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서로가 서로를 불쾌하게
“돌아가라 해. 나 깊게 자서 못 깨운다고.”
나는 도로 눈을 감고 이불을 야무지게 끌어 올려 덮었지만, 원웅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도로 눈을 뜨고서 이불 밖으로 팔을 빼냈다.
“일단 주긴 해봐. 서신.”
원웅은 황당해하는 눈치였으나 나가다 말고 돌아와 서신을 건네긴 했다.
나는 씩씩거리면서 봉투를 뜯었다.
“뭘 이런 걸 보내고 그래? 귀찮게?”
“자주 주고받으셨으니…….”
-오늘 제게 차갑게 대하시던데. 혹시 신이 미흡하여, 알지 못하는 새 귀인께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신경이 쓰여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개원이 서신을 보냈다는 데 한 번 상한 마음은, 서신을 읽자 한층 더 어두컴컴하고 흉악하게 변했다.
성질이 나서 나는 이불을 괜히 뻥 걷어찼다.
아니, 천소여를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나흘 뒤에 만날 건데, 그걸 못 참고 그새 이런 걸 보내?
뭐, 내가 개원이한테 일부러 차갑게 대하긴 했어. 근데 몇 마디 나눌 동안 차갑게 대했을 뿐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바로 서신까지 보내 하소연해야 해? 천소여가 자기를 냉대하는 걸 조금도 못 견디겠단 거야?
“소주? 안에 나쁜 말이 쓰여 있나요?”
내가 콧김을 계속 내뿜어대자 원웅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늘 주고받던 서신인데, 왜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영 모르겠단 눈치.
“나쁜 말 있지. 기분 나쁜 말.”
“감히 소주께요?”
“어.”
나는 서신을 두 번 쪽쪽 찢은 다음 원웅에게 건네며 차갑고 위엄있게 지시했다.
“개 답응 궁녀한텐 내가 자서 서신은 못 전했다고 해.”
“네.”
원웅은 구구절절 묻는 대신 바로 밖으로 나갔다.
원웅이 문 닫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나는 이불을 덮고 도로 누웠으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개원을 유혹한 다음 내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리라 마음먹었는데. 마음먹은 데로 잘 되어가고 있단 건 아는데.
개원이 이 팔랑귀 같은 자식이 너무 쉽게 넘어오는 모습을 보자 그것도 화가 났다.
* * *
그 시각. 사자 친왕은 그를 찾아온 이복형제 초우왕과 함께 동그란 탁자에 마주 앉아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이었다.
사자 친왕은 초우왕의 앞에 놓인 동그란 잔에 따뜻하게 데운 술을 따라주면서 놀리는 투로 물었다.
“그래, 이 야심한 시각에 아우님이 웬일인가?”
실제로도 조금 놀리는 의도이긴 했다.
나이가 어려 함께 술을 마시지 못하던 어린 동생이 그새 술을 주고받을 정도로 훌쩍 커버렸으니.
초우왕은 쪼르르 제 앞에 잔이 채워지는 걸 보며 몇 번이나 손을 움찔하다가 물었다.
“실은 물어볼 게 있어 왔습니다, 형님.”
“그 때문에 소희 생일이 끝나고서도 안 돌아갔나?”
“그런 건 아니고요. 절 어떻게 보시고. 여기 온 건 형님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요.”
웃으면서 손사래를 친 초우왕은 슬그머니 사자 친왕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손을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실은 며칠 전에 폐하 형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서신?”
사자 친왕이 자기 잔에도 술을 따르자, 초우왕은 또 말을 멈추고서 손을 휘저었다.
“제가 따라드릴 텐데요.”
사자 친왕이 괜찮으니 계속 말하라 손짓하자, 초우왕은 손을 무릎 위에 멋쩍게 올리고서 설명을 계속했다.
“그게, 이상한 내용이었습니다. 수오부 군왕과 현우군왕, 강흠예군을 암살한 이들이 이젠 우리를 노리고 있단 내용이었어요.”
“암살?”
사자 친왕은 주전자를 내려놓으면서 눈썹을 씰룩였다.
“네.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오부 군왕이나 강흠예군은 그렇다 쳐도, 현우군왕은 자결한 거잖아요?”
“뭐. 폐하는 아니라 생각하시나 보지.”
“이상한 게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서신을 받은 게 저뿐만이 아니었어요. 다른 종친 몇몇도 이걸 받았대요.”
“그러한가.”
“형님은 안 받았습니까?”
사자 친왕은 이렇다저렇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묘하게 웃기만 했다.
그걸 본 초우왕은 좀 더 다급해진 목소리를 냈다.
“몇몇은 모른 척하지만 받은 내색이었지요. 몇몇은 형님처럼 속내를 잘 숨기니, 받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우가 날 질책하는군.”
“그게 아니라…… 형님. 혹시 폐하 형님이 제게 뭔가 오해를 하신 걸까요?”
초우왕이 한숨을 내쉬고서 술잔을 두 손으로 꼭 감싸자, 사자 친왕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염려 마라. 널 의심해서 보내신 게 아니라 아마 모든 이에게 보내셨을 테니.”
“형님도 받으셨어요?”
