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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37화 (137/283)

##  137화. 설마 저 여자……!

“어떻게요?”

부성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응, 말해줄 수 없는 내용이야.

* * *

탁자에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두 태감은 아주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그중 키가 큰 쪽은 낄낄 웃으면서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 귀한 천빈 마마도 폐하 옆에서 떨어지니 별거 없구먼?”

그들은 오늘 자기들이 합심해 천빈을 물 먹인 일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는데, 승리에 술기운까지 더해지자 오늘의 성과가 재미나게 여겨졌던 것이다.

“원래 멍청하기로 소문난 여자 아닌가.”

“듣기론 얼굴도 영 맹하게 생겼다더니만. 폐하는 취향도 참.”

“죄다 미인들뿐이니 수수한 사람한테 눈길이 가는 거지. 화려한 꽃들 사이에서는 들풀이 보이고, 백조들 사이에서는 참새가 보이고.”

태감들은 천빈을 헐뜯으면서 점점 더 신이 나고 흥이 올랐다.

여기는 본궁도 아니다 보니 벽 안에 숨은 귀도 없었고, 그들을 말릴 사람도 없었다.

총책임자인 총태감이 그들의 편이니 더욱.

“어쨌든 다들 약조한 대로 하는 거네. 천빈이 불러도 절대로 가면 안 돼. 우리끼리 말만 맞추면 천빈은 우리가 꾀병이라 의심해도 어쩔 수가 없어.”

다시 쳐다보며 ‘끄하하하’ 소리 내어 웃은 태감 둘은 잔을 부딪친 다음 술을 한 번에 목구멍에 털어놓고서 또 좋다고 웃어댔다.

그렇게 이각 정도가 지나자 마침내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들의 입도 점점 느려지더니, 점차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삼각이 지났을 땐 한 명은 탁자에 엎어졌고, 다른 한 명은 침상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때. 탁자에서 졸던 태감은 가까스로 잠에서 깨어 눈을 뜨다가, 탁자에 드리워진 까만 그림자를 발견했다.

“음?”

태감은 그림자를 보고서도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술기운이 정신을 가린 탓이었다.

그 순간. 그의 목덜미와 허리춤에 손가락이 뾰족하게 닿아왔다.

“어엉?”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린 그는 여전히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이게 무슨 일인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가위? 가위에 눌린 건가?”

중얼거리고 있자니 이번에는 머리 뒤쪽을 또다시 손가락이 꾹 눌렀다.

그제야 조금 잠기운이 달아나고 놀란 태감은 침상에 엎어진 동료를 부르기 위해 입을 벌렸다.

“!”

그러나 이번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탁자에 엎어진 태감은 당황해서 움직이려 했으나, 몸은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와중에 누군가 등까지 떠밀자 그는 아예 이마를 탁자에 ‘쿵’ 소리가 나게 박게 되었다.

이어서 누군가 목덜미를 잡아당기는가 싶더니, 차가운 무언가가 옷 안쪽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

태감은 놀라서 몸을 비틀려 했으나 소리도 나오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 있자니 ‘따각따각’ 하는 발소리가 그의 뒤쪽에서 침상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태감은 고개를 들려 했으나 여전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멍한 머릿속에 귀신이란 글자가 둥둥 떠다녔다. 아니면 암살자일까?

그러는 사이. 저쪽에서도 뭘 우르르 쏟는 소리가 작게 났다.

하지만 역시 비명은 들리지 않았고, 태감은 차츰 머리가 더 맑아져서 침상에 누운 동료도 자신과 같은 꼴이란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귀신일 리 없었다. 태감은 두려워 덜덜 떨었다. 차라리 가위면 낫지. 암살자라면 이건…….

‘우리를 죽이려는 건가?’

공포에 술기운이 완전히 달아난 그 순간.

그의 뒤에서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닫히는 소리가 났다.

태감은 발발 떨다가 눈동자만 ‘데록’ 굴렸다.

‘간……건가?’

암살자는 아니었나? 그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자마자, 이번에는 두려움에 눌려 잠시 잊었던 냉기가 온몸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시 소름이 돋은 그는 온몸을 발광하듯 뒤틀었으나 여전히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 * *

다음날. 푹 쉬고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자니, 원웅이 다가와서 총태감이 왔다 알려주었다.

“들어오라고 해.”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총태감은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제보다 훨씬 공손한 모습이었다.

그가 왜 저러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왔는가?”

총태감은 두 손을 꼭 붙잡더니 내 눈치를 한 번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온 얼굴 근육을 다 움직여 웃으며 말했다.

“어제 아프다고 한 책임자 태감들 말입니다, 마마.”

“아직 많이 아픈가?”

“예에…….”

그는 말끝을 흐리면서 다시 내 눈치를 보았고, 나는 거리낄 것 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내 미소를 보자 그가 다시 흠칫했지만 상관없다.

그 꾀병 태감들, 당연히 이젠 ‘진짜’로 많이 아프겠지.

내가 어제 열심히 돌면서 얼음을 옷 안 가득 다 부어줬는데 안 아플 리가.

