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은연중에 신경전
나는 개원이가 들어갈 때 따라 같이 들어가려 했다. 나도 떡돌이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송구합니다, 마마. 폐하께서 부른 건 개 대인뿐입니다.”
하지만 승언이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와 서며 막는 바람에,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폐하!”
혹시나 싶어서 문 너머로 떡돌이를 불러보았지만, 떡돌이는 치사하게도 승언이를 편들었다.
“천빈, 우리는 나중에 얘기하지.”
너무하는군 너무해. 나도 볼일이 있는데!
나는 시무룩해진 심기를 드러내기 위해 입술을 꽉 다물고서 턱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이렇게 해봐야 떡돌이가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 분노한 모습이 승언이에게라도 가엾어 보였나 보다.
씩씩거리고 있자니, 승언이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소곤소곤 알려주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지요. 폐하께서는 마마께 화를 내기 싫으니 저러시는 겁니다.”
“화를 내다니?”
“폐하께선 마마가 보고 싶어 여기로 오셨거든요. 한데 마마는 저자와 나란히 사이좋게 걸어가고 있으니, 그걸 보고 몹시 투기하셨습니다.”
뭐?
“내가 개원이와 사이가 좋아 보였어?”
“그게 중요한 겁니까?”
당연하지! 아, 하나 더 중요한 게 있네. 떡돌이가 나랑 개원이 사이에 투기를 했다고?
“다 들린다.”
승언은 대답을 해주려 했으나, 떡돌이가 또다시 끼어드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고개만 저었다.
아, 떡돌이 쟨 왜 저렇게 귀가 밝아? 게다가 왜 자꾸 남의 대화에 끼어드는 거야?
어쨌든 개원이가 오면서 태감들의 꾸중 시간도 끝이 났나 보다.
꾀병 부리던 태감들은 이제야 우르르 밖으로 줄지어 나왔다.
게다가 와. 떡돌이가 얼마나 혼을 낸 건지, 그들은 나오다가 나를 보자 다들 흠칫흠칫 떨더니,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서 인사하고 지나갔다.
총책임자였던 태감만은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승언이 내 옆에서 날카롭게 쏘아보자 바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승언은 총책임자 태감이 사라지자 걱정스러운 듯 작게 중얼거렸다.
“눈빛이 좋지 않군요. 혹시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 정도 가지고 뭘.”
정파 무림인들이 날 노려보던 거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
“마마께선 의외로 너그러운 면이 있으십니다.”
“그렇지?”
“승언아. 천빈이 피곤할 테니 조용한 정자에 모시고 가 쉬게 하라.”
떡돌이가 또다시 안쪽에서 끼어드는 바람에, 나와 승언의 대화는 또 애매한 데서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이쯤 되니 더는 전각 앞에 죽치고 있기도 뭐해서, 나는 궁금한 마음을 꾹 누르고 승언을 따라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 * *
승언과 천빈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지 이제야 밖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주위에 인적이 사라지자, 월요는 우두커니 서 있는 개원에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 손짓했다.
그러고는 개원이 의자에 채 앉기도 전에 질문했다.
“짐이 왜 널 불렀는지 아느냐.”
개원은 단정하게 앉으며 대답했다.
“아둔한 머리론 짐작하기 힘듭니다. 송구합니다.”
모나지 않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말과 달리, 개원은 황제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다.
천빈이 그의 소맷자락으로 손을 닦으려 할 때 황제가 빠르게 다가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려쳤기 때문이다.
그런 개원을 보다가, 월요는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혼자 생각해보았다. 왜 개 답응의 사촌인 그대가 짐의 후궁과 함께 거리를 거닐던 걸까. 몇 가지 답이 나왔지.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짐의 불안 아니면 희망일 뿐이더군.”
“!”
“그래서 직접 묻기로 하였다. 왜 같이 있던 거지?”
궁궐 사람들은 다들 말을 빙빙 돌려서 한단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기에, 개원은 황제가 이렇게 대놓고 물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느 정도 대비는 하고 있었기에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폐하의 희망에 가까운 답일 것입니다. 소인은 무공 수련 날짜를 잡기 위해 행궁에 가던 길이었고, 도중에 마마를 발견했습니다. 주위에 다른 호위가 아무도 없기에 호위를 자처하였지요. 위험해 보였으니까요.”
