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지
“사랑은 하는데, 사랑은 안 받고 싶은 사랑도 있을까?”
내가 귤을 까면서 던진 질문에, 원웅과 부성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마마.”
“그러니까 내 말은…… 짝사랑만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까? 서로서로 사랑하는 거 말고, 그냥 짝사랑 좋아하는 사람.”
떡돌이 같은.
이번에도 원웅과 부성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있어요!”
“없어요.”
정반대로.
‘있다’고 대답한 부성과 ‘없다’고 대답한 원웅은 서로를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다시 날 보면서 자기들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사랑이 무서우면 짝사랑만 하고 싶을 거 같아요. 사랑에 크게 덴 적이 있거나…… 아니면 용기없는 사람이요.”
“그런 게 어딨어? 진짜 사랑하면 자기도 돌려받고 싶은 게 당연하지. 만약 짝사랑이 더 좋단 사람이 있잖아? 그럼 그건 변태다?”
질문을 한 건 나인데. 그때부터 부성과 원웅은 다시 짝사랑을 주제로 심오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구경하다가 다시 귤을 까 입에 넣었다.
‘쟤들도 잘 모르는구나.’
저 둘은 이게 황제 얘기란 걸 알면 반응을 어떻게 할까?
‘정말 모르겠어. 떡돌이는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내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달려올 정도면 날 많이 좋아하는 거 같은데. 왜 내 사랑은 안 받고 싶어 할까?’
* * *
떡돌이가 진눈깨비처럼 다녀간 이후. 놀리기라도 하듯 날씨는 갑자기 쌀쌀해졌다.
떡돌이에게 한 번 혼이 난 태감들도, 떡돌이가 혼을 내지 않은 태감들도 그날 이후 기합이 바짝 들었고, 연비는 그들에게 정교하면서도 세밀하게 지시해 크기만 하고 황량하던 행궁을 점차 안락한 분위기로 만들어갔다.
나는 떡돌이를 만난 날을 교훈 삼아 가끔은 얼굴을 가리고 행궁을 탈출해 돌아다녔고, 가끔은 연비를 따라다니며 수업을 받았으며, 나흘에 한 번씩은 개원을 만나 무공을 배웠다.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특히 무공 수련 부분에 있어서는 지겨울 정도로.
“마마께서는 기초 체력이 굉장히 좋으십니다. 게다가 근력도 뛰어나시고요.”
결국 이런 날이 계속되자, 나는 수업 도중 개원에게 대놓고 묻고 말았다.
“언제까지 기초만 가르쳐 줄 건가?”
이미 아는 걸 복습하는 기분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여야지.
개원이 자꾸 아는 내용을 늘어놓고 늘어놓고 늘어놓고, 나흘에 한 번 같은 말만 반복하는데. 아무리 좋은 목소리라도 나중엔 성질이 났다.
개원은 내 질문에,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사분사분하게 대답했다.
“기초가 가장 중요합니다, 마마. 기초를 잘 다지지 않으면 훗날에 제대로 익히기 어려워지니까요.”
“네가 내 기초 체력이 좋다고 칭찬한 지 아직 일각도 안 지났는데?”
“무공은 체력만으로 익힐 수 없습니다, 마마.”
솔직히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혹시 저거 저거, 나랑 있다가 떡돌이에게 혼난 일 때문에 저러는 거 아냐? 싶을 정도로.
결국 나중엔 ‘그래, 그냥 넌 기초만 가르쳐라’라는 심정이 되어서, 다음 수업 때는 무공 수련을 시작한 원래 목표나 세우기로 하고 바꿔 물었다.
“수련이야 그럼 느긋하게 간다 치고. 영약은 언제 먹어도 되지?”
“영약이요?”
“그래. 내가 무공을 수련한다니까 영약을 선물해 줬거든. 누가. 그걸 빨리 먹고 싶어.”
하지만 개원은 이번에도 반대했다.
“기초 토대부터 쌓고 드시지요, 마마. 가장 필요할 때요.”
그놈의 기초 이야기를 또 하면서.
그 소리를 듣는데 머릿속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개원과 친하게 지내야 한단 목표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그 자리에서 개원에게 따졌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봐. 나 가르치기 싫지? 후궁 가르치기 싫어서 지금 안 가르치고 최대한 버티려는 거지? 하고.
