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매화 향이 좋죠?
타천천은 처음엔 나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내 영혼이 들어온 몸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비원에게 천 귀인이니 천빈이니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본 건 아니잖아.
“무슨 일이십니까, 소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처음엔 아주 냉랭하게 물어보았다.
변태 주제에 제법 차가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기가 변태란 걸 감추기 위한 필사의 목소리겠지.
나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천견비의 5초식 미형벽을 펼쳤다.
타천천의 맞은편으로 가면서 그의 눈앞에 대고 남들은 볼 수 없게 손가락을 튕기는 것이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사라지자, 타천천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입을 벌리고 나를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설마…….”
내가 의자에 앉자 그는 가까스로 중얼거린다.
그래. 나다! 나는 어깨를 쭉 펴고 그를 위엄 있게 바라보았다.
타천천은 감동에 젖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잠시만.”
하지만 곧 그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계단 근처에 앉은 이에게 의미 모를 손짓을 했다.
그러자 죽립을 눌러써 얼굴을 알 수 없는 여자가 일어나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뭐야?”
“별거 아니야, 녕녕. 우리 대화를 남들이 들으면 안 되니 미리 조치를 한 거지.”
“조치?”
타천천은 무슨 조치를 한 건지 설명하는 대신 두 손을 탁자 위에 내려놓더니 나를 나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두 눈동자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비원이 내게 알려준 진실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날 구했다고.
“네가 날 구했다며.”
“좀 꼬이긴 했지만.”
“일단 고마워.”
“날 언제나 널 구하러 갈 거야, 녕녕.”
타천천을 상대할 때 꼭 유의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가 아무리 내게 아련한 눈빛을 보내도 절대로 그 눈빛을 순순히 받아들여선 안 된단 거다.
“내 이름은 녕녕이었던 적도 없고, 지금은 별명으로도 녕녕으론 못 불러.”
“보고받았어. 그럼 이젠 소소라 할까? 아니면 영영?”
“마마라 불러.”
“그 호칭이 마음에 든 모양이네.”
타천천은 입술을 누르며 눈웃음을 짓더니, 점소이를 불러 차를 가져오게 했다.
점소이가 매화차를 가져와 내려놓고 가자, 타천천은 내 앞에 놓인 잔에 차를 따라 주고서 흐뭇하게 웃었다.
“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니 좋다. 그렇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얼마든지 물어봐, 녕녕. 난 네가 질문하면 뭐든지 털어놓게 되는 그대의 꼭두각시니까.”
“비원에게도 물어본 건데. 진짜 천소여 영혼은 어디로 간 거야?”
“사라졌어. 착하게 살았으면 극락에 갔겠고, 아니라면 환생했겠지.”
“확실해? 천소여도 어딘가에서 부활했을 가능성은 없어?”
“전혀 불가능하진 않을걸. 내가 알기론 혼령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없지만, 무림에는 늘 은거고수들이 숨어 있다 나타나니까.”
“그렇지.”
“하지만 확률이 낮을 거야. 혼령술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까 말까 한데, 그 사람이 힘든 혼령술을 해서 굳이 총애 받지 못하던 후궁을 부활시킬 것 같진 않거든.”
“그런가.”
“애초에 그 몸으로 네가 들어간 것도 일종의 사고였잖아, 녕녕.”
‘사고였잖아’라고 말해봤자 내가 어떻게 알아? 난 그냥 죽었다 깨어나니 이 몸이었을 뿐인데.
“기타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건 내 고유의 능력 같은 거라. 비밀로 할게. 이 정도라도 답은 됐을 테니.”
그래도 타천천은 빼는 대신 나름 설명을 잘 해주었다.
나는 그가 준 매화차를 홀짝이며 창밖과 계단을 번갈아 보았다.
혹시 개원이 돌아오는 것 같으면 바로 원래 자리로 가야 하니까.
“그럼 지금 내 몸 안에는 누가 있어? 없단 소린 하지 마. 누가 안에 있으니까 이상한 행적 얘기가 계속 들여오는 거잖아. 요즘 내 몸이 너희랑 다닌다며?”
“우리 단체 사람.”
타천천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날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걱정 마, 녕녕. 그댈 원래 몸으로 돌려놓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니까.”
“그거야 그렇다 치고. 내 이름은 왜 멋대로 사용하는 거야?”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 천소여 평판은 내가 들어오고서 갑자기 확 높아졌으니까. 할 말이 없네.
나는 입을 꾹 다물고서 괜히 타천천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타천천이 날 보면서 계속 웃기만 했으므로, 쏘아봤자 소용이 없는 것 같아 그것도 그만두고 의자에 등만 기대었다.
어쨌든 타천천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고 답을 얻었으니 됐어.
일단, 천소여가 다시 이 몸을 차지할 일은 없단 거잖아?
그게 중요하지.
몸을 돌려받으러 올 사람이 없다면 나는 이 몸으로 계속 지내도 된다.
천년비 몸으로 깨어나 봤자 날 기다리는 건 원수들뿐이고, 제대로 조용한 삶을 살 수도 없다.
타천천 하는 걸 보니 사하비단에 들어가게 된다면 아군이 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자기 사상과 맞지 않는 단체에 몸을 담으면 피로하기만 할 뿐이다.
나 같은 인재를 그냥 놀고먹게 둘 리도 없으니, 사하비단에 들어가 봐야 그들을 위해 무공을 써야만 할 거고.
그럴 바에는 천소여 몸으로 편히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 복수를 하고 나면 정말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내면서?
“녕녕.”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타천천이 날 불렀다.
나는 무의식중에 만지작거리던 찻잔에서 손을 뗐다.
“왜?”
타천천은 아까와 달리 변태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신중한 표정을 하더니, 상체를 조금 내 쪽으로 숙이면서 작게 속삭였다.
