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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34화 (134/283)

##  134화. 아직도 그래?

나는 날짜를 빠르게 계산한 다음 조심스럽게 황후에게 그녀의 오류를 짚어 주었다.

“지금은 가을인데요, 황후 마마.”

하지만 황후는 뭘 잘못 말한 게 아니었다.

“가을이니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왜?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눈만 끔뻑거렸다.

행궁이 어떤 곳이길래 몇 개월 전부터 준비해야 한단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일주일 정도 열심히 준비하면 안 되는 건가?

내가 얼떨떨해하는 티가 났는지 떡돌이도 나서서 슬쩍 내 편을 들어주었다

“황후. 천빈은 경험이 없어 그런 걸 못 한다. 경험이 있는 후궁에게 시키는 게 나을 텐데.”

의외로 황후는 바로 수긍했다.

“그렇군요. 폐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안심했고, 떡돌이도 고개를 끄덕이고서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 일은 연비에게 맡기고, 천빈은 경험을 쌓을 겸 함께 가는 걸로 하지요.”

황후의 다음 말에 차를 안 마시고 도로 내려놨지만.

떡돌이가 황당해하는 눈으로 보았으나, 황후는 모른 척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잘됐다는 투로 말했다.

“연비와 천빈은 자매이니, 여행하는 기분도 나고 좋겠지요. 오랜만에 둘이서 좋은 시간을 보내면 즐거울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을 전혀 믿지 않는지 떡돌이는 찻잔을 손에 든 채 황후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나 역시 황후의 태연하고 상냥한 미소를 보면서, 그녀가 좋은 뜻으로 저러는 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럴 수밖에. 평소 황후는 저렇게 안 웃으니까. 무뚝뚝한 표정이 평소 표정인걸?

* * *

책봉례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가마를 타고 이동하면서 원웅에게 황후가 왜 내게 뜬금없이 그런 일을 시킨 건지, 의도를 해석해보라 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연얼 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빈!”

돌아보자, 연얼 군주가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손짓하자 태감들은 가마를 내려주었고, 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연얼 군주 곁으로 다가갔다.

연얼 군주가 손짓하자 우리를 따라오던 태감과 궁녀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모두 물러나주었다.

“무슨 일이에요?”

둘만 가까이 있게 되자, 연얼 군주는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내게 건네며 설명했다.

“선물이에요.”

아, 이거!

“안 그래도 언제 주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분명 들고 오는 거 봤는데 안 주길래 내 거 아닌가…… 좀 실망했지. 내 거 맞았구나!

나는 신이 나서 그녀가 준 상자를 받고서 히히 웃었다.

왜 굳이 여기 와서 주는지는 모르겠으나, 선물을 받아서 아주 기뻤다.

그런데 히죽거리면서 선물 포장을 뜯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자니, 평소와는 조금 다른 연얼 군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전하?”

고개를 들자 슬픈 표정의 그녀가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나는 걱정이 되어서 선물 든 손을 내리고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답하는 대신 연얼 군주는 되레 자기가 질문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늘 밝은 연얼 군주가 무슨 일일까. 연얼 군주가 저런 표정을 하는 건 자기 오라비가 죽었을 때뿐이었는데…….

“응.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자 연얼 군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천빈은…… 날 좋아해요?”

저걸 왜 묻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대답을 주었는데도 그녀는 더욱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요?”

그걸 보자 불안한 기분이 덩달아 전염되어서 나는 그녀의 표정을 더 세세하게 살폈다.

좀 걱정된다. 혹시…… 연얼 군주도 내가 천년비인 걸 알았나?

내가 죽인 적들 중에 연얼 군주의 친구가 있던 걸까? 괜히 불안해졌다.

물론 내가 죽인 자들은 모두 날 죽이려던 자들뿐이지만, 어디 사람이 그런 거 생각하는 존재던가.

“혹시…… 천빈의 원수가 내 연인이라면요.”

“아닌데요?”

“아니, 그냥 그렇게 가정해봐요.”

아아. 다행이야. 내가 불안해하는 그런 얘긴 아닌가 봐.

하지만 연얼 군주의 가정은 잘 상상이 안 간다. 내 원수는 개원인데, 개원이 연인은 연얼 군주가 아니니까.

“네.”

그래도 일단 대답을 하자, 연얼 군주가 더욱 조심스럽게 물었다.