“이런. 몸이 약한가 보군. 나으면 내가 한 번 빡세게 굴려줘야겠어.”

“예?”

“체력이 약해서 그런 것 같아. 그렇지, 원웅아?”

“그럼요, 마마.”

무슨 일인지 모르면서도 원웅이 얼른 내 말에 수긍하자, 총태감은 당황해서 쩔쩔맸다.

“그 얘기 하러 왔는가?”

그 모습을 잠시 감상하다가 묻자, 총태감은 그제야 황급히 자기 볼일을 털어놓았다.

“아, 아닙니다. 그게, 아프다던 태감들이 완전히 나으려면 시일이 걸릴 듯해서요. 업무를 대신 수행할 태감들을 뽑아 보내겠습니다, 마마. 이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총태감이 나가자 원웅은 입을 비쭉였다.

“어제 진작 그러지.”

내가 돌아다니면서 꾀병 태감들을 얼음에 절여 준 걸 모르다 보니, 원웅이 보기엔 총태감이 날 대놓고 기만하는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총태감은 아마 상황을 보다가 내가 기가 죽는 것 같으면, 태감들이 다 회복됐다고 말을 바꿨을 거야.

그런 다음, 내가 제대로 그들을 이끌지 못해서 제대로 관리가 안 될 뻔했지만 자기가 나서서 일을 잘 처리했다고 둘러대려 했겠지.

하지만 이렇게 됐으니 겁 좀 먹었을걸?

* * *

꾀병 부린 태감들은 다들 열이 올라서 얼굴이 벌건 채 모여서 달달 떨고 있었다.

총태감은 안으로 들어오다가 그 꼴 보고서 혀를 찼다.

“아주 잘들 하는구먼. 아주 잘들 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공공.”

“침입자가 와서 우리를 얼음에 파묻고 갔습니다. 아주 악질적이에요.”

“악질적? 침입자가 안 죽이고 간 걸 고맙게 여기게.”

태감들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으나, 총태감은 그들이 그저 한심스럽게 보일 뿐이라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상석으로 가 털썩 앉았다.

“어쨌건 천빈, 그 멍청한 후궁 곁에 누군가 실력 있는 무인이 붙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천빈이 군왕 암살 사건 후 습격을 받아서 폐하가 실력 있는 사람을 붙였단 말을 얼핏 들었습니다.”

“연비 짓은 아닐까요?”

“아닐 거다. 연비는 지금 몸이 아파 아예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오고 있으니.”

“아픈 건 확실합니까?”

“모르지. 하지만 연비 쪽 사람들은 아예 이동이 없어. 연비일 수가 없다.”

가장 심하게 열이 나는 태감은 따뜻한 주머니를 꽉 끌어안으면서 코를 훌쩍이다가 이를 갈았다.

“여하간 이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몇 달 후면 마마들도 이리로 오시니 반드시 얘기할 거예요. 여러분 모두 같이 입을 모아주셔야 합니다.”

* * *

연비는 본인의 말처럼 딱 일주일이 지나자 다시 돌아왔다.

오가는 걸 본 건 아니지만, 일주일째 되는 날에 그녀는 몸이 좀 나았다면서 날 불렀는데, 뭘 어떻게 한 건지 진짜 아픈 사람처럼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하지만 진짜 앓은 건 아닌지, 그녀는 곧장 일어서더니 “일주일간 어떻게 궁을 관리했는지 보여주련.”이라 말하고서 앞장서서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에게 태감들에게 얼음을 부어 가면서 관리한 궁 모습을 여기저기 보여주고 설명도 해주었다.

“싹 다 청소하게 한 다음에 위험해 보이는 부분은 보수공사를 했어. 수로가 깨끗한지도 확인했고…… 어, 하여튼 언니가 하란 건 다 했어. 일 번부터 육 번까지.”

내 설명을 들으면서 우아하게 여기저기 살피고 다닌 연비는 둘러볼 곳을 다 불러보고 나자 꽤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흠을 잡지 않고서 날 따라다니다가, 적당히 다 보았다 싶자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간 다음 나를 제외한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서 물었다.

“태감들이 말은 잘 듣던?”

“듣는 사람도 있고 안 듣는 사람도 있고. 일단 총태감부터가 영 그래.”

“그래도 잘 해냈구나.”

말을 마친 연비가 갑자기 손을 뻗어서 내 머리를 가볍게 문지르는 바람에 나는 조금 놀랐다.

“잘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이 기분이…….

“왜 그러니?”

“아니. 순간적으로 사랑받는 개가 된 기분이 들었어, 언니.”

그래. 딱 이런 마음이 들었어.

연비는 내 말이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웃음을 터트렸지만 진담이다. 정말 느낌이 그랬어.

동시에 깨달음이 들었다. 혹시 영빈이 연비를 졸졸 따르는 건 이 느낌이 좋아서일까?

“언니, 영빈한테도 이렇게 해?”

“가끔.”

그런가 보다. 다음에 영빈을 보면 나도 이거 해줘야겠네.

