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천빈
기본적인 체력을 시험해보고, 어느 정도로 무공에 대해 아는지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본 결과.
개원은 나에 대해 완전히 ‘엉터리. 의욕 없음’이란 딱지를 얹은 모양이었다.
옷까지는 봐줄 만했는데. 그가 사랑하는 무공을 건성으로 취급하는 건 못 참겠나 보지?
개원은 예전에도 이랬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할 때 뭐든 진지하게 굴었다.
그중 하나가 무공이었고, 그중 하나는…… 나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
어쨌든 내가 설렁설렁 군 효과가 나타났나 보다.
“이렇게 하지요, 천 귀인.”
의욕이 없어도 황명 때문인지 내게 공들여서 설명하던 개원은 마침내 특단의 수를 썼다.
“귀인께 목검을 드리겠습니다.”
“난 목검보다 보검을 선호하는데.”
“……이 목검으로 저를 한 대라도 맞춰 보시지요.”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군.”
“다행이군요.”
짧게 한숨을 내쉰 개원은, 내가 불시에 습격할지 모른단 생각이 드는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일각 동안 저를 한 대라도 맞히신다면 앞으로도 그런 옷을 입고 수업을 들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저를 한 대도 못 맞히신다면, 옷 때문에 귀인이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걸 테니, 앞으론 평범한 무복을 입고 오십시오.”
말은 잘하는구나. 내가 자기를 못 건드리더라도 내 능력이 부족해서란 말은 최대한 안 해주려 하고 있어.
“어휴, 난 폭력적인 거 잘 못 하는데.”
나는 툴툴거리면서 그가 준 목검을 받아 들었다.
받아드는 순간 그를 휘둘러 때릴 수 있는 위치가 화살 과녁처럼 내 눈엔 보였지만, 애써 그 부위로 눈길을 돌리진 않았다.
‘그래도 한 대는 꼭 때리고 싶은데…….’
하지만 무공을 익힌 적도 없는 천소여가 이름난 고수인 개원을 목검으로 한 대 때리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때리긴커녕 스치는 것도 안 될 거다.
무공을 웬만큼 익힌 이들도 내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 걸 생각하면, 확실하지.
“오시지요, 귀인.”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개원은 뒷짐을 지고서 내게 말했다.
내가 어떤 각도로 어떻게 내려치더라도 다 피할 자신이 있는 태도로.
아니, 자신이 있는 걸 떠나서 그게 당연하다는 태도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어떻게 해서든 한 대는 꼭 때리고 싶어지는걸?
“개 대인.”
“예, 귀인.”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합시다.”
“?”
“그러지 말고. 내가 그대를 한 대 때리게 해주게. 그러면 내, 다음부턴 무복을 제대로 입고 오겠네.”
“!”
* * *
개원이 돌아가고 천 귀인도 처소로 가자, 승언은 심궁에 있는 황제의 어실로 찾아갔다.
황제는 책상 앞에 앉아 평소와 다름없이 붓을 쥔 채 고요히 글씨를 쓰고 있었는데, 그 평온함은 승언이 들어오자마자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
“다녀왔습니다, 폐하.”
승언이 인사를 올리자마자, 황제는 되었다 손짓하고서 물었다.
“그래. 오늘 천 귀인 훈련이 어땠지? 잘 하더냐?”
황제는 다급히 물었다. 자신이 다급하단 기색을 감추려고도 들지 않았다.
아까 그가 들어오기 전 거대한 난초처럼 앉아 정무를 보던 게 신기할 정도로.
“수련에는 팔랑…… 하늘색의…… 어여쁜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승언은 천 귀인이 아닌데도, 황제는 가까이 와서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가까이서 들어야 천 귀인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잘 들릴 거란 것처럼.
승언이 가까이 오자, 황제는 두 손을 깍지껴 책상에 얹더니 신중하게 물었다.
“반숙이가 그 무림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 그랬느냐?”
승언은 황제가 손을 초조하게 쥐었다 펴길 반복하자 좀 놀랐다.
그는 천 귀인이 하늘색의 예쁘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 그녀가 맹하다 못해 맹맹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무공을 모르는 천 귀인의 궁녀조차도 그녀의 옷차림이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기색이었다.
개원은 처음에는 천 귀인의 옷을 칭찬했지만, 가르치는 모습을 계속 보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칭찬은 그냥 한 거고. 저자도 짜증이 났구나, 라고.
