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행궁 도착
“어떻게 할까요, 마마? 피곤하시다고 물릴까요?”
당연하지! 돌아간 다음 당과나 만들어서 보내라고 해.
솔직한 천년비가 내 위장 어딘가에서 외쳐댔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만나볼게. 뭐 볼일이 있으니 왔겠지.”
“예.”
“당분간 훈련을 못 한다고 과제를 내줄지도 모르고.”
“아아! 그렇군요!”
귀자는 갑자기 왜 저렇게 놀란 척이야?
“들어오라고 해.”
귀자가 나간 사이, 나는 개원이를 보고 험악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입술을 빠르게 움직였다. 근육을 풀어야지.
그러고 있자니 장막 너머로 그림자가 보였다가 곧 개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빈 마마를 뵙습니다.”
개원은 내 품계가 올라갔단 소식도 들었는지, 마마라 부르면서 인사를 올렸다.
나도 권위적인 마마인 척 그에게 일어나라고 손을 휘휘 젓고서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따라왔지? 본궁은 좀 바쁜데.”
말을 하고 나니 나는 아직 본궁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단 게 떠올랐지만, 괜찮다.
개원이는 무림인이니까 이런 거 잘 모를 거야. 암!
“마마께서 42천도에 있는 행궁에 가신단 이야길 들었습니다.”
“그거 들었다고 알리러 왔나?”
“신도 41천도에 볼일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마마께 무공을 가르치라 명하시기도 했으니, 함께 이동해 수련을 돕겠습니다.”
뭐야. 인사하러 온 게 아니라 같이 가겠다고 온 거야?
그가 41천도에 볼일이 있단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저건 핑계고 그냥 천소여 곁에 있고 싶어 온 거 아냐?
수상한데?
“마마? 제게 할 말이 있으신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분석하듯 바라보자 개원이 찔리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좀 더 찔리라고 똘똘이 연비 같은 표정을 따라 하자, 그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나는 표정을 풀고 그냥 허락해주었다.
“그러도록 해라. 날 못 보면 죽겠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 정도는…….”
개원은 입을 우물거리다가 쑥스러운지 입을 닫고 머리를 숙였다.
나는 우아한 개시시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 그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개원이 나가자마자, 괜히 열이 받아서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씩씩거렸다.
아니, 개원이 이 새낀 대체 천소여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어디가 좋길래 저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행궁에 쫓아오려는 거지?
생각해보니 그래. 사람들은 ‘천년비’는 싫어했는데 ‘천소여’는 좋아해.
그 사람들이 ‘진짜 천소여’를 좋아하는 거라면 이상할 것 없다. 그냥 내 성격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하지만 ‘진짜 천소여’와 안 친했던 사람들이 ‘천소여 몸에 들어온 천년비’와는 잘 지내는 이 괴리가 너무 이상하단 말이야.
“마마?”
그렇게 팔짱을 끼고서 콧김을 마구 내뿜고 있으려니 원웅이 보기에 이상한가 보다.
이부자리를 정돈해주러 온 원웅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개 대인이 마마를 화나게 한 건가요?”
“사람들이 나를 왜들 이렇게 좋아하나 모르겠어.”
“예?”
“그게 좀 화가 나네.”
“예?”
“대체 내 매력이 뭐지? 내 어디가 그렇게들 좋아?”
“…….”
“원웅아. 내 매력이 뭐 같아?”
이런 건 혼자 고민해도 알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그냥 원웅에게 물어보았다.
원웅은 입을 벌리고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끔뻑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점 같은데요. 자신감…….”
* * *
나는 개원이 가는 도중에도 무공을 알려주겠다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개원은 안 그래도 여행길은 피곤하기 때문에, 나 같은 초심자는 훈련과 여행을 병행할 수 없다고 했다.
아무래도 개원이 자식의 눈에 천소여는 한없이 가녀리고 야리야리한 모양이지.
어쨌든 그 덕에 훈련 없이 쭉쭉 행궁으로 이동했고, 예상한 날짜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는 41천도를 지나가게 되었다.
이제 며칠 후면 무사히 행궁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
지루해서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으려니 뜻밖에도 아는 얼굴이 지나갔다.
하나는 타천천이고, 다른 하나는 그…… 누구야. 태안루주. 그 사람이었다.
