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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35화 (135/283)

##  135화. 언니의 충고

사실 이유 모를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그냥 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입 밖으로 질문을 꺼내는 순간. 정말로 궁금해졌다.

예전에 그는 내게 ‘연모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는 내 사랑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지. 사랑은 받기만 하라고.

그게 뭔 소리인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마음이 그대로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떡돌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괜히 긴장이 되어서 나는 그가 무어라 대답할지 기다렸다. 딱히 원하는 대답이 있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떡돌이는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되물었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건…… 혹시 짐을 연모한단 뜻일까.”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보느라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이 안에 들어올 때는 붉은 석양이 보였는데, 어느새 유리 지붕 너머 하늘은 보라색이 되어 있었다.

“아니. 아직 그건 아닌 거 같아.”

나는 판단을 끝낸 다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떡돌이가 좋지만, 이게 연모인지 생각해보면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사실 이건 떡돌이의 탓은 아니다. 내게 있어 사랑의 기준이 개원이라 그렇다.

내가 개원이를 사랑할 때 느낀 그 마음.

하지만 개원이는 그 사랑을 져버렸고,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감정을 가지지 않을 셈이라.

어쩌면 나는 사랑의 기준을 그때보다 조금 내려야 하는 걸까?

“그렇군.”

떡돌이는 내 말에 실망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고 서운해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태연하게 대답하고서, 뒷짐을 지고서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내 대답도 보류하지.”

“왜?”

“네가 날 연모하지 않는다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니까.”

그런가? 맞는 말 같아. 하지만 괜히 좀 발끈하게 되어서 나는 또박또박 따졌다.

“네가 제한을 걸어버려서 내가 널 좋아만 하는 건지도 몰라. 그런 제한이 없으면 연모했을지도 모르지.”

떡돌이는 넘어가는 대신 코웃음을 쳤다.

“그건 핑계다.”

“아닌데.”

“핑계지. 넌 늘 짐의 말을 안 들으니까.”

“!”

“그런데 연모하지 말란 명령만 따른다고? 이상하잖아.”

하긴. 그건 그래. 순순히 인정하자니 좀 지는 기분이지만. 하지만…….

나는 손을 뻗어서 떡돌이의 양 뺨을 내 손바닥에 가두어 보았다. 손바닥에 닿은 부드러운 피부가 좋다.

떡돌이는 나를 밀어내는 대신 내가 마음껏 자기 얼굴을 만지게 해주었다.

거만한 표정을 보니, 내가 자기 얼굴에 홀렸다고 여기는 눈치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기에 나는 손을 떼는 대신 마음껏 그의 얼굴에 내 손을 붙이고 있었다.

그 상태로 손바닥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그의 숨결을 느끼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나는 떡돌이를…… 좋아해. 그건 확실해.

연얼 군주도 좋고 태후 마마도 좋지만, 떡돌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조금 다른 형태야.

하지만 개원이를 연모할 때만큼 푹 빠진 건 아냐. 그럼 이건 뭘까?

우정은 확실히 아닌데, 사랑이라 하면 부족해 보이는 이 애매한 이름이 뭘까?

* * *

나뭇잎이 거의 다 떨어져 나무는 앙상해졌지만, 이 때문에 산책로를 걸을 때마다 가을 눈이 쌓인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황후는 천천히 그 소리를 음미하며 걷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노골적이다.”

“그러니까. 책봉례하는 자리에서 바로 행궁에 떠나라 하다니.”

“원래도 천빈은 멍청하기로 소문이 났잖아. 그런데 막 빈 자리에 오른 사람에게 행궁 관리를 맡기다니, 너무 악의적이지.”

“실수하길 기다리는 거야.”

“이참에 폐하 곁에서도 떠나게 할 수 있고.”

“황후 마마가 웬만하면 안 이러시는데. 황후 마마도 천빈 마마는 질투가 나시나보다. 그치?”

“하긴. 총애가 웬만해야지.”

그 수군거리는 소리에 황후의 상궁은 화가 나서 그쪽으로 가려 했다.

“되었다.”