‘개원이 저 자식은 예전에도 저러긴 했어. 무공 얘기가 나오면 절대로 안 물러섰지.’
하긴. 정파 놈들 고지식한 거야 다 그렇지. 개원이라고 어디 예외겠어?
* * *
“무공 스승을 바꾸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마마?”
결국 나와 개원이 사이의 그 의견 차는, 내 궁녀들이 눈치챌 정도까지 험악해졌다.
수련을 마치고 처소로 돌아가자마자 부성이 세수할 물을 떠 갖다 주며 슬쩍 말할 정도로.
“왜?”
“마마랑 개 대인이 언쟁하는 소리가 다 들리니까요.”
들리겠지. 떡돌이가 공개적인 곳에서 무공을 수련하라고 한 터라, 오가면서 내 수련 모습을 모두가 볼 수 있는데.
아. 혹시 그래서 개원이가 더 수련을 안 시키려는 건가? 날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기 독문 무공이 유출될까 봐?
……아냐. 그건 아닐 거야. 애초에 정식 제자도 아닌 내게 독문 무공까지 가르칠 리가 없으니까.
시중에 굴러다닐 정도는 아닌, 하지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이류 무공서 수준으로 가르치려 했겠지.
“그래도 마마, 제 생각엔 계속 개 대인한테 배우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지금 와서 무공 스승을 바꾸면 개 답응 보기도 좀 그럴 거고…… 두 분이 친하잖아요. 게다가 아예 의견을 못 낼 정도로 기가 약한 사람이면 감히 마마께 무공을 가르치지도 못할 거예요.”
원웅이 자기와 또 반대 의견을 내밀자, 부성이 내가 다 쓴 세숫물을 들고 나가다가 인상을 구겼다.
부성의 표정은 ‘쟤 요즘 왜 자꾸 나한테 시비지?’에 가까워 보였으나, 원웅은 싸울 생각은 아니었는지 얼른 내게 보송보송한 수건을 가져와 내밀었다.
“얼굴 닦으셔야지요.”
다행히 부성도 더 기분 나빠하는 대신 바로 밖으로 나가서, 나는 얼굴에 천을 대고서 원웅과 부성이 한 말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애초에 난 영약 때문에 무공을 익히겠다고 나선 거니까. 그걸 위주로 생각을 해봐야지.
* * *
그런데……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꼭 영약을 지금 드시고 싶으십니까?”
이번에도 고리타분하게 기초, 기초만 반복하겠지, 생각하면서 다음 수업에 가보니 뜻밖에도 개원이 평소와 다른 말을 했다.
“맞아.”
내가 맞다고 하자, 개원은 잠시 신중하게 생각해 보는 척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마마께서는 아직도 몰래 호위를 물리고 밖을 다니십니까?”
어떻게 알았어?
“아니.”
놀랐지만 부정하자, 개원은 전혀 믿지 않는 얼굴로 “그렇군요.” 하고 중얼거리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있는 건 승언이를 대신해 내 무공 수련을 지켜보는 귀자뿐이었다.
개원은 귀자가 잠시 다른 곳을 보는 걸 확인하더니, 일부러 목검을 가져가 천으로 닦는 시늉을 하면서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러면 저와 한 번 더 산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때처럼. 행궁 밖에서요.”
산책?
“둘이서 말이냐?”
“예.”
“왜?”
“……즐거웠습니다. 그날.”
“둘이서 산책한 날 말이냐?”
“예.”
그러니까. 그날이 왜?
“그날 넌 폐하께 걸려 혼쭐이 났잖아.”
그런데도 즐거웠다고? 떨떠름해서 묻자, 개원은 잠시 표정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곧 차분한 모습을 회복하고서 웃었다.
“네.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마마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개 대인…….”
나는 개원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감동받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 새끼 이거 무슨 꿍꿍이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연신 뇌를 이리저리 굴렸다.
아니, 그렇잖아. 개원이 얘 갑자기 왜 이래? 이해가 안 갔다.
그가 떡돌이한테 혼난 날 일을 즐거워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고지식한 데다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개원이가 나서서 내게 월담을 권유하고, 그로도 모자라 내내 반대했던 영약을 조건으로 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단 거다.
얘가 웬만한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는 이럴 리가 없는데.