정보호와 사자친왕이 둘이서 차 마셨던 그 다루의 주인.
나더러 ‘천년비냐’고 물었던 사람. 타천천이랑 아는 사인가?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나는 재차 확인하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느라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니?”
맞은편에 앉은 연비만 이렇게 물을 뿐.
“난 기억도 없는데 아는 사람이 있겠어? 그냥 잘생긴 사람이 지나가길래 본 거야.”
나는 얼른 둘러대고서 다시 엉덩이를 마차에 붙였다.
하지만 타천천을 보고 나니 엉덩이를 얌전히 두기가 어려웠다.
당장 그에게 달려간 다음 내 몸 안에 지금 누가 있는 건지, 진짜 천소여는 어디에 있는 건지, 나는 계속 이 몸에 있는 건지 등등을 묻고 싶어서.
하지만 내가 마차 밖으로 뛰어내리면 궁인들이 날 이상하게 보겠지. 똘똘한 연비는 더욱 그럴 테고.
‘어쩔 수 없지.’
나중에 행궁에 도착한 다음 41천도에 다녀올 방법을 알아낼 수밖에.
“언니. 행궁에 가면 일은 언니가 다 할 거지?”
“……너는 뭘 할 건데?”
“나는 놀고 싶어.”
“참 당당하게도 말하는구나.”
“안 돼?”
* * *
놀고 싶단 말에 연비가 대답을 피해서 좀 수상쩍다 싶더라니.
행궁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난 뒤, 연비가 불러 가보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노는 건 내가 해야겠다, 동생아.”
뭐?
내가 당황해 쳐다보자, 연비는 빙그레 웃으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뭘 좀 준비해야 해서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워야 한단다. 그동안 네가 일하고 있으련?”
내가 충격을 받아 쳐다보자 연비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자기 상궁에게 눈짓을 했다.
상궁은 들고 있던 작은 두루마리를 내게 건넸다. 받아서 펼쳐보니 할 일 목록이 적혀 있었다.
“진짜 내가 일하는 거야?”
나 아는 거 하나도 없는데? 내가 당황해서 물었지만, 연비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설명했다.
“나는 몸이 안 좋다 하고 자리를 비울 셈이란다. 그러니 네가 그 기간 동안 행궁을 잘 살피고 있으련?”
“난 이런 거 잘 몰라, 언니.”
“그래서 적어 놨잖니.”
이 준비성 철저한 사람이 있나.
자기 놀려고 이런 것까지 준비했단 말이야?
기가 막히기도 하고, 선수를 뺏긴 기분도 들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으려니, 연비는 그럴 줄 알았단 듯 웃고서 덧붙였다.
“네가 일주일간 행궁을 잘 살펴준다면, 남은 기간은 자유롭게 지내도 좋아.”
“일주일?”
“그래. 일주일.”
행궁에서 지내야 하는 게 한 달에서 두 달 사이니까…… 뭐. 나한테 아주 나쁜 조건은 아닌가.
일주일만 일하면 나머지는 놀아도 된단 거니까. 그 정도면 41천도에 가서 타천천을 찾아볼 수도 있겠네.
“알았어.”
결국 나는 연비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연비는 그럴 줄 알았단 듯 이제 나가보라 손짓했다.
나는 일어섰다.
하지만 나가려다 보니 아까 ‘노는 건 내가 한다. 너는 일해’란 연비의 말에 충격을 받아 잠시 묻지 못한 게 떠올랐다.
“근데 무슨 준비를 한단 거야?”
“낚시.”
“언니 낚시 좋아해?”
연비는 대답 대신 입꼬리만 올려 조용히 미소했다.
* * *
내가 방 안에 돌아오자마자 연비는 빠르게도 꾀병을 부렸다.
“마마. 연비 마마께서 긴 여행으로 몸이 좋지 않으시답니다.”
어찌나 빠르던지, 내가 연비가 준 두루마리를 다 읽기도 전에 귀자가 들어와 전할 정도였다.
“알겠어.”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하고서 연비가 준 종이를 마저 읽은 다음, 방 정리를 빠르게 끝내고 서 있는 원웅에게 지시했다.
“원웅아.”
“네, 마마.”
“언니가 몸이 안 좋으니 내가 행궁 일일 당분간 맡아서 해야 할 것 같거든? 여기 책임자들을 불러와 줘. 언니가 해야 할 일 목록도 줬어.”
