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홍학은 조용히 춤을 춘다
12월 말이 되어서야 도착할 거라 했던 떡돌이는 중순이 조금 지나자 바로 행궁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혼자서 온 게 아니라 아예 행렬을 만들어 온 걸 보니, 잠깐 다녀가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원웅은 이 일을 두고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마마가 보고 싶으셔서 오신 거예요.”
요즘 들어 원웅과 의견이 맞지 않는 부성도 오늘은 바로 맞장구쳤다.
“그럼요. 마마께서 최근에 쓰러지셨잖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빨리 오시는 게 분명해요.”
사실 내 생각도 그렇긴 해. 내가 잘 도착했나 궁금하단 이유만으로 여기까지 내려왔었잖아? 왔다가 바로 올라갔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날 염려하는 떡돌이니까, 이번에도 꽁지가 빠질세라 뛰어온 게 아닐까?
* * *
우리의 추측이 전부 진짜라는 건, 행궁에 도착한 일행을 맞이하러 나갔을 때. 떡돌이가 친히 인증해주었다.
뒤로 수많은 태감과 궁녀들, 호위들을 거느린 채 걸어오는 떡돌이의 모습은 한 폭의 그…… 무슨 그림이지.
하여튼 무슨 그림에 나오는 것 같았는데, 그 상태로 걸어오자마자 떡돌이가 나부터 힐긋 보더니 다가와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네가 다쳤단 소리를 듣고 일정을 당겨 빨리 왔다. 괜찮으냐?”
“사실 다친 건 아니었어요, 폐하.”
“쓰러졌다 들었는데.”
“쓰러졌지만 다친 건 아니었어요, 폐하.”
영약 과다 복용으로 기절했던 거니까.
떡돌이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곧 그러려니 넘어가고서 다음으로는 연비를 찾아 칭찬했다.
“얼핏 보기에도 행궁이 참으로 아름답다. 네가 맡아 하는 모든 일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구나.”
연비는 부드럽게 웃고서 겸양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인사했다.
“폐하께서 보살펴주신 덕입니다.”
하지만 태도만 그랬지, 말은 황당할 정도로 공손했다.
무슨 소리야, 연비. 떡돌이는 아무것도 안 했잖아. 쟤는 방금 왔다고.
행궁을 꾸민 건 그쪽이 그냥 열심히 한 덕이야.
그리고 내가 옆에서 아주 조금 도왔고.
하지만 연비는 정말로 모든 게 떡돌이 덕이라 할 셈인지, 조금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덩달아 나까지 묻힐 지경이라 열심히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연비는 피식 웃고서 내 공은 알려주었다.
“천빈이 많이 도왔습니다, 폐하.”
그나마 내 공은 묻히지 않은 데 안심해서 손을 내리자, 떡돌이가 힐긋 내 쪽을 다시 본다.
나는 흐뭇하게 웃고서, 내가 주도적으로 설치한 노란 등롱들을 양 손가락으로 가리켜주었다.
저거 내가 한 거! 저거 내가 한 거!
“…….”
하지만 떡돌이는 칭찬은커녕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연비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위로했다.
“짐이 뭘 했겠느냐. 모두 네가 한 거지. 철없는 동생을 데리고 고생이 많았다.”
뭐야? 내가 뭐가 없어?!
* * *
떡돌이는 나와 연비에게 모두 상을 주었지만, 나는 상을 받아도 화가 나서 방 안에 틀어박혔다.
그가 노란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노란 등롱을 설치하기까지 했는데.
그걸 좀 자랑했다고 철이 없다고 해?
나는 대인의 풍모를 갖추고 있지만, 내 공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그런데 떡돌이는 내가 좋다면서 날 무시했다. 그러니 더욱 화가 날 수밖에!
그렇게 세 시진이 지났을까.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떡돌이가 내 방 안으로 들어오며 나를 불렀다.
“반숙아.”
조심스럽고 상냥한 목소리를 내는 걸 보니, 자기도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긴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내 화를 풀 수는 없기에, 나는 단호하게 팔짱을 끼고서 옆으로 벽을 보고 앉았다.
“…….”
“반숙아?”
“…….”
“천빈. 짐의 말을 무시하느냐.”
그러나 치사하게도 떡돌이는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황명까지 들이댔다.
“천빈은 철이 없어 대답을 못 합니다요.”