말을 마친 개원은 황제를 힐긋 곁눈질하고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제 행동 때문에 마마께 폐가 되었을까 염려되는군요.”
실제로 그가 염려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천빈의 몸속에 있는 게 천년비이든 아니든.
월요의 한쪽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갔다.
“염려된다면 앞으론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
“짐이 발견했으니 그나마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발견했다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특히 천빈의 적들이 보았더라면.”
“…….”
“대답.”
이쯤에서 개원이 ‘예’ 하고 대답했다면 이 대화는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개원은 내내 순순히 굴어 놓고서는 막판에 ‘예’ 하고 대답하는 대신 몹시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직설적으로 물었다.
“하면 폐하께서는, 제가 천빈 마마가 혼자 위험하게 이동하는 걸 뵈어도 모른 척 지나가란 말씀입니까.”
미약한 반항심이 어린 말에 월요의 시선이 서늘해지자 개원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질문을 물린 건 아니어서, 월요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뱉었다.
“온순한 얼굴을 하고서 성질 있군.”
“송구합니다. 소신은 고지식하여, 이런 일이 또 벌어진다면 어찌해야 할지 융통성 있는 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월요는 입가에 감돌았던 웃음기를 싹 거두고서 건조하고 딱딱하게 경고했다.
“나란히 길을 가던 게 문제가 아니다. 천빈을 보는 그대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이 말이다.”
“!”
개원은 잠시 흠칫했으나, 월요가 차갑게 바라보자 다시 차분한 태도를 되찾고서 덤덤하게 변명했다.
“송구하오나, 신은 폐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에게 어떤 눈빛이 보였다면, 그건 천빈 마마를 존경하기에 나온 눈빛일 겁니다.”
그 대답에 월요는 더 말을 나누는 대신 바로 “승언아!” 하고 불렀다.
그러고는 승언이 들어오자, 그의 턱을 잡아 개원 쪽으로 돌려 보이며 물었다.
“보이느냐.”
그 행동에 개원이 의아해서 바라보자, 월요는 승언의 턱을 놓아주면서 차갑게 일갈했다.
“존경하는 눈은 이런 거다.”
말을 마친 황제가 개원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런 게 아니라.” 하고 덧붙이자, 승언의 눈동자가 빠르게 떨렸다.
그는 천빈을 근처 정자에 데려다주고 온 터라, 안쪽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각한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어서, 승언은 괜히 눈치를 보며 황제와 개원을 번갈아 살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쥐가 꼬리 치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의 적막을 뚫고, 월요가 갑자기 아까와는 전혀 다른 따뜻한 목소리로 개원에게 물었다.
“그래, 무공 수련 이야기를 하러 왔다고?”
“……예.”
개원이 움찔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하자, 월요는 “그럼 얘기해야지.” 하고 중얼거리고서 승언에게 지시했다.
“승언아. 천빈을 데려와라.”
* * *
정자에서 혼자 차를 마시고 있자니, 승언이 찾아와서 돌아가 무공 수련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나는 개원이와 떡돌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내내 궁금했기에, 일어서면서 얼른 물어보았다.
“폐하랑 개 스승이 무슨 얘길 하고 있었어?”
“저도 모르겠습니다. 분위기가 좋진 않던데요.”
“분위기가 안 좋다니?”
그러나 승언이는 자기도 들은 게 없다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일단 가기나 하자고 나를 재촉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의아했지만 일단 따라가서 떡돌이가 있는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의자에 앉은 개원이가 보였다.
그리고 다른 의자도 많은데 굳이 자기 곁으로 오라며 손을 뻗고 있는 떡돌이도.
내가 떡돌의 곁으로 다가가자, 그는 나를 옆에 앉히고서 개원에게 알렸다.
“자. 천빈이 왔으니 이젠 수업 이야기를 해라. 짐은 조용히 있을 테니.”