“조심해. 네 영혼이 후궁 중 하나의 몸에 들어간 걸 개원이 알고 찾고 있다.”
뭐야? 나는 놀라서 앞에 놓인 찻잔을 엎을 뻔했다.
“개원이 어떻게? 왜 찾는데?”
“왜 찾는진 나도 몰라.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네 몸, 그러니까 가짜 천년비를 보더니 바로 네가 아닌 걸 알아차린 거 같아.”
“알아차렸다고 해서 어떻게 불똥이 후궁으로 튀었는데?”
“난 그와 네가 연인이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알려줬지. 다는 아니고. 후궁 몸에 있단 정도로만.”
“!”
개원 그 자식. 왜 갑자기 밖에 나가자면서 여기에 데려왔나 했더니.
내가 타천천과 있는 걸 보고 천년비인가 아닌가 확인하려 한 거구나!
그 너구리 같고 음흉한 자식! 나한테 사모하니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속으로는 날 죽일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거였어!
기가 막힌다. 그는 천소여를 연모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천소여 안에 내가 있는 게 아닌가, 확인하고 이용하려던 것뿐이었다.
* * *
개원은 천년비를 다루 3층으로 데려가기 이틀 전. 먼저 41천도에 있던 타천천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그에게 부탁했다.
“천년비가 후궁 몸 안에 들어갔다고 했소?”
“그랬지요.”
“혹시 그 후궁이 천빈이오?”
“저도 거기까진 몰라서.”
“내 생각엔 천빈 같소. 하지만 확신할 순 없어.”
“그렇습니까?”
“42천도 행궁 근처에 있는 다루로 오시오. 정확한 장소와 시각은 나중에 알려주지. 거기에 와 있으면 내가 천빈을 데리고 갈 테니…… 한 번 살펴주시오. 천빈 안에 천년비가 있는지 아닌지.”
개원은 약속대로 했고 타천천은 다루로 나왔다.
개원은 잠시 자리를 피했다가 타천천과 천빈이 대화하는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려 했다.
자신이 곁에 있으면, 천빈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안 드러낼지도 모른단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먼 곳에서 험악하게 싸우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아유정과 어떤 무림인 사이에 시비가 붙은 것이다.
“죽어라 천년비!”
아무래도 아유정, 정확히는 ‘천년비 몸’의 얼굴을 알아본 무림인 몇 명이 그녀에게 공격을 퍼붓는 상황 같았다.
개원은 아유정이 알아서 해결할 거라 여기면서도 그 자리를 바로 뜨지 못하고 상황을 살폈다.
아유정이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간다면 다루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그게 아니라면…….
‘천년비의 몸을 완전히 활용하지 못하는군.’
그러나 천년비의 몸을 사용해도 그 몸을 사용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유정은 천년비의 독문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고 뒤로 밀렸다.
강시의 몸이기에 신체는 우위를 점했으나, 상대의 무기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유정이 약해서가 아니라, 뜻밖에도 마주친 정파인들이 고강한 무공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러다 정파인의 검이 아유정의 쇄골부터 어깨까지를 길게 베는 순간.
결국 개원은 참지 못하고 나서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아유정과 정파인의 사이로 달려가 둘의 무기를 빼앗고서, 각자의 무기를 각자의 코앞에 들이밀며 서늘하게 경고했다.
“궁 근처에서 소란을 피우지 마라.”
정파인이 씩씩거리며 물러가자, 아유정은 베인 옷자락을 움켜잡고서 그에게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천년비와 꼭 같은 얼굴로.
“…….”
그 모습에 고통스러워진 개원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 주고는, 말없이 돌아서서 빠르게 다루로 돌아갔다.
가짜란 걸 알면서도 그 얼굴을 보면 천년비의 죽은 모습이 떠올라 심장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소동을 벌이고 돌아왔을 때. 이미 천빈은 돌아간 후였고, 타천천은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천빈은?”
개원이 다가가 묻자 타천천은 그에게 맞은편에 앉으란 손짓을 하고서 힘없이 대답했다.
“살펴봤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니라고?”
개원은 실망감에 사로잡혀 되물었다.
타천천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의 앞에 빈 잔을 주고 매화차를 따라주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 제 눈에 그랬단 거니까요.”
“말하는 모습, 필체, 성격이 천년비와 흡사한데. 정말로 아니었다고?”
“오호. 그렇게 많이 흡사하던가요?”
“그래.”
개원이 매화차를 한 모금 마시자, 타천천은 눈이 가느다래지도록 웃으며 교활하게 혀를 놀렸다.
“그럼 역시 아닐 겁니다.”
“역시 아니라니?”
“녕녕이 대인에게 자신을 드러낼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 드러냈을 테죠. 안 드러낸단 건 드러낼 마음이 없단 거니까요.”
“무슨 소리지?”
“대인에게 자기가 녕녕이란 걸 알리고 싶지 않다면 필체나 말투 같은 건 다 바꾸지 않았을까요?”
“!”
“그러니 오히려 천빈은 천년비가 아닌 거죠.”
타천천은 ‘천년비는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는 답안지를 뻔히 알면서도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는 개원이 천년비가 마셨던 매화차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즐겁게 웃었다.
아유정을 이용해 개원을 붙잡아 둔 건 그였다.
아유정에게 정파인이 달려든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정파인이 달려들지 않았더라도 아유정은 개원을 붙잡아두었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든.
‘유감입니다, 개 대인. 하지만 난 그쪽이 녕녕을 찾아내는 건 원하지 않거든. 애매하게 추측만 하고 있으세요.’
타천천은 속으로 희미하게 웃고서, 개원의 빈 잔에 차를 다시 따라주었다.
“매화 향이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