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화난 떡돌이
승언은 월요의 눈동자를 주시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소신이 몰래 쫓아 볼는지요?”
“되었다.”
하지만 월요는 싫은 얼굴을 하고서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개 답응의 사촌은 손꼽히는 무림인이라 하지 않았느냐.”
“예. 무림에서는 영웅으로 통한다지요. 그러니 쫓아가 보는 게…….”
“그러니 놔두란 것이다. 널 눈치챌 수도 있으니.”
승언은 황제의 인내심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우리 폐하는 침착하시구나.
사모하는 사람이 다른 이와 저렇게 사이좋아 보이는데,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지켜보는 쪽이 일방적으로 권력이 훨씬 강한 상황에서 말이다.
“폐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이런 힘의 관계까지 떠올리자 황제가 더욱 대단하게 여겨져서, 승언은 재차 탄복하면서 돌아섰다.
“그러면 폐하, 이쪽으로 물러서…….”
하지만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 월요는 이미 돌아서서 개원과 천빈 쪽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폐하?! 직접 가시려고 저더러 가지 말라 하신 겁니까?’
승언은 당황해서 그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이미 황제는 성큼성큼 빠르게 그들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천빈이 천년비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자, 개원은 점차 초조해졌다.
천빈은 이제 궁전으로 돌아가려는 듯했고 두 사람이 사적인 대화를 나눌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무공 수련을 할 때 다시 만날 테지만 그땐 둘이서만 있지 못할 터.
짧은 시간 안에 서둘러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아야 했다.
판단을 마친 개원은 신중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천빈이 목이 마르다며 근처에서 과즙차를 사자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첫 만남 때. 그는 천년비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천년비는 나중에 당시 그의 행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고.
그때처럼 손수건을 건네보면 어떨까?
천빈이 천년비라면, 자신의 행동에 무언가 반응이 있을 것이다. 눈동자가 흔들린다거나 당황하는 식으로.
“자. 개 소협. 그쪽 거.”
“감사합니다.”
판단을 마치자마자 개원은 잔을 받는 척하고서 몸을 돌리다가, 일부러 잔에 든 물을 천빈의 손으로 조금 흘렸다.
“?”
“이런, 죄송합니다.”
개원은 재빨리 사과하면서 얼른 손수건을 꺼내기 위해 소매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손수건을 꺼내려다 보니, 누군가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아주 날카롭고 적대적인 시선.
‘적?’
그는 소매에서 손을 빼고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이 자식이 지금 장난하나?’
사람을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지금 뭐 하잔 거야? 왜 손수건을 줄 것처럼 굴다가 안 줘?
쏟은 거야 실수라고 해도 뒤처리가 너무 짜증 나는데?
후…… 나는 공평한 사람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공평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공평은, 그가 내 손에 과즙을 쏟았다면 내게 손수건을 바쳐야 한단 거다.
하지만 손수건을 바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내가 알아서 손수건 대용을 찾는 수밖에!
나는 개원의 소맷자락을 가져다 손을 쓱쓱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 정도 닦았으려나.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개원의 소매를 찰싹 내려치는 게 아닌가.
얼마나 야무지게 때리던지 찰진 살 때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누구?’
의아해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연한 보라색의 부드러워 보이는 소매가 내 눈앞에 내밀어졌다. 어쩌라고?
“이걸로 닦아라. 이게 더욱 부드럽다.”
의아해서 고개를 드니…… 떡돌이다! 떡돌이는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뒤에 승언이가 있는 걸 보니 분명 떡돌이었다.
“어?”
아니 얘가 왜 여기 있데? 나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그러고서 승언을 보니, 그가 절대로 아는 척하면 안 된다고 ‘쉿! 쉿!’ 하는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닌가.
“누구세요?”
그걸 보고 눈치껏 모르는 척을 해주자, 떡돌이는 잠시 당황한 눈으로 날 보다가 물었다.
“날 모르겠어?”
알겠어. 근데 쟤가 모른 척해달라잖아.
내가 눈으로 승언이를 가리키자, 승언이는 뭐가 억울하다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떡돌이는 뒤돌아 승언이를 확인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날 모른 척하란 뜻이 아니다.”