“싫으십니까?”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평소보다 세 배 정도 정중한 목소리로 물으며 그윽하기까지 한 시선을 보냈다.
그 모습은 정말로 멋졌지만, 그걸 보자 꿍꿍이는 더욱더 있어 보였다.
자기 잘난 걸 이용해먹으려 들 정도면 진짜로 꽤 복잡한 꿍꿍이가 있던 건데…….
“마마.”
하지만 그를 의심하면서도, 나는 결국 알았다고 대답했다.
“알았다. 알았어. 가자.”
그가 무슨 꿍꿍이로 저러든, 뭐 어쩌겠어? 꿍꿍이는 나도 있는걸.
* * *
그리고 다음 날 오시초.
미리 개원과 약속한 대로, 나는 홀로 산책을 하겠다고 태감과 궁녀들을 모두 따돌린 다음, 인적 드문 곳을 통해 행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고서 약속한 장소 -전에 그가 내게 음료수를 쏟은- 그 장소로 가보니, 개원이는 평소보다 좀 더 멋들어진 차림으로 길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얼굴에 면사를 써 가리고 나갔는데도 그는 내가 다가가자 바로 알아보았고, 나는 몹시 바쁜 척 물었다.
“어딜 가고 싶어서 자꾸 만나자 했느냐?”
“목적지는 없습니다. 그저 함께 걷고 싶었을 뿐이지요.”
거짓말은.
“궁 안에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많아 마마와 산책하기도 어려우니까요.”
내가 미심쩍은 시선을 던지자, 개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제가 마마를 사모하는 걸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하도 영약을 못 먹게 하기에 그 마음은 이미 식은 줄 알았는데.”
“걱정하니 영약을 함부로 드시지 말라 한 겁니다.”
내가 그를 흘겨보다가 앞서가자, 개원은 친절하게 웃더니 옆으로 다가와 방향을 조금 틀어주며 권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그쪽 방향에 준비해 둔 꿍꿍이가 있나 봐?
* * *
개원이 날 데려간 곳은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다루였다.
3층 정도 되는 건물이었고, 그 주위로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건물.
약간 격식을 갖추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지만, 전에 본 태안루와 달리 입구에서 손님들을 가려내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 곳.
왜 이런 곳으로 오자 한 걸까?
멀쩡한 다루를 보자 의심은 더 깊어졌지만, 나는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3층에 올라가 자리를 잡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개원이의 꿍꿍이가 저만치 옆으로 밀려났다.
‘타천천!’
41천도에서 본 그 타천천이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것이다.
‘41천도에서 이쪽으로 온 건가? 왜?’
그에게 물어볼 게 있던 터라, 나는 예상치 못한 얼굴을 발견하고 잠시 손가락을 움찔했다.
너무 교묘하고 시기적절하다 보니, 저절로 개원에게 의심이 갔다.
혹시 개원이 얘, 내가 타천천을 보게 하려고 데리고 나왔나?
하지만 왜? 개원은 타천천과 친분이 없잖아?
타천천은 사파였고 개원은 정파였다. 날 제외하면 딱히 공통된 친분이 있지도 않을 테고.
그냥 생각해 볼 땐 개원이 날 타천천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기로 데려왔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연일까?’
“저쪽 자리로 가지요.”
‘일단 안내하는 자리는 타천천이 앉은 자리와 완전히 떨어진 곳이긴 한데…….’
영 찝찝해서인가. 인상이 반사적으로 구겨지려고 한다.
그래도 표정을 관리하고 있자니, 개원이 점소이가 오기도 전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게 말했다.
“실은 마마. 마마께 드리고 싶어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이 옆집에 잠시 맡아달라 했으니, 금세 찾아서 오겠습니다.”
“차 마시고 가지?”
“먼저 마시고 계시지요. 금세 올 겁니다.”
옆집에 맡겨뒀단 물건이 꿍꿍이인 걸까, 타천천이 있는 이곳에 날 데려온 게 꿍꿍이인 걸까?
어쨌든 이곳에서라도 타천천을 보았으니 다행이었다.
내가 41천도에 갈려고 행궁 밖을 오가면서 가출 준비를 한 것도 타천천을 보려던 것 때문이었잖아?
행궁 밖으로 멀리까지 혼자 다녀올 수는 없다고 해서 잡혀 있었지만.
개원이 나가자마자,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타천천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