내가 힘없이 지시하자, 원웅은 알겠다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나는 원웅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연비가 준 목록을 다시 돌돌 말아 두루마리로 만들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가 지났을까. 원웅이 다 불러 왔다고 해서 나는 두루마리를 놓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연비는 일 년간 비어 있었던 행궁을 청결하게 하는 걸 일 번 지시 사항으로 두었지.
그러니 하인들을 불러 대청소를 시키려 했는데…….
뭐야. 하나. 둘. 셋…… 여덟. 왜 모인 사람이 여덟 명뿐이야?
“이게 단가?”
나는 어리둥절해서 혼자 앞에 똑 떨어져 나와 있는 낯선 태감에게 물었다.
내 질문에 그 태감은 공손히 손을 모으고서 인사를 올린 다음 대답했다.
“저는 이곳의 총태감입니다, 천빈 마마. 그리고 사람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마마.”
그렇지? 안 그래도 이상했어. 행궁에 본궁보다 더 작긴 하지만, 그래도 책임자가 여덟 명뿐이진 않을 거 같아서.
“한데 왜 여덟 명뿐인가?”
어쨌든 책임자가 하인이 여덟 명만 있지 않다기에 나는 다른 이들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총태감은 무척이나 죄스럽단 표정을 짓더니 이런 핑계를 댔다.
“천빈 마마. 실은 며칠 전 이곳에 독한 감기가 유행처럼 돌아서 몸이 안 좋은 사람이 많답니다. 이 때문에 아픈 사람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쉬이 믿기지 않았다.
“여기 오지도 못할 정도로 아프다고?”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으니까.
“예, 마마.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총태감은 절대로 거짓말 같지 않은 표정을 하고서 내게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래도 여전히 바로 믿기 힘들었다.
“여기 책임자가 모두 몇 명인데?”
“책임자 수는 총 열일곱 명입니다, 마마.”
책임자 열일곱 명 중 여덟 명만 왔다는 건 반도 안 왔단 거잖아? 반 이상이 다 중병에 걸려 시들시들하다고?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니 원웅은 뒤에서 작게 씩씩거리며 내게 슬쩍 알려주었다.
“거짓말 같아요, 마마. 분명 다른 후궁이나 황후한테 언질을 듣고 저러는 거예요.”
“그렇지? 그럼 아프단 사람들을 이참에 다 내보내면 어떨까? 그러면 겁 나서 꾀병을 그만두려나?”
“하지만 마마, 증좌가 없잖아요. 저들이 황후나 다른 마마의 명령을 듣고 저러고 있다면, 나중에 이 일을 트집 잡을 거예요. 게다가 이 상황에 반이나 쫓아내면 폐하가 여기 오실 때까지 일손이 부족할 거예요.”
하지만 원웅은 작은 목소리로 꾸준히 화를 내면서도 이 일을 크게 비화시키려는 걸 막았다.
“많이 아픈가? 내가 직접 가서 보겠네.”
“세상에! 절대로 안 됩니다, 천빈 마마. 귀한 분이 감기에 옮아 아프시면, 저희는 전부 죽은 목숨입니다요!”
결국 더 크게 혼을 낼 수도 없어서, 나는 일단 모인 이들도 전부 다 흩어지게 했다.
“알았네. 아프면 쉬어야지. 가게.”
“사려 깊으십니다, 천빈 마마.”
총태감이 기분 나쁘게 웃고서 가자마자 원웅은 더욱 짜증을 냈고, 나 역시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냥 일주일 같이 놀면 될 텐데, 연비가 나더러 일하고 있으라 한 이유가 있었네. 목록까지 써가면서.
그나마도 내가 나서서 이러니 이 정도지, 아예 둘 다 놀고 있으면 적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보다 어쩐다…… 황후 사람들이니 함부로 자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주일간 저들이 꾀병을 부리게 할 수도 없잖아.
게다가 연비는 내가 일주일 동안 일을 잘 해야 놀게 해준댔는데.
“천빈 마마. 연비 마마께 가서 이 일을 상의드리는 건 어떨까요?”
나도 그렇고 싶어, 부성아. 근데 연비는 벌써 놀러, 아니, 낚시하러 가고 없단 말이야.
“……이렇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