황후는 단 한 마디로 말리고서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오나 마마!”

상궁은 자기가 더 화가 났으나 황후는 그들을 피해 가버렸다.

“마마. 어째서 저런 자들을 그냥 두시는 건가요. 궁 안에서 함부로 입을 놀린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합니다!”

상궁이 다시 항의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내가 저들 입단속을 시켜봐야 사람들 생각이 바뀌겠느냐. 오히려 속으론 날 더 비웃을 뿐이다. 저들은 저게 진짜라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실 건가요? 황후 마마는 황후 마마십니다. 아무도 황후 마마를 저런 식으로 말할 순 없어요!”

“입단속을 시켜야 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는 법이다.”

단호하게 말하던 황후는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황제가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황후는 그에게 인사를 올리려 했으나, 한 발 앞서 황제 쪽이 먼저 고개를 까딱해 인사했다.

그 동작만으로 황후는 그가 연금이란 걸 알아보았다.

“…….”

황후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이름 모를 황량한 갈대 같은 식물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그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주 느린 속도로.

그러다 다른 길로 접어들 즈음. 황후는 잠깐 멈춰서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녀만큼 느린 속도로 천천히 누군가 따라오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함께 산책하듯이.

황후는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리고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행궁으로 가는 마차 안. 처음 연비는 혼자서 책만 읽었다.

인사 나눌 때를 제외하고는 아예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아서, ‘집중력이 정말 대단하구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두 시진을 내리 책을 읽더니 자기도 좀 지겨운가. 아니면 마차가 많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멀미가 나나?

어느 산길을 지나갈 즈음. 연비가 책을 내리고서 창문 쪽을 보더니 갑자기 빙그레 웃고서 내게 말을 걸었다.

“온씨 가문은 네가 천빈이 된 일로 바짝 긴장한 눈치더라.”

나는 멍하게 창밖과 연비를 번갈아 구경하다가 “어?” 하고 되물었다. 나와 본격적으로 대화하려고 그러나?

연비는 아예 책을 덮어 옆에 두더니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번 일은 아주 순한 시작일 뿐이니, 앞으로는 행동에 더 신경 쓰련.”

“무슨 행동?”

“가는 길에도 조심하고. 행궁에 도착해서도 조심하고. 행궁을 관리할 때도 조심하고. 이후 폐하와 후궁들이 왔을 때도 조심해야 해.”

너무 의심하고 사는 거 아니냐고 묻고 싶지만 내가 직접 겪기도 했고 온 귀인이 당하는 걸 보기도 했으니…….

“알았어.”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데 내가 딱 대답하는 그 순간.

갑자기 마차 아래쪽에서 ‘꽉’ 하고 오리 오십 마리 정도가 동시에 기합을 내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마차 한쪽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어이쿠.”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해 있자니, 곧 마차 창문을 열고서 담당 관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죄송합니다, 연비 마마. 죄송합니다, 천빈 마마.”

관리는 나와 연비에게 번갈아 인사를 하더니 정말로 죄송하단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마차 바퀴가 빠졌습니다, 마마. 아무래도 아까 산길을 굴러갈 때 어디 큰 돌덩이라도 걸린 모양입니다.”

관리는 나에게도 말을 하지만 눈치는 연비를 보고 있었다.

반면 연비는 눈을 반쯤 감은 채 평소와 같은 우아한 표정.

마차가 기울어져서 몸도 같이 기울어져 있으나 조금도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관리는 재차 연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아무래도 근처 마을에서 바퀴를 구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연비 마마. 그곳에 들러서 바퀴를 얼른 교체한 다음에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말이 제안이지 사실은 통보였다. 하긴. 이 와중에 ‘세 바퀴로라도 계속 가 볼까요?’라고 묻는 게 더 미친 거겠지만.

연비는 눈을 뜨고서 대답했다.

“이런 식이란다, 소여야.”

하지만 관리를 향한 대답이 아니네. 날 향한 대답이다.

게다가 나한테 하는 말인데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뭐가? 뭐가 이런 식인데?

우리가 방금 무슨 말을 나누고 있었지?