여기에 더욱 화가 나서 씩씩 대답하자, 떡돌이는 보드랍게 웃더니 면사를 벗고 내 곁으로 다가와 내 몸을 자기의 팔로 감싸며 귀여운 척했다.
“화났느냐? 왜 화내고 그러느냐. 짐은 네가 보고 싶어 날짜까지 조정해 여기로 왔는데.”
“천빈은 철이 많아서 화도 많습니다요.”
하지만 내가 귀여운 척에 넘어가지 않자, 떡돌이는 한숨을 내쉬고서 팔을 내렸다.
“그 자리에서 먼저 춤을 춘 건 네가 아니냐.”
“난 춤을 춘 게 아니야. 손가락으로 등롱을 가리켰을 뿐이지!”
“어깨랑 엉덩이가 다른 방향으로 세 번 씰룩거렸는데, 그게 춤이 아니라고?”
“그건…… 그래!”
내 동작이 춤이 아니었단 걸 알려주기 위해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엉덩이와 어깨를 털어주자, 떡돌이는 심각하게 나를 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묻고는 탁자에 엎어졌다.
“제발…… 천빈. 너는 정말. 난 널 보면…….”
“난 춤을 춘 게 아니야. 내 춤은 우아한 홍학 같아. 이렇게 씰룩대지 않는다고. 이건 그냥 손동작에 따라온 몸동작이었어.”
“홍학 같은 춤은 무엇인데?”
나는 한 발로 땅을 굳건하게 딛고 서서 한 발을 세모 모양으로 접어들었다.
흐르는 강물에 고고하게 서서 물고기를 노리는 홍학처럼.
“이거다. 봐. 아주 정적이지?”
단호하게 말하고서 그를 스산하게 쳐다보자, 떡돌이는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탁자에 엎어졌다.
그가 어깨를 떨며 웃는 소리를 내는 바람에, 나는 더욱 자존심이 상해서 홍학 춤을 멈추고 그를 째려보았다.
그래도 내가 숨을 죽이고 씩씩거리고 있자니, 떡돌이는 눈치껏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다시 혼자 터져서 도로 엎어졌지만.
“날 비웃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짐은 널 비웃지 않아.”
“웃고 있잖아.”
“그러니까. 비웃는 게 아니라, 그냥 웃을 뿐이다.”
떡돌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면서 혼자 끅끅거리다가, 얼굴이 땅기는지 뒤늦게 손등으로 자기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그래. 쓰러졌다더니. 몸은 괜찮으냐?”
뒤늦게 그는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놀라서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속으로 ‘아주 많이 아프다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파서 쓰러진 게 아니야. 영약이 생겨서 먹었는데, 너무 강한 영약이라 잠깐 기절한 거지.”
“그거야말로 정말 위험한 상황 아니냐. 이제 괜찮으냐?”
“다행히 개 스승이 바로 앞에 있어서. 내공을 진정시키게 도와줬어.”
“그나마 다행이로군.”
안도하는 그의 표정에는 아까 날 놀려대던 태도가 전혀 없었다.
그걸 보자 대범한 내 마음이 이제야 조금 움직인다.
나는 골이 난 마음을 풀고서,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자랑했다.
“내공도 안정됐고, 무엇보다 영약을 먹어서 힘도 세졌어. 지금 폐하가 나랑 팔씨름하면 질지도 몰라.”
“벌써 그렇게 됐다고?”
“그럼.”
아직 영약을 반도 소화하지 못했지만, 무공 초보자인 내가 이런 것까지 알면 안 되겠지.
하지만 이런 내 배려심을 모르는 떡돌이는, 팔씨름 이야기에 코웃음을 치면서 나를 놀려댔다.
“네가 영약을 먹어도 팔씨름에선 짐을 이기진 못할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해?”
“영약을 먹으면 내공이 늘어나지 근육이 늘어나진 않으니까.”
“내공을 움직여서 팔씨름을 할 수도 있잖아.”
“그래도 마찬가지지.”
“…….”
생각해보니 떡돌이의 말이 맞다.
나는 근력을 기르고 있지만 아직 일 년도 채 훈련하지 못했다.
반면 떡돌이는 오랫동안 근력을 길러와서 팔이 아주 튼튼하지.
손에 내공을 넣어서 싸운다 해도, 내공 양도 떡돌이가 더 많을 게 뻔해.
