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i# 144화. 마음이 변한 걸까
개원의 얼굴을 마주 보았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이게 옛날 일인지 지금 일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천빈이 된 걸 알면서도 그게 꿈이고 지금 나는 천년비의 몸이란 생각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마마.”
그가 나를 ‘마마’라고 부른 뒤에야 나는 내 영혼이 천소여에게 들어온 일이 모두 사실이란 걸 확실하게 깨닫고 얼른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밀었다.
“마, 마마.”
곁에 있었는지, 귀자는 황급히 다가와서 내게 작게 알려주었다.
“개 대인이 마마를 구했습니다. 마마의 내공이 마구 진탕하고 있어서 도움을 주었어요.”
귀자는 개원이 날 도왔다는 것 때문에 그에게 좀 호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키고서 머리맡에 앉은 개원을 째려보았다.
개원은 내가 얼굴을 밀었는데도 조금도 민망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재차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내가 연비를 흉내 내 위엄 있게 대답하자, 개원은 희미하게 웃더니 누군가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 누군가가 작은 나무 쟁반에 받친 하얀 사발을 가져와 내게 내밀며 말했다.
“기운을 안정시키는 약입니다, 천빈 마마.”
사발 안에 든 짙고 끈적끈적한 갈색의 액체는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독하고 쓴 향이 났다.
내가 인상을 구기고서 개원을 보자, 그는 나긋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내공을 진정시켰지만 신체는 놀랐을 겁니다. 약을 드시지요.”
나는 독한 약 냄새를 애써 무시하고 빨리 단전을 살핀 다음, 내공이 제대로 자리 잡고 있자 얼른 거절했다.
“괜찮아. 마마는 아프지 않아.”
하지만 개원과 의원, 귀자는 내 거절을 듣고서도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약을 먹으라고 번갈아 가며 재촉해왔다.
“마마는 괜찮다니까.”
내 신분을 내세우면서 재차 거절해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나는 약을 억지로 먹고 황급히 귀자가 건네준 당과를 물어야 했다.
하지만 이로도 모자란지 개원이 이 새끼는 열심히 혀에서 쓴맛을 빼는 내게 쓴 잔소리까지 퍼부었다.
“이래서 제가 영약을 나중에 드시라 한 겁니다. 그런 독한 영약을 전혀 준비도 없이 벌컥 마시니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닙니까.”
그의 잔소리는 당연히 헛소리였다.
나는 천년비일 때 늘 이렇게 영약을 먹었다.
‘늘’이라고 부를 정도로 많이 먹지도 못했지만, 하여튼. 그래도 멀쩡했다고! 한 번도 기절한 적 없어.
내가 영약을 먹고 쓰러진 건 천소여의 몸이 내 생각보다 더 약해서일 뿐. 내 방식은 잘못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 나는 천년비가 아니라 천빈이었고, 무공의 고수가 아니라 이제 갓 무공을 배우는 풋내기일 뿐이었다.
당연히 내가 이렇게 주장한다고 해도 다들 그냥 막무가내로 우기는 거라고만 여기겠지.
내게 잔소리를 하는 게 하필 개원이라서인가.
그가 질책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열이 올라오다 못해 콧구멍에서 김이 나올 것 같다.
나는 입을 다물고 최대한 그의 말을 흘려들으려 했으나, 잘되지 않자 결국 화가 나서 귀자의 손을 가져다가 개원을 등짝을 찰싹 내려쳤다.
“!”
귀자는 당황해서 “제가 한 거 아닙니다!”라고 외쳤지만, 그가 한 게 맞다. 그의 손이 했으니까.
내 손이 아니니까, 당연히 내가 한 게 아니다.
개원은 입을 벌린 채 말을 멈췄고,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돌아누워 버렸다.
“본궁은 잘 거다. 말 걸지 마라.”
* * *
정말로 자는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천빈이 이불을 덮어쓰고 눈을 감아 버리자, 귀자는 한숨을 내쉬고서 개원과 의원에게 그만 나가자고 손짓했다.
개원은 미동도 하지 않고 등만 보이고 누운 천빈을, 정확히는 그 안에 있을 천년비를 바라보다가 귀자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은 그들은 천빈이 제대로 쉴 수 있도록 근처에서 멀어졌다.
의원은 약을 만들러 갔고, 귀자는 개원에게 재차 감사 인사를 했다.
“제 앞에서 벌어진 일이니 제 책임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마마는 이제 제 제자시니까요.”
“마마께서 자꾸 스스로를 ‘본궁’이라고 하시는데, 그건 사실 잘못된 호칭이랍니다.”
귀자는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리다가, 개원과 자신이 전혀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단 걸 깨닫자 웃으면서 또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마께서 조금이라도 잘못되셨다면 폐하께서 아주 진노하셨을 겁니다. 마마를 몹시 총애하시거든요.”
황제가 천빈을 총애한단 이야기에 개원의 안색이 흐려졌다.
하지만 그는 이를 내색하는 대신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천빈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 꾸며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귀자는 개원에게 여기 남아 있을 건지 물어보며 권했다.
“대인께선 여기 계속 계실 겁니까? 이제 마마께선 안정된 것 같으니 대인도 돌아가 쉬시지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요. 게다가 남의 내공을 움직이는 게 쉬운 일도 아니니까요.”
쉬운 일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남의 들끓는 내공을 다른 사람이 대신 다스려 주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의원들이 소란을 떨까 봐 귀자도 그 자리에선 내색하지 않았으나, 실력이 부족한 이가 남의 내공을 건드렸다간 같이 주화입마에 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런 어려운 일을 손쉽게 해내고서도 개원이 제대로 된 감사를 못 받으니, 사정을 아는 귀자는 조금 미안하기까지 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개원은 천빈의 단전을 살피면서 마음이 너무 복잡해진 터라, 지금 당장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 상태가 다시 나빠지실 수도 있으니 저는 이 근방에 좀 더 있겠습니다.”
