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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43화 (143/283)

##  143화. 정말 너인 거냐…….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두 번 배신할 수 있어.”

내가 식사를 하다가 중얼거리자, 부성이 황급히 엎드리고서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

“저 아무것도 안 했어요, 마마!”

“어?”

뭐야. 왜 네가 갑자기 무서워해?

아아……. 그래. 부성이도 천소여를 배신한 적이 있지.

완전히 배신이라기엔 좀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네 얘기 아냐.”

손을 휘젓자, 부성은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래도 찔리는지 내 눈치를 살피다가 힘없이 밖으로 나갔다.

원웅은 건너편 의자에서 운문비단으로 잠옷을 만들다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마마?”

있었지. 개원이 자식이 천소여에게 반한 줄 알았는데, 반한 게 아니라 이용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단 걸 알아버렸거든.

그래서 고민이다.

“무공을 계속 배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야.”

개원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내가 무공 수업을 그만둬 버리면 이제 우리는 만날 일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복수도 요원한 일이 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의 속내를 알지만 그래도 모른 척 가까이 지내면서 복수를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복수를 포기해야 할까?

‘복수를 포기하다니. 그건 절대로 이 천년비가 할 짓이 아니지.’

은혜도 잊지 않지만 원한도 잊을 수 없어.

“좋아. 고민 끝났어.”

“벌써요?”

“계속 배울 거야.”

개원이 놈이 날 유혹하려 든다고? 해보라 해! 나도 그놈을 유혹할 생각이었으니까!

누가 먼저 유혹당하는지 한 번 두고 보자고!

난 황제까지 사로잡은 몸이다 이거야. 떡돌이가 나한테 매달린다고.

주위에 그렇게 매력적인 후궁들이 많은 떡돌이도 나한테 반했는데, 개원이라고 뭐 다르겠어?

* * *

마음을 먹었으면 당장 처리를 해야 한다.

다음 수업 때. 나는 개원이에게 화난 마음을 싹 감추고서, 평소보다 화사하고 아름답게 차려입고 나갔다.

자, 봐라. 천소여는 가만히 있으면 우울한 인상이지만 꾸미고 나면 아련하고 청순해 보인다고!

봐라, 황제가 반한 모습을!

마침 개원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수련용 목검을 닦고 있기에,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가 당당하게 서서 허리 위에 어깨를 올렸다.

“?”

하지만 개원이는 날 봐도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러다가 던진 한마디.

“옷을 갈아입고 오시지요. 그런 차림으론 검을 휘두를 수 없습니다.”

요따위다.

게다가…… 착각일까? 나한테 사모한다며 굴 때는 늘 나긋하게 웃던 놈이, 오늘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개시시의 생일에 이 몸으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오호라. 타천천이랑 내가 만나게 수작을 부렸는데도 아무 성과가 없으니, ‘천빈은 천년비가 아닌가보다’ 생각하게 된 거로구먼?

에라이, 이 속 보이는 놈아.

내가 혀를 끌끌 차자, 개원이 검을 닦다 말고서 나를 보고 인상을 찡그린다.

기분 나쁘다 이거지. 하지만 왜 혀를 찼는지 설명해주는 대신, 나는 챙겨온 영약병을 내밀었다.

“같이 산책을 다녀오면 영약을 먹게 해주겠다 했지. 그래서 가져왔어. 오늘 이걸 먹을 거다.”

개원은 그 말을 듣고서야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았다. 말리고 싶단 것처럼.

하지만 자기가 한 말이 있기 때문인지 말리진 못하고, 눈살만 찌푸린 채 내가 병뚜껑 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꼭 지금 드셔야 합니까? 어차피 마마의 물건이니 뺏어 먹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입으로 두말할 셈이냐?”

“마마를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영약은 잘못 섭취하면 효과는 잘 보지도 못하면서 괜히 몸만 앓을 수도 있습니다. 약을 잘못 쓰면 그게 독입니다.”

그래, 넌 독에 대해 잘 알아서 좋겠다 자식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집어넣고서, 나는 그에게 떡돌이가 한 방에 넘어간 백만금까지 미소를 지어준 다음 한 방에 영약을 들이켰다.

“마마!”