그러고는 내 손에 묻은 과즙을 직접 닦아주었다.
그걸 본 승언이 ‘당장 폐하의 소매에서 손을 치우라’는 눈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지만, 이번엔 내가 무시했다.
아무래도 승언이는 떡돌이 말을 잘 못 전달하는 것 같으니까. 승언이는 맹추야.
하지만 정말 이상하네.
“덕춘이 도령이 왜 여기 있어요?”
“그러는 넌 왜 여기 있는 게냐?”
“책임자 태감 몇 명이 나랑 언니를 괴롭혀서요. 좀 숨을 돌리고 싶어 나왔어요.”
떡돌이는 내 손을 닦아주면서 개원이 쪽을 힐긋거리다가 인상을 구겼다.
“뭐라? 누가 누굴 괴롭혀?”
* * *
떡돌이는 개원이까지 챙겨서 행궁으로 같이 가더니, 자신은 태감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어디로 홀로 가버렸다.
가기 전에 개원이에게 “기다리라.” 이 한 마디 명령만을 남기고.
덕택에 나는 방 안에 홀로 돌아와서 원웅과 부성에게 가출에 대한 잔소리를 한 움큼 먹어야 했다.
“산책 나가신다더니, 이게 산책이에요 마마?”
“다른 후궁이나 황후가 무슨 짓을 했을지 알고 혼자 돌아다니시는 거예요, 마마. 위험하다고요.”
“정 나가고 싶으시거든 귀자라도 데리고 가시면 되잖아요.”
“마마께서 폐하랑 돌아오시는 걸 보고 저희가 얼마나 기겁했는지 아세요?”
“마마는 스스로를 위험하게 하시고, 저희를 쓸모없는 아랫것들로 만든 거예요.”
내가 윗사람이다 보니 잔소리의 수위가 높진 않았지만, 그래도 비난하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고 있자면 기분이 좋지 않아지는 법이다.
나는 처음엔 멍하게 의자에 앉아 두 궁녀의 걱정 섞인 잔소리를 소화하려 노력했지만, 나중엔 견디지 못하고 명령을 내리고야 말았다.
“그만. 이제 충분해. 그만해.”
원웅과 부성은 아직도 할 말이 한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둘이 입을 다물자마자 이번에는 귀자가 들어오더니 “마마, 마마!” 하고 할 말이 가득한 얼굴로 부르는 게 아닌가.
이에 원웅과 부성은 얼굴이 환해지고 나는 골치가 아파 이마를 짚었다.
“너는 3절까지만 하도록 해. 4절은 듣지 않아.”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잔소리하려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마마.”
하지만 귀자는 잔소리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럼 들어봐야지. 내가 이마에서 손을 내리고서 말해보라 손짓하자, 귀자는 얼굴에 싱글벙글한 미소를 띠고서 신이 나서 털어놓았다.
“마마, 폐하께서 꾀병을 부렸던 태감들과 총태감을 부른 다음, 마마를 괴롭힌 일을 두고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원웅과 부성은 귀자가 내게 잔소리하지 않자 부루퉁해졌다가, 태감들이 혼이 났단 이야기에 기뻐서 얼른 달려와 귀자를 더욱 재촉했다.
“그리고? 또?”
“벌은? 화내고 끝이셔?”
“아아, 다 얘기할 겁니다. 다 얘기할 거예요.”
귀자는 천천히 얘기하겠다고 거들먹거리고는, 날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선 마마가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게 된 건 전부 다 태감들이 마마를 속상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마마는 행궁에 오기 전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다고 탄식하셨죠.”
좋아하던 원웅과 부성이 큼큼 헛기침을 한다. 내가 본궁에 있을 때도 두어 번 탈출했던 게 떠올랐나 봐.
하지만 무슨 상관이야? 그 태감들은 그 일을 알 리 없는데!
“그 태감들은 그럼 어떻게 됐어?”
“꾀병 부린 태감들은 마마께서 여기 머무르시는 동안 계속 녹봉이 삭감될 거고, 총책임자 태감은 강등당해서 다른 행궁에 가게 될 거랍니다, 마마.”