그러면 영빈도 날 향한 적의를 좀 누르지 않을까? 영빈한텐 나도 언니니까?

“어쨌든. 약속한 게 있으니 이제 놀면서 지내도 좋아. 하지만 후궁에서 힘을 가지고 품계가 올라가려면 일은 배워두어야 한단다. 하루 한 시진은 날 따라다니도록 하련.”

* * *

연비가 갑자기 말을 바꿔서 당황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양심이 있긴 한지 당장 일하라 하진 않았다.

그녀는 내게도 사흘은 일을 안 배우고 놀 시간을 주었다.

자기는 일주일 놀고 와서 내게는 사흘 놀라 하는 게 좀 아니꼽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무거운 책임감을 벗게 되자마자, 산책을 간단 핑계를 대고서 월담해 행궁부터 빠져나왔다.

물론 옷은 그전에 가장 수수한 차림으로 입었고. 수수하다고 해도 후궁 복장이라 화려하지만.

보자…… 이제 어쩌지? 내가 가야 하는 건 41천도인데.

여기서 41천도에 다녀오려면 하루 가지고는 안 되잖아?

하루에 한 시진 연비를 따라다니는 거야 애원해서 안 간다 쳐도.

과연 내가 며칠간 궁전을 비우는 걸 원웅, 부성, 귀자가 봐줄까?

셋 다 내가 활만 잘 쏜다 생각하고 있으니, 며칠간 혼자서 자리를 비운다고 하면 펄쩍 뛸 텐데.

고민하면서도 나는 일단 근처의 객잔에 빈방을 잡은 다음, 밖으로 나와 변복할 옷을 몇 벌 사서 그 방 안에 잘 넣어두었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준비는 해 둘 생각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또 뭐가 필요하지?”

음…… 일단 다녀보자. 보고 다니다 보면 생각나는 게 있겠지.

* * *

개원은 연비가 몸이 아파 천빈이 바빠졌단 이야기에, 덩달아 일주일간 무공을 가르치러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연비가 다 나았단 이야기를 듣자, 그는 이제 슬슬 무공 수업을 다시 해야겠단 이야기를 하러 행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걸어가다 보니 스쳐 지나간 사람 중에 낯익은 사람이 있었단 느낌이 들었다.

‘천빈?’

그 느낌을 따라 고개를 돌린 개원은 곧 예상치 못한 인물을 발견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개원은 황급히 사람들 사이로 몸을 감추고서 그녀를 좀 더 가까이 따라갔다.

후궁들의 화려한 복장은 아니지만 귀한 집 여식처럼 차려입고 팔랑팔랑 걸어가는 저 모습.

가까이서 보니 확신이 들었다. 분명 천빈이었다.

‘왜 이런 곳에?’

개원은 당황했다. 후궁이 이런 곳을 혼자 다녀도 되나?

잠행이라거나 그런 말을 듣긴 했지만 혼자 다니면 안 되지 않나?

개원은 숨어서 그녀를 뒤따르는 호위가 있을 거라 여기고 여기저기 살폈다.

하지만 분명 호위는 한 사람도 없었다, 천빈은 정말로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다.

‘몰래 나왔구나.’

사람들이 후궁이 혼자 돌아다니게 둘 리 없단 걸 깨달은 개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생긴 건 눈썹이 처져서 순해 보이는데, 의외로 제멋대로인 후궁이구나 싶어서.

“후…….”

한숨을 내쉬면서도 개원은 결국 먼발치서 천빈을 뒤따르며 지켜주기로 했다.

그냥 지나쳐 가자니 그녀의 너무 화려한 복색이 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따라다닌 지 고작 일각이 지났을 뿐인데, 술에 잔뜩 취한 취객 하나가 천빈의 옷차림을 보더니, 배알이 뒤틀는지 다가와서 시비를 걸었다.

홀로 있고 싶어 하는 천빈을 배려해, 개원은 직접 나서는 대신 취객을 처리하기 위해 돌을 주웠다.

이걸 취객의 다리나 팔쯤에 던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아 무서워!”

바락 외친 천빈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취객의 얼굴을 딱 때렸다.

“!”

그로도 모자란 지 천빈은 “무서워! 무서워!” 하고 두 번 더 외쳤는데, 한 번 무섭다고 할 때마다 손이 몸통과 다리를 빠르게 때리고 있었다.

딱 세 번 상대를 내리친 천빈이 손을 거두자 취객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른 채 시선이 몽롱해져서 비틀거렸다.

개원은 눈을 비볐다.

그러다 쿵 소리를 내며 취객이 엎어지자, 천빈은 야무지게 바락 외쳤다.

“술주정뱅이, 이러지 마시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걸어가는데, 사람들은 너무나 빠르게 지나간 일에 천빈이 뭘 한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다들 그냥 취객이 혼자 시비를 걸다가 제풀에 넘어진 줄 알고,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대낮부터 술에 절었다면서 짜증이나 냈다.

개원은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보다가 정색하고서 천빈의 뒤를 따라갔다.

‘방금 그 손놀림. 무공을 모르는 자가 아니었다. 천년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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