개원이 놀라 손을 뻗었지만 원체 약병이 작은지라 영약은 이미 내 식도로 돌진한 후였다.

나는 방긋 웃고서 약병 뚜껑을 닫은 다음, 주머니에 병을 넣고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자 봐. 아무렇지……!”

* * *

“마마!”

천빈이 웃는 상태로 고꾸라지자 개원은 황급히 그녀를 받쳐 들었다.

“마마? 마마!”

놀란 그는 우선 천빈의 호흡을 확인한 다음 손목을 짚고서 맥과 기를 확인했다.

“젠장.”

작게 욕이 나왔다. 우려했던 대로였다.

아직 기반이 제대로 닦이지 못한 몸에 무작정 영약부터 때려 붓자, 혈맥이 그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사고뭉치가 있나. 개원은 속으로 탄식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마침 귀자라는 무공 익힌 태감이 사태가 좋지 않은 걸 발견하고 기겁해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마마께서 영약을 한입에 털어 넣으셨습니다.”

“아니, 무슨 영약을요?”

“모르겠습니다. 그냥 자랑하더니 갑자기 드셨으니까요.”

“말리셔야지요!”

“병이 작았습니다. 뱉고 뭐고 할 틈도 없을 정도로요. 그리고 지금 그게 문젭니까?”

개원은 귀자의 등에 천빈을 업히며 물었다.

“의원은 어디 있습니까?”

귀자는 대답 대신 직접 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개원은 그 곁에서 속도를 맞추어 달렸다.

하지만 귀자도 개원도 알고 있었다.

몸에 넘치는 영약을 먹어서 생긴 이런 일은 일반 의원이 다스릴 수 없다는 걸.

일반 의원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환자의 몸 상태는 알 수 있어도 이를 치료할 수 없었다.

이런 문제는 무공을 익힌 의원이나 무공에 뛰어난 고수가 직접 살피고서 문제 된 점이 무엇인지 살펴야 했다.

“공공께서 직접 천빈 마마를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의원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며 개원이 작은 목소리로 묻자, 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러겠습니다.”

두 사람이 천빈을 업고 의원이 있는 부지에 도착하자, 의원들은 신선처럼 느긋하게 돌아다니다가 화들짝 놀라 다들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천빈 마마십니까?”

“무슨 일이지요?”

귀자는 환자용으로 마련된 방으로 들어가 천빈을 침상에 눕히며 빠르게 설명했다.

“마마께서 영약을 삼키셨는데, 좀 과한 걸 삼킨 모양입니다.”

귀자는 천빈의 손목을 짚고 눈을 감았다.

곧 그의 입에서 “이런.” 하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개원은 곁에서 걱정스럽게 상황을 지켜보다 물었다.

“왜 그럽니까?”

“내공이 날뛰고 있습니다. 과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엄청난 영약을 드신 모양입니다. 대체 어디서 구하신 건지.”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개원이 나서자 의원들은 움찔했지만, 귀자는 그러라고 했다.

“일으켜 세워 주십시오.”

귀자와 궁의들이 천빈이 상체를 일으켜 앉도록 해주자, 개원은 그녀의 등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을 얹었다.

눈을 감고 있자니 몸 안을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는 기의 덩어리들이 보였다.

갑자기 먹고 기절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일반적으로 먹는 그런 영약의 수준이 아닌 걸 털어 넣은 게 분명했다.

당장 처치해야 했으나 상대가 후궁이란 걸 인식한 개원은 일단 손을 내리고서 귀자와 궁의들에게 다급히 말했다.

“빨리 내공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아니면 정말로 위험해집니다.”

위험하단 말에 총태감이 쫓겨난 일을 떠올린 의원들이 벌벌 떨자, 귀자가 얼른 나서서 개원에게 청했다.

“천빈 마마를 구하는 게 우선입니다. 이런 걸 해결하려면 무공이 고강한 고수가 나서서 해야 하는데, 천빈 마마께서 대체 뭘 드신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마마의 상태는 제가 나설 상태가 아닙니다. 대인께서 나서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의원들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걸 설명해주려다 보니 설명이 좀 긴 감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개원은 귀자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눈을 감고 제대로 천빈에게 집중했다.