‘이젠 수업 이야기를 해라’는 말을 들으니, 떡돌이도 개원이 내 수업 문제로 왔다는 건 들은 모양이네.
그런데 왜 굳이 자기가 있는 데서 수업 얘길 하라는 거지? 나는 의아해서 떡돌이를 보았다.
그러나 떡돌이는 왜 굳이 자기 앞에서 수업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도 설명하지 않고서, 얘기를 계속하라고 손짓만 했다.
이상하네? 진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개원이를 보자, 개원은 좀 어두운 얼굴로 있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묵례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수업 방식은 이전과 같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마?”
얘는 목소리가 왜 이래? 뭐야. 진짜로 둘이 무슨 얘길 했길래 그래?
* * *
결국 전각 안에서는 무공 수련 날짜 이야기만 했다. 그것도 아주 짧게.
짧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날짜를 잡고 밖으로 나오자 떡돌이는 개원에게 그만 돌아가라 명령했는데, 막상 개원이가 돌아가자 자기도 내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벌써?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오자마자 태감들 혼내고 개원이 혼내고. 혼만 내다 가는 거 같은데?
내가 당황해 묻자 떡돌이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말했다.
“네가 잘 도착했나 확인하고 싶어 온 거다. 급히 온 거니 급히 가 봐야지.”
“내가 보고 싶어서 왔어?”
고작 그 이유 때문에?
“그래. 안심이 되어야지. 넌 의외로 사고를 많이 치지 않느냐.”
“내가 무슨 사고를 쳤다고.”
난 사고를 치고 다니지 않는다. 사고에 휘말려 수습을 하고 다닌 거지.
하지만 떡돌이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라, 나는 괜히 떡돌이의 신발 끝을 내 신발 끝으로 쿡쿡 찌르다가 물었다.
“근데 진짜 개원하곤 무슨 이야기 했어?”
떡돌이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별 얘기 하지 않았다.”
“별 얘기 안 한 얼굴이 아니던데?”
“찔리는 게 있었나 보지.”
“떡돌이 네가?”
“그자가.”
“표정은 네가 제일 안 좋았어, 떡돌아.”
“…….”
“무슨 말 했어? 응? 나 이런 거 궁금하면 잠 못 잔단 말이야. 말해줘. 응?”
떡돌이를 조르느라 그의 손을 잡고 핑핑 흔들자, 승언이 점점 도끼눈을 뜬다.
무엄한 짓이라 여기는 거겠지.
반면 월요는 내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있다가, 내가 그의 손을 통 놓아줄 기색이 아니자 마지못해 조금 털어놓았다.
“눈빛 이야기를 했다. 그자 주장에 따르면, 승언이 짐을 보는 눈과 자기가 널 보는 눈이 같다더군.”
뭐? 개원이는 천소여를 연모하잖아? 근데 개원이 천소여를 연모하는 눈이 승언이 떡돌이를 보는 눈이랑 같다고?
그 말은 승언이도…….
“왜 자꾸 절 가지고 그러십니까.”
내가 승언을 쳐다보자, 승언이 불쾌하다는 듯 툴툴거린다.
나는 승언에게 ‘폐하를 연모해?’라고 물어보려다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이 얘기를 하면 ‘내가 볼 때 개원이는 날 좋아해’라고 이실직고하는 것처럼 들릴 테니까.
대신 나는 눈치 좋게 둘러댔다.
“개 답응 사촌은 내 그림자가 되고 싶은가 보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을 돌렸는데도, 월요는 개원의 이야기도 하기 싫은지 대답 대신 내 손을 잡고 눈을 마주 보았다.
일부러 개원이 얘기를 피하기 위해 날 이렇게 보나 싶을 만큼, 그윽하고 분위기 좋은 눈동자로.
그 눈빛이 참으로 깊게 여겨져서 그를 마주 보고 있으려니, 떡돌이는 이번에는 한숨을 내쉬고서 중얼거렸다.
“안 보일 땐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면 마음이 편할 것 같더니. 얼굴을 보고 나니 돌아가고 싶지 않다. 데리고 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