아. 공격이 들어올 거란 말을 나누었지. 그럼 연비는 이 마차 바퀴가 부러진 것도 후궁들이 한 공격이라 말하는 건가?

나는 조금 이해가 될 듯 말 듯 했으나 전후사정을 모르는 관리는 여전히 아리송해하며 보고했다.

“그럼 바퀴를 교체하러 가겠습니다, 마마.”

그때. 연비가 손을 올렸다. 조금 들어 올린 것뿐인데, 관리는 창문을 닫으려다 말고서 연비가 뒷말을 잇길 기다렸다.

나도 연비가 뭐 하는 건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연비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관리 옆쪽에 서 있는, 관리 때문에 옆으로 밀려나서 잘 보이지도 않는 상궁을 보며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상궁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관리에게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

“여분의 바퀴를 가져왔으니 그걸로 교체하고 가면 될 겁니다.”

순간 관리의 표정이 굳었다. 이럴 줄 몰랐단 듯이.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리고서 그러면 되겠다고 물러났다.

연비의 말이 맞았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마차 바퀴가 빠진 건 고의였다.

와…… 연비는 마차 바퀴 빠질 것까지 다 계산하고 움직이나?

나는 감탄해서 그녀를 보다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언니 머리 굴리는 솜씨가 진짜 대단해. 꼭 제갈세가 새, 사람들 같아.”

그러나 연비는 자신의 예측이 맞았는데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이렇게 말했다.

“방어만 하면 이를 갈고 더 덤벼들지. 너도 누가 한 대 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똑같이 한 대 때려주도록 하련.”

“한 대만?”

“두 대 때리면 역효과가 난단다. 하지만 한 대 때리면 조심하게 되지.”

“무슨 소리야?”

내가 의아해서 묻자 그제야 연비의 입꼬리가 미소가 올라왔다.

“당분간은 아무 일도 없을 거란 소리.”

* * *

“마차를 웅호촌으로 보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황후 마마.”

저녁 무렵. 황후는 식사를 하다가 급히 올라온 부하에게 보고를 받았다.

황후의 표정은 그래도 변화가 없었으나 입맛은 확실하게 사라졌는지, 그녀는 수저와 그릇을 모두 다 내려놓고서 입가를 수건으로 닦았다.

“거기에 들어간 준비, 인력 다 헛수고가 됐단 소리군.”

황후가 감정의 고조가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부하는 허리를 더 깊게 숙이고서 물었다.

“다른 곳으로 장소를 바꿔서 시도할까요?”

거기에 황후가 대답하기 전. 황후의 장태감이 급히 들어오더니 곁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황후 마마. 마차 사고를 조사해보니 바퀴를 일부러 떼어 낸 흔적이 있다며, 책임자를 문책해달란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벌써?”

“뿐만이 아닙니다. 마차 상태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사람이요. 황후 마마께서 내무부에 심어놓은 사람 이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던 황후가 드디어 미간을 찡그렸다.

“일부러 담당자를 다른 사람으로 해두지 않았나?”

장태감은 울상을 저었다.

“저도 사정을 알아내려 했지만 이 일로 이목이 집중되어…….”

황후는 입가를 닦은 손수건을 내려놓고서 중얼거렸다.

“연비 짓이로군.”

* * *

연비의 준비성 덕에 일정은 계획한 그대로 흘러갔고, 우리는 미리 일러둔 대로 한 관부에 머무르게 되었다.

관부에서는 나와 연비가 머물 방을 일부러 양 옆으로 잡아주어서 언제든 자매끼리 어울릴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부분은 별로 쓸모 있는 배려는 아니지만, 다른 부분은 만족스럽다.

특히 관부에서 지내는 것인지라 씻을 물이 충분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느긋하게 씻은 다음 머리카락과 몸의 물기를 다 닦아 내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내가 침상에 앉아 머리카락을 털고 있으려니, 귀자가 찾아와서 뜻밖의 말을 전해주었다.

“마마. 마마의 무공 스승이 마마를 뵙고 싶어 합니다.”

개원? 개원이 여기에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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