떡돌이가 내색을 안 할 뿐, 분명 무공을 익힌 것 같거든.
이런 상황에서 나와 떡돌이가 팔씨름을 해봤자 결과는 같았다.
하지만…… 아니야, 떡돌이가 보기엔 이래도 근육은 부실할지 몰라.
“맞아. 보기 좋은 개떡이란 말도 있잖아.”
“그런 말이 있던가?”
“확인해봐야겠어. 보기만 탄탄하지 사실은 물살일지도 몰라.”
“무슨 소리냐?”
설명 대신 나는 떡돌이의 팔 위에 손을 올렸다.
“단단한 것 같긴 한데.”
떡돌이는 어리둥절해서 내 손을 보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반숙아?”
“네 팔 좀 확인해봐도 돼?”
안 된단 건가? 떡돌이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자기 옷고름 끝을 잡고 팔랑 잡아당겨 상체를 끌렀다.
옷이 자기들끼리 사부작사부작 소리를 내며 반쯤 흘러내리자, 그의 팔 맨살이 훤히 드러났다.
이렇게까지 해주네! 놀라서 그의 단단하고 두꺼운 팔과 그를 번갈아 보고 있자니, 떡돌이가 느긋하게 웃었다.
“마음대로.”
* * *
“오라버니.”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개원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사촌 동생인 개시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주. 오셨습니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가까이 온 개시시가 데려온 궁녀와 태감에게 눈짓하자 그들이 뒤로 물러났다.
단둘만 남게 되자 개시시는 한숨을 내쉬더니 개원을 좀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는 노골적인 불만이 가득해서 개원은 의아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아까 폐하께서 오셨을 때. 오라버니가 천빈 마마를 보던 걸 봤어.”
“그게 어쨌단 건지.”
“내가 오라버니를 몰라? 그 시선. 꼭 천년비를 보던 눈이었다고.”
너무 놀란 개원은 찰나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설마…… 이 영리하고 눈치 좋은 동생이…… 설마…… 그도 안 지 얼마 안 된 사실을…….
“오라버니. 천빈 마마를 사모하는 거지?”
빙글빙글 빠르게 돌던 머릿속이, 개시시의 뚱한 목소리에 털썩 제자리에 엎어졌다.
“어?”
개원이 둔하게 중얼거리자, 개시시는 팔짱을 끼고서 눈을 부릅떴다.
“거짓말할 생각 마. 오라버니는 누구를 사모하면 표정에서부터 다 티가 나거든. 눈이 막…… 하여튼 막 그래.”
“많이 티가 나느냐.”
“그렇다니까?”
한숨을 내쉰 개시시는 갑자기 얼굴이 험악해지더니 발치의 돌을 툭 찼다.
“너무 화나. 처음에 악적을 사모해서 집안을 발칵 뒤집더니. 그 여자가 죽고 다음으로 찾은 상대가 폐하의 후궁이라고?”
“네겐 미안하다.”
“뭘 미안해? 미안하다 하지 말고 차라리 아니라 부정을 해!”
“…….”
개원이 말없이 시선만 떨구자 개시시는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오라버니. 이 일이 알려지면 오라버니뿐만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가 위험해. 천빈 마마는 폐하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야!”
“…….”
“마음을 끊어. 아직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나 외엔.”
개원이 대답하지 않자 개시시는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리다가 나중에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천빈 마마와 오라버니 사이에서 서신을 전해주면 안 됐어. 난 오라버니가 천빈 마마를 너무 냉대하니까, 마마와 사이가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서신을 주고받게 해준 건데. 오라버니는…….”
개원은 천년비와 천빈이 동일인이란 걸 차마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고지식한 성품에, 가짜로라도 마음을 접겠단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개시시가 서늘하게 물었다.
“오라버니. 혹시…… 마마도 오라버니를 연모해? 서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
“내 일방적인 마음이다.”
“그나마 다행이네.”
복잡한 눈으로 개원을 바라보던 개시시는 먼발치에 한 무리의 후궁들이 웃으며 지나가자, 그쪽을 힐긋 보고서 몸을 돌렸다.
“이만 가볼게. 오라버니도 마음을 빨리 정리해. 그 마음은 오라버니가 사모해 마지않는 그 천빈 마마한테도 폐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