“천빈은 날 위해 원한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그야 어떤 원한인지에 따라 다르겠지.

그런데 별생각 없이 대답하려다 보니, 연얼 군주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마치 내 대답에 자기의 미래라도 건 모습.

나는 그 표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내가 하려는 대답과 그녀가 듣고자 하는 대답의 무게가 너무 다를 거란 걸 깨닫고 대답 대신 되물었다.

“전하. 혹시 어떤 일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걸 내 입을 빌려서 하고 싶은 거예요?”

“!”

“그런 거라면 대답하지 않을래요. 전하는 내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내 대답을 전하가 따라오는 건, 전하 선택이 아니잖아요.”

연얼 군주는 좀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보았는데, 어느 지점에서 충격을 받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와 더 대화를 하고 싶은 상태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생각에 정리가 필요해 보였으니까.

그녀의 눈치를 재차 살피다가 나는 “이만 가볼게요, 전하.” 하고 작게 인사를 한 다음 얼른 물러나 가마에 탔다.

귀자가 태감들에게 가라고 손짓하자, 태감들은 가마를 도로 들어 올렸고 천천히 흔들림이 없도록 걸어갔다.

나는 가마에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지만, 연얼 군주는 여전히 멍하게 서서 담벼락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가, 오월궁을 지나갈 즈음 나는 군주가 준 선물 포장을 끌러 보았다.

안에 있는 건 한 쌍의 원앙이었다. 꼭 붙은 원앙. 그리고 사이에 누운 새끼 원앙 하나.

군주가 준 선물답게 여기저기 보석을 박아서 참 예쁜 조각인데…….

“와. 정말 예뻐요, 소주. 아니, 마마!”

“그러게.”

조각을 이리저리 보고 있자니, 군주의 슬픈 표정 옆으로 떡돌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문비단 잠옷에 원앙을 수놓아 달라던 목소리가.

“그건 행궁에 가서 해야겠네.”

“네?”

아깐 별생각 없었는데. 문득 이걸 보자 거기까지 가기 싫어진다.

거기 가면 몇 개월은 떡돌이 얼굴을 못 보겠지?

* * *

책봉례를 위해 모인 사람들과 주인공까지 떠났지만, 황제는 홀로 남아 태후와 식사 중이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오가는 대화는 없었고, 태후는 점잖게 식사하는 반면, 월요 황제는 음식을 먹었다가 한숨을 쉬고, 젓가락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고, 다시 먹다가 한숨 쉬길 반복했기 때문이다.

태후는 그 모습을 보다가 나중에는 너무 화가 나서 월요 황제가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릴 때처럼 꿀밤을 먹일 수도 없고…….”

월요는 그 말을 듣고서야 어머니가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걸 눈치채고, 다시 젓가락을 제대로 쥐었다.

“똑바로 드세요, 아드님.”

“예.”

하지만 월요가 식사를 시작하자, 이번에는 태후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억지로라도 식사하려 했던 월요가 항의하듯 바라보자, 태후가 물었다.

“이러는 거. 황후가 일부러 천씨 가문의 여식 둘을 골라 행궁에 보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럽니까?”

“네.”

대번에 월요가 대답하자, 태후는 짐작한 대답이면서도 혀를 찼다.

“가문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건 아드님이 원하는 구도라 생각했는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막 책봉례한 천빈에게 바로 떠날 준비를 하라니요. 게다가…… 천빈은 가문 사람들과 연락이 잦지도 않고, 자매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천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천빈을 제게서 떨어뜨리는 건 아무 효과도 없고요.”

“그건 아드님 생각이지요.”

“!”

“천씨 가문에 비빈이 셋이나 되고, 그중 하나는 아드님이 몇 개월이나 푹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총애를 받지요. 황후로선 대비를 세워두는 겁니다. 황후의 입장도 이해를 해주세요.”

“…….”

* * *

운문비단 세 필 중에 어떤 걸 떡돌이 잠옷으로 할까, 고민하면서 살피고 있자니, 오 공공이 찾아와 행궁에는 언제 갈지, 행궁 위치는 어디쯤인지, 가는 데 며칠이 걸리는지, 가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등등을 알려주었다.

멍하게 듣긴 했지만 나는 거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무식하게 보이기 싫어서 일단 다 이해하는 척하고 있자니, 웬걸.

