 낫다.”

단호한 월요의 말에 오원요는 ‘그런가?’ 생각하면서도 걱정스러워졌다.

* * *

‘진범’이 나타나 촉비의 방에서 보석을 죄다 털어가는 바람에 임시 수사방에서도 원웅은 풀려났다.

원웅은 수사방 건물 앞에 침을 뱉고 돌아와서 엉엉 한참을 흐느꼈다.

심지어 멀쩡히 돌아온 부성과 달리 원웅은 그 짧은 시간에 모진 고초를 겪었는지 여기저기 몸이 멍투성이였다.

“제가 거짓으로 자백하게 하려고 자꾸 때려댔어요…….”

얼룩덜룩해진 원웅의 몸에 직접 약을 발라 주면서 나는 내 악명에 걸고 맹세했다.

아무래도 촉비에겐 내가 왜 ‘악적’으로 불리는지 후궁식으로 체험하게 해줘야겠어.

평화롭게 지내려고 했더니, 진짜 사람이 무슨 심심할 때 찍어 먹는 꿀떡인 줄 아나.

몹시 화가 난다. 내 처소 궁인들과는 몇 개월간 내내 붙어 다녀서인가. 생각 이상으로 정말로 화가 났다.

늘 나를 향하던 공격이 이번엔 내 궁녀들을 향했단 것도 화가 나고.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선택한 곳인데 또다시 여기저기서 공격이 들어오는 것도 화가 났다.

무공 실력을 조금 회복했는데도, 이런 식으로 공격하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단 것조차 화가 났다.

천년비 몸으로 안 돌아가고 천소여로 살려고 작성해서일까?

‘내 일’이란 게 온몸으로 느껴지면서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분노와 열정으로 변했다.

나는 눈을 감고 몇 번 심호흡했다. 그리고 밖에 들리지 않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궁전에서는 나 혼자 조심해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알았어.”

훌쩍이던 원웅과 부성, 귀자가 동시에 나를 보았다.

나는 약통을 내려놓고서 벌떡 일어서서 나 자신에게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젠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다. 다른 사람들이 나도 너희도 못 건드릴 만큼 미친 짓을 해주겠어!”

“네?”

“마, 마마!”

“안 됩니다!”

“비가 될 거야. 비가 됐는데도 시비를 걸면 황귀비가 될 거다. 황귀비가 됐는데도 시비를 걸면!”

뒷말은 얼굴이 하얘진 세 사람이 동시에 내 입을 틀어막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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