천빈의 몸 안에 들어간 영약은 제멋대로 날뛰는 말, 아니 용 같았다. 난동을 부리는 용.

혈관 안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이곳은 내가 있을 그릇이 아니다!’고 외치는 듯했다.

그 용은 이곳을 벗어나 하늘로 가고 싶어 하는 듯 몸의 주인을 마구잡이로 괴롭히기까지 했다.

‘말썽쟁이 같으니라고.’

개원은 이를 악물고서 천천히 그의 내공을 풀어 천빈의 혈도를 찾아 슬금슬금 들어갔다.

그런데 멋대로 날뛰는 영약의 기운을 진정시키면서 차츰 차츰 단전으로 가다 보니,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

개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옛날 천년비와 함께 지낼 적. 두 사람은 서로의 내공을 살피지 않았다. 살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들은 이미 자신의 무공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고, 심마에 빠지지도 않았다.

연인 간이라 해도 상대의 내공을 멋대로 파악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기에, 둘은 손을 잡아도 맥은 살피지 않았다.

그러다 단 한 번. 개원이 천년비의 내공을 살핀 적이 있었다.

천년비가 정파인들은 내공이 정순하다던데 정말이냐고 묻기에, 서로 보여주자고 말했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분위기가 미묘해져서 무공을 살피는 일은 곧 몸을 살피는 일로 넘어갔지만.

하여튼 그는 천년비의 내공을 딱 한 번 보았다. 그런데…….

‘흡사하다.’

단전에 형성된 내공의 형태가 천년비와 천빈이 몹시 흡사했다.

보통의 내공이라면 그냥 이렇게 살핀다고 해서 내용의 깊이나 양, 정순함 정도나 알 수 있다.

하지만 천년비가 익힌 무공은 굉장히 독특해서, 내공이 쌓인 방식이 다른 이들과 전혀 달랐다.

천년비 본인은 몰랐던 눈치였지만.

그런데 지금 천빈의 내공 형태가 그랬다.

당시의 천빈에 비하면 아주 아주 아주 쥐꼬리만큼 쌓여 있는 내공이지만, 분명 그가 느끼기엔 그랬다.

‘내공의 양이 많았더라면 확실하게 비교할 수 있을 텐데.’

개원이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자, 지켜보던 귀자와 의원들이 겁이 나서 달달 떨었다.

“혹시 문제가 생긴 걸까요? 개 대인이 왜 저러는 거죠?”

“나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조용히 합시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개원은 표정을 펴고서 우선 내공을 진정시키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마음이 혼란스러워 잘되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년비. 너냐. 이 약해빠진 몸 안에 들어가 있는 게…… 정말 너인 거냐.

* * *

꿈을 꿨다.

꿈이란 걸 알 수 있는 꿈을.

개원과 내가 두 번째로 만난 날이었다.

나는 그날도 쫓기고 있었고, 빌어먹을 정파놈들은 또 내 뒤를 쫓고 있었다.

숨이 차도록 뛰고 또 뛰다가 나는 물 안으로 숨어버렸다.

“악적 천년비! 그 목숨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다!”

“아버지의 원수! 죽어라!”

“찾아!”

내가 네 아버지의 원수가 아니라 네 아버지가 내 원수였다, 개자식들아.

물 안에서 이렇게 외쳤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나간 뒤에도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숨이 가쁘도록 물 안에 그렇게 잠긴 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나는 살고 싶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그냥 살아 있고 싶었다.

그런데 딱 그 한순간. 문득 내가 살아갈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뿌연 눈물 너머로 누군가 머리를 들이밀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꺼내 그자의 목을 찔렀다.

조금 전까지 살 이유를 생각했으면서도.

그러나 이전의 적들과 달리 그는 내 검을 교묘하게 피했다.

하지만 자신은 공격을 퍼붓지 않았다.

그는 검을 피하고는, 손수건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자가 독을 뿌리는 줄 알았다가, 뒤늦게 그걸 보고 주춤했다.

경계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자, 그가 마치 말 못 하는 짐승에게 하듯 재차 손수건을 건네는 시늉을 했다.

받으라는 듯.

그 얼굴이…….

* * *

꿈에서 깨어나자 다시 내 앞에 있었다.

그때처럼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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