오 공공이 설명을 마치고서는 갑자기 날 보면서 흐뭇하게 웃는 게 아닌가.

내가 너무 잘 이해해서 저러나 싶어서 같이 마주 보고 웃자, 오 공공은 이번에는 바깥문을 가리키면서 권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마.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응? 내가 설명을 잘 이해해서 웃은 게 아니었나 봐.

“어디?”

의아했지만 일단 따라나서려 하자, 오 공공은 내게 뭘 걸치고 와야 한다고 권했다.

“곧 저녁이라 쌀쌀하니까요.”

여전히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시키는 대로 보송보송한 털이 달린 피풍의를 걸치고서 그를 따라갔다.

그러고 있자니 오 공공이 떡돌이가 나한테 준 ‘비밀 장소’로 걸어가서, 나는 그가 나를 떡돌이에게 안내해 주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 공공은 비밀 장소에 도착하기 전. 갈림길에서 전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는 건가?”

그게 이상해서 내가 물었으나 그는 가보면 안다는 묘한 대답만 하고서 계속 걸었고, 나는 더 묻지 않고 따라갔다.

의아했지만 오 공공을 믿고 따라가자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어느 전각 앞에 멈춰 서더니 손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다 도착했습니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마마.”

안에 떡돌이 있는 거 같은데?

나는 대번에 눈치챘지만 모른 척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떡돌이는 없었다. 외문과 맞닿은 방은 평범한 전각 내부였고.

의아했지만 안쪽에 난 문이 하나 더 있기에 나는 다시 그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놀라운 공간이 드러났다.

이곳은 지붕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저물어가는 붉은 일몰이 다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바닥 중앙에는 보송보송한 풀이 나 있고 그 주위는 평범한 바닥재로 되어 있어서, 꼭 집 안의 중앙부에만 바깥을 옮긴 것처럼 되어 있었다.

떡돌이, 여기 있으리라 짐작했던 내 떡돌이는 풀밭 중앙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얼른 오라는 듯.

내가 다가가자 그는 손을 뻗어 내 허리 사이로 넣더니, 자연스럽게 내 등이 자기 가슴에 닿도록 뒤에서 끌어안고서 물었다.

“어떠냐?”

“이게 뭐야? 내 거야?”

“넌 비밀 공간에 자주 가지 않느냐. 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겨울이니까.”

“내가 추울까 봐 이런 곳을 만들었어?”

고개를 위로 하자 그가 ‘꼭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저절로 입꼬리가 활짝 벌어지면서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마음에 들어.”

내가 싫어할 거라 여겼나? 떡돌이는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나를 뒤에서 감싸면서 속삭였다.

“네가 행궁에 가서 그곳을 관리하는 동안, 짐은 우리 천빈 처소를 더 안락하고 넓고 화려하게 바꿔 두겠다.”

나는 내 허리를 감싼 떡돌이의 손을 보았다.

그의 손등은 아주 고왔다. 손바닥은 의외로 거친데, 손등만큼은 참으로 고와서 그가 얼마나 귀하게 자란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내 손, 그러니까 내 진짜 몸과는 확실히 다른 손…….

그 손을 보고 있다가 나는 그의 손등을 어루만져 보았다.

떡돌이는 가만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등을 내 손으로 쓰는 순간.

내 손에 진득하게 묻은 피가 그의 고운 손에 옮겨가는 찝찝한 느낌이 나서, 나는 얼른 손을 도로 빼버렸다.

다행히 떡돌이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혀 모르기에, 그저 내 손을 다시 주워 잡고서 속삭이기만 했다.

“네가 안 갔으면 좋겠다.”

저녁놀 때문일까. 왜 내 손이 이렇게 빨갛게 보이는지 모르겠어.

떡돌이 손은 안 그런데.

그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뭐가 겁이 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겁이 났다. 내가 겁을 내는 경우는 정말로 거의 없는데도.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나는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상태로 떡돌이의 손을 조물거리며 이 정체 모를 불안감을 떨치려 애쓰고 있자, 떡돌이도 뭔가 좀 이상하다 싶은지 “반숙아?” 하고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에게 이 괴상한 초조함을 설명해주는 대신 얼른 몸을 돌리고서, 그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있지. 전에 떡돌이 네가 그랬잖아. 내가 폐하를 연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

“아직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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