그런데 황제는 천 귀인이 무공을 배우러 예쁜 옷을 입고 간 걸 어떻게 저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런 눈치는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옷을 입고 나타났지?”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셨는데요. 승언은 솔직하게 대답해야 할지 말지 잠시 망설였다.
황제는 승언이 우물거리자 답답한지 다시 물었다.
“무공은? 잘 배우더냐?”
이번 질문에는 좀 긴장한 기색이 있었다.
천 귀인과 천년비의 연관성에 대해 몇 번이나 의혹을 가졌다 풀기를 반복하는 황제이니만큼, 아마 이 문제는 단순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승언 역시도 이번에는 좀 더 말을 조심해서 골랐다. 신중하고 신중하게.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무공은 잘 모르겠고…… 거래는 잘 하셨습니다.”
“거래라니?”
* * *
생각보다 나흘에 한 번 수업은 길구나.
첫 번째 수업에서 개원이가 든 목검을 힘차게 내려치는 성과를 거둔 후.
나는 처소로 돌아와 후회했다. 좀 더 세게 칠 걸!
사실 치고 싶던 건 그가 든 목검이 아니라 그놈의 머리통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개원이가 ‘천소여’를 싫어하게 될까 봐 하지 못했다.
그가 천소여에게 빠지는 게 화가 나긴 하지만, 그가 천소여를 좋아하게 만들어야 복수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머리 외 다른 부위를 치자니 좀 난감했다.
목은 위험하고. 가슴도 위험하고. 옆구리는 너무 아플 테고. 다리는 위태롭지.
사실 제일 좋은 건 엉덩이였으나, 개원이가 ‘천 귀인은 내 엉덩이를 좋아하는구나.’라고 오해라고 할까 봐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냥 개원이에게 검을 들라고 한 다음 그 검을 세게 내려치기만 했지.
하지만 이 근력으로 그가 든 검을 세게 내려쳐 봐야 얼마나 아팠겠어?
비무림인이라면 몰라도 무림인인 개원이에겐 간에 기별도 안 갔을 텐데.
어쨌든 그 수업이 끝난 후.
다음 수업이 오기 전에 내 책봉례 때 입을 의상이 먼저 완성되었다.
“소주,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해드릴게요!”
“오늘은 누구보다 돋보여야 하는 날이에요. 소주가 주인공이시니까요.”
“이젠 마마잖아.”
“맞아, 이젠 마마니까요!”
원웅과 부성은 신이 나서 내가 책봉례 의상 입는 걸 도왔고, 나는 평소보다 경건한 태도로 마마가 될 준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꽤 뿌듯했다.
세상에. 마마라니. 무림 악적 천년비가 마마가 된다니.
내가 무림에서 별호로 불리지 못한 건, 별호보다 봉호가 어울리기 때문이었나? 다 이 순간을 위해서?
“다 됐어요, 소주!”
“우와…….”
책봉례 의상은 금색이 조금 들어가고, 그 외는 붉은색과 흰색이 여기저기 뒤섞인 색상이었다.
한마디로 어마어마하게 화려하다.
게다가 형태 역시도 평소 입는 화려한 의상보다 배로 화려해서, 옷을 입고 있으면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옷에 묻힌 느낌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머리에 쓴 커다란 관 역시도 아주 멋지다. 후. 좋구먼!
내가 거울을 보며 흐뭇하게 웃자, 원웅도 덩달아 좋은지 귀에 대고 작게 속삭여준다.
“마마, 이대로 쭉쭉 올라가서 황귀비까지 가야 해요.”
“맞아요. 황귀비 마마가 되어서 큰소리 뻥뻥 치면서 사셔야 해요.”
“황후 자리는-.”
노리면 안 되나 보다. 원웅과 부성이 동시에 내 입을 틀어막는 걸 보니.
어쨌든 그렇게 옷을 다 갖추어 입은 다음 처소 밖으로 나가자, 마당에 커다란 가마가 있고 그 주위에 가마를 나를 태감들이 앉아 있었다.
가마는 붉은빛이 도는 날렵한 갈색인 데다 광택이 났고, 내가 앉는 부분에는 아주 푹신해 보이는 방석을 도톰하게 깔았다.
얼른 그 위로 다가가 앉고서 손을 휘젓자 원웅이 따라오면서 “출발하자.”라고 제법 위엄 있게 날 대신해 명령했다.