“영약 병을 하나 더 가지고 계신 게 아니라면 괜찮을 텐데요.”
“혹시 모르니까요.”
“예. 그럼 저는 마마께서 갈아입으실 옷을 챙겨오고, 마마의 궁녀들도 데려오겠습니다.”
귀자가 떠나자 개원은 억지로 꾸며냈던 미소를 거두고서, 뒷짐을 지고 천빈이 누워 있을 전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이 바람 부는 날의 바다처럼 제멋대로 흔들렸다.
당장 천빈에게 달려가 ‘천년비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천년비…….’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그녀가 왜 정체를 감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천년비에게 왜 자신을 두고 자결한 건지 묻고 싶은데. 왜 우리가 사랑하던 곳에서 보란 듯 자결한 건지 묻고 싶은데.
그에 돌아오는 대답이 자신을 향한 미움과 원망일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그와 함께한 시간이 행복하지 않았던 걸까?
* * *
비록 영약을 먹고 기절했다가 개원이 자식에게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단전을 확인해보니, 내공이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늘어 있던 것이다.
원래도 나는 많은 내공을 가지고서 무식하게 내공만으로 싸워대는 무림인이 아니기에, 이 정도 내공만 있어도 내 옛 실력을 되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비원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영약을 줬네.’
감사하다면서 준 거니까, 그냥 구색 맞추기 정도일 거라 여겼는데.
어쨌든 이 정도로 내공이 단시간에 늘어난 게 어디야?
‘비록 내가 쌓은 내공이 아니라 내게 맞도록 하나하나 다 다듬어야겠지만, 직접 쌓는 것보단 훨씬 빠르고 편리하지.’
그리고 며칠 동안, 나는 밤을 새우고 낮에도 뜬눈을 뜬 채 내공을 다듬는 데 몰두했다.
* * *
유난히 차가운 날이었다.
나는 처소에 틀어박혀서 내공만 살피다가, 가만히 있기 지루해서 오랜만에 처소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개원이에게 무공을 배우는 날이니, 그전에 조금 몸도 풀어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얕게 솟은 언덕길을 얼마나 걸어갔을 때일까.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뒤에서 누군가 내게 발소리를 맞추어 따라오는 게 들렸다.
은신술을 펼쳐서 발소리를 숨긴 건 아니었으나, 내 발자국에 자기 발소리를 맞추다 보니 걷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체 누구길래? 의아해서 돌아보자, 개원이 내 뒤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왜 따라오지?”
그게 싫어서 내가 멈춰 서서 차갑게 묻자, 개원은 곁으로 다가오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또 마마께서 혼자 다니시다 이상한 걸 드시고 혼절하면 안 되니까요.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아직 수업 시간은 아니니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나는 딱 잘라 말하고서 다시 앞서 걸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뒤에서는 누군가 날 따라왔다.
그게 싫어서 나는 확 돌아서서 그에게 따지려다가, 개원의 단정한 표정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멍청하긴. 나는 개원이를 유혹해서 그에게 상처를 주어야 하잖아? 그런데 계속 밀어내기만 하면 되겠어?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지.
“옆으로 와.”
마음을 바꿔서 지시하자, 개원은 좀 놀란 듯 눈썹을 올려세웠다.
“마마의 옆으로…… 말씀이십니까.”
“그럼 누구 옆으로 가려고?”
내가 시큰둥하게 묻자,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곁으로 다가와 약간 거리를 두고 섰다.
하지만 내 옆에 서면서도 영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기쁜 눈빛을 감추긴 어려워서, 속으로 참 대단하다 싶었다.
천소여를 정말로 사모하는 것도 아닌 주제에 연기를 잘하네. 하긴. 그러니 나도 속여 넘겼겠지만.
욱 치솟으려는 마음을 다잡고서, 나는 개원에게 상냥한 척 웃으면서 당부했다.
“옆에서 따라와라. 뒤에서 따라오면 신경 쓰이니까.”
개원은 잠시 주저하는 것 같더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뒷짐을 지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눈앞에 뭔가 팔랑인다 싶더니, 이마에 차가운 게 닿았다.
멈춰 서서 고개를 들자 짙은 회색으로 물든 하늘에서 하얀 종잇조각을 잘게 찢어둔 것 같은 눈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
눈은 너무 적게 내리고 있어서, 소매나 어깨, 이마, 콧잔등에 닿았다가도 바로 녹아내렸다.
그 광경을 보고 보고 있다가 옆을 보니, 개원은 눈 내리는 하늘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는데 저절로 질문이 흘러나왔다.
“너는 눈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느냐?”
개원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무척 아리송한 눈길로 날 바라보았다.
아주 애매한 눈길로. 그러다가 개원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마마께선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지.”
“그게…… 누구입니까?”
“당연히 폐하지.”
내 단호한 말에 개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묘한 눈동자는 어쩐지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괜히 지켜보는 사람에게 신경질이 나게 했다.
뭐야. ‘천소여’와 자기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내가 자기라고 대답이라도 할 줄 알았나?
게다가 타천천과 날 만나게 한 다음, 알아서 ‘천소여는 천년비가 아니다’고 결론까지 냈잖아?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 하기에, 나는 휙 돌아서서 다시 걸어가 버렸다.
사실 내가 눈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은 그였다.
* * *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넓은 보폭으로 나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개원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실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려 했던 가능성 하나가 삐죽 흙을 뚫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혹시 천년비는…… 황제를 사랑하게 되어서 날 모른 척하는 건가. 내가 자신을 알아보면 황제 곁을 떠나 돌아오라 할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