“총책임자 태감이 벌을 제일 크게 받는 거 같은데?”
“예. 여러 명이 동시에 꾀병을 부리는 건 총책임자 태감이 통솔력이 부족해 벌어진 일이라 판단하셨거든요.”
귀자가 말을 끝내자 원웅은 안도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마마. 그자들도 뒷배가 있을 테니, 나중에 그자들을 조종한 사람이 이쪽으로 오면 또 꿍꿍이를 벌일까 걱정했거든요.”
“그런가?”
“네. 하지만 폐하께 대놓고 혼이 났으니 이 일로 더 뭐라 나서진 못할 거예요.”
“하지만 마마가 보고 싶어서 바로 따라오시다니…….”
“폐하는 마마가 정말로 좋으신가 봐요.”
원웅과 부성이 각자의 손을 모으고서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다가,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소주? 어디 가시게요?”
떡돌이한테. 고맙다고 말해야지.
* * *
“아, 폐하께선 아직 역정 내시는 중입니다, 마마.”
떡돌이가 날 위해 꾀병 태감들을 조치해 주었다 들어서 고맙다 하러 왔는데.
분명 귀자가 대충 일의 전후를 다 얘기해 준 것 같은데, 와보니 떡돌이는 건물 안에 있고 승언이는 밖에 서 있다가 알려주었다.
떡돌이가 아직 화내는 중이라고.
아니, 여기서 더 화낼 게 남았다고?
“원래 이렇게 화를 오래 내?”
황당해서 묻자 승언이는 잠시 미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평소에는 이 정도는 아니라고 우물거리다 물었다.
“기다리실 겁니까?”
“그러지 뭐.”
“예.”
어쨌든 왔다 갔다 하는 게 더 오래 걸릴 것 같은데다, 마침 승언이에게도 할 말이 있었기에 나는 여기서 떡돌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너한테 할 말도 있었거든.”
승언이는 햇볕이 드는 쪽이 좋은지, 그늘이 좋은지 내가 물어보다가 “예?” 하고 되물었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시다고요?”
“아까. 나한테 네가 말을 잘못 전달했잖아.”
승언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내 말을 순순히 기다렸고, 나는 말을 돌리는 대신 그에게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내 생각에 넌 좀 맹추 같아.”
승언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발끈해 되물었다.
“그게 제게 하실 말씀입니까?”
“응.”
“아니, 무슨 그런 말을 전하시기까지 합니까? 혼자 생각하시지.”
“하지만 말해주지 않으면 넌 내 마음을 모를 거잖아.”
“몰라도 됩니다! 그리고 말씀은 바로 하셔야죠. 제가 언제 폐하를 아예 모른 척하시라 했습니까? 폐하가 폐하란 걸 모른 척하시라고 한 거죠!”
“그래도 맹추야.”
“그럼 제가 맹추면 마마는 뭔데요! 마마는 뭔데요!”
“난 똑똑하니까 똘추지.”
“!”
잠시 충격받은 표정을 짓던 승언은 곧 표정이 미묘해지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면서 웅얼거렸다.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 순간.
“애 갖고 놀지 마라, 승언아.”
닫힌 문 안쪽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떡돌이 목소리. 나오지도 않았으면서 우리 얘기는 귀 기울여 듣고 있었던 듯했다.
아니, 그보다 갖고 놀다니? 무슨 소린가 싶어 승언이를 쳐다보자, 그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아!” 하고 어딜 보며 탄식했다.
뭘 보나 싶어 같은 방향을 보니, 개원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개원이는 내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승언이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공공. 어느 정도 더 기다려야 할지요? 마부를 근처에 대기시켜 두어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면 돌려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개원인 승언이가 내신 줄 알았나 봐.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지만, 승언이는 화가 났는지 평소보다 표정이 더욱 굳어서 딱딱하게 말했다.
“그건 폐하의 뜻입니다.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전 공공이 아닙니다.”
개원이는 아차 싶은지 바로 사과했지만 이미 승언이는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때. 이번에도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림인을 안으로 데려와라, 승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