태감들이 몸을 일으켰고, 나는 원웅, 부성, 귀자와 함께 책봉례를 치를 태후 마마의 금룡궁으로 갔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내게 인사를 올리는 것조차 기분이 좋아서, 나는 흔들면 머리만 전후좌우로 대롱거리는 인형처럼 가마에서 고개를 까딱거렸다.
남들 눈에 안 띄고 평화롭게 사는 것도 좋지만, 모두가 아는 척해주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도 꽤 괜찮구나.
‘어쨌든 평화롭기만 하면 되지!’
마침내 금룡궁에 도착하자 태감들은 걸음을 멈추고 내가 내릴 수 있도록 가마를 내려주었다.
평소보다 더욱 깔끔하고 화사하게 입은 원웅과 부성은 내가 무겁고 화려한 옷에 짓눌리지 않고 가마에서 내리도록 손을 뻗어 부축해주었다.
가마에서 내린 다음에는, 마당에서 기다리던 오원요를 따라 금룡궁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태후 마마와 떡돌이, 황후 세 사람이 상석에 서 있었다.
태후 마마는 웃는 얼굴로, 황후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떡돌이는 면사 쓴 얼굴로.
옆쪽으로는 연얼 군주와 사자 친왕도 와 있구나.
연얼 군주야 그렇다 쳐도 사자 친왕이 왜 온 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빈손으로 온 것 같지 않으니 환영이다.
“천빈 마마, 태후 마마 앞으로 가시면 됩니다.”
내가 잠시 멈춰 서서 먼저 온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오원요가 곁에서 작게 알려주었다.
“고맙네.”
나는 덩달아 작게 인사한 다음, 태후 마마를 향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걸어갔다.
* * *
까다로운 절차에 따른 책봉례가 끝난 뒤.
이젠 편하게 해도 된단 말에 나는 태후 마마에게 관을 벗어도 되냐고 묻고, 허락을 받자마자 무거운 관을 벗어 원웅에게 건넸다.
와. 저게 보기엔 예쁜데 엄청 무겁네. 아니, 물론 무거운 거야 보기에도 엄청 무거워 보이지만.
부성은 기껏 곱게 치장한 머리카락이 망가질까 봐 걱정되는지, 원웅이 관을 받자마자 부채를 꺼내 내게 부쳐주었다.
그러고 있자니 태후 마마는 어느새 상석에 앉아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천 귀인이 아니라 천빈이로군.”
왜 웃으시는진 모르겠지만 따라 웃자, 태후 마마는 좀 더 편하게 앉으면서 떡돌이를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본 다음 다시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이 정도로 연모하는 후궁은 네가 처음이란다.”
그 말에 떡돌이가 차를 마시다가 흠칫해서 자기 어머니를 바라보았으나, 태후 마마는 모른 척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천빈, 네가 좋구나.”
이걸 세상 사람들이 봐야 하는데! 날 욕하던 사람들이 이걸 봐야 한다고!
우두머리 마마가 내가 좋다잖아! 우두머리 마마가!
나는 왕족들이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거야. 확실해!
무림인들이 날 싫어한 건 그들이 날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왕족다웠던 게 틀림없다.
그때.
“천빈.”
유일하게 방 안에서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행동하던 황후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네, 황후 마마.”
왜 부른 건진 모르겠지만 덕담을 해주려니 싶어서 얼른 대답하자, 황후는 부드럽게 웃고서 충고했다.
“이젠 빈이 되었으니 앞으론 자네도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네.”
“그럼요! 당연하지요.”
“그래서 내 내명부 일을 하나 맡겨볼까 하는데.”
“그럼요.”
말을 맞췄던 일이 아닌지 떡돌이가 의아한 얼굴로 황후를 보았다.
황후는 그 시선을 받자 희미하게 웃었다.
“이상한 게 아니니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폐하.”
떡돌이가 같이 웃고서 찻잔을 다시 들자, 황후가 아까보다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겨울이 되면 폐하께서는 3주 정도 따뜻한 천도의 행궁으로 가 계시지. 그때 후궁들도 몇 데려가시는데, 아무래도 일 년 만에 쓰려면 정비가 필요하거든. 자네가 본궁을 대신해 그곳에 먼저 가서 행궁 관리를 맡아주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