“아니. 내겐 그냥 대놓고 물어보셨지. 난 가까이 사니까.”
“아.”
“그러니 찔리는 게 없다면 그냥 폐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된다. 찔리는 게 있다면…….”
사자 친왕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그들도 나름대로 대응이 있겠지. 폐하는 그걸 원하시는 걸 테고.”
“아아. 그렇군요.”
초우왕은 그렇게 대답을 했으나, 여전히 멍한 태도였다.
“사실 잘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다 솔직하게 털어놓자, 사자 친왕은 웃으면서 이복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 멍청하지만 착한 내 동생.”
“안 멍청합니다!”
초우왕은 발끈해서 반박했으나, 곧 사자 친왕이 늘 저랬던 걸 떠올리고는 어깨에서 힘을 빼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오늘은 ‘왕실 사람 중 가장 멍청한’이란 말씀은 안 하시네요.”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헷갈려 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사자 친왕이 그걸 보곤 더욱 커다랗게 웃는 바람에 초우왕은 또 발끈해서 물었다.
“왜요? 왜 자꾸 비웃으십니까?”
“아니. 아니다. 너보다 좀 더 멍, 아니, 맹한 왕실 사람이 생겼거든. 넌 이제 두 번째란다. 그 생각이 나서.”
“첫 번째는 누군데요?”
첫 번째로 멍청하단 소리나 두 번째로 멍청하단 소리나 둘 다 듣기 별로였기에, 초우왕은 반은 화나기도 하고 반은 호기심도 들어서 물었다.
그러나 사자 친왕은 사람을 궁금하게 해 놓고서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비밀이다. 친구로서 의리를 지켜야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황제가 내시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천 귀인의 모습이었다.
* * *
개원은 자신의 서신이 무시당하자 서신을 더 보내지 않았고, 그렇게 애매한 상태로 나흘은 훌쩍 지나갔다.
어느새 개원에게 무공을 배울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시무룩해졌지만, 원웅과 부성은 신이 났다.
“오늘을 대비해서 멋진 옷을 세 벌이나 준비해 뒀어요, 소주.”
“여자 무림인들이 자주 입는단 옷 한 벌이랑요, 승마할 때 입는 의상을 변형한 옷 한 벌, 평범한 무복처럼 만든 게 한 벌 있어요, 소주.”
두 측근 궁녀는 번갈아 가면서 준비한 옷에 관해 설명하더니, 나중에는 귀자까지 데리고 와서 각자 한 벌씩 들고 일렬로 서서 옷을 보여주었다.
“뭐로 입으실래요, 소주?”
평소와 다른 식으로 치장해주는 게 괜히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침상에 앉아 세 사람이 들고 있는 옷들을 차례로 보았다.
팔 길이, 다리 길이, 천까지 완벽한 옷들. 편안해 보인다.
무공을 익히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저 옷들을 입고 싶을 만큼.
하지만…….
“셋 다 별로.”
내가 손을 젓자, 원웅은 충격을 받아서 옷 너머로 나를 쳐다보았다.
“다 마음에 안 드세요?”
나름 자기들의 역작인데 내가 손짓만으로 거절하자 속상한 눈치였다.
미안해, 원웅아. 근데 난 개원이한테 제대로 무공을 배우러 가는 게 아니거든.
나는 대답 대신 옷장 문을 열고, 가진 옷 중에서 세 번째로 화려하고 가장 치렁치렁한 옷을 꺼냈다.
“이걸로 입겠어.”
“예?”
원웅은 기겁해서 외쳤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고른 의상은 길이가 땅에 닿을 듯 말 듯 긴 데다가 치마 쪽도 천이 여러 겹으로 덧대어 있어서, 무공을 익힐 사람이 입을 복장은 절대로 아니었으니.
무공을 모르는 원웅이 기겁할 정도이니, 무공을 익힌 귀자는 얼마나 황당해할까.
힐긋 귀자를 보니, 그는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도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그걸 보자 만족스러워져서 나는 내가 고른 의상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거. 이거.”
개원이도 귀자 같은 반응을 보이겠지. 아니, 직접 가르쳐야 하는 처지니 더욱 안 좋은 반응을 보일 거다.
내가 원하는 건 그거다.
“이게 좋아. 첫날이니까 화사하게 입고 배워야지!”
원웅은 ‘이건 아닌 거 같은데요’란 표정이었으나, 내가 신이 나서 어깨춤을 추자 어쩔 수 없이 옷 입는 걸 도와주었다.
“소주, 생각보다 옷이 음. 오늘 날씨랑 색이 어울리지 않아요.”
“저희가 준비한 옷으로 입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 옷을 입고 연무장을 뛰어다니면 옷이 망가질 텐데…… 그러면 너무 아깝잖아요, 소주.”
원웅과 부성은 치장을 해주면서도 계속해서 내가 생각을 바꾸길 설득했지만,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고른 것이기에 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꿋꿋하게 괜찮단 소리만 해댔고, 결국 황제가 내 수업을 위해 특별히 빌려준 개인 연무장으로 그 복장을 하고 찾아갔다.
하지만 잔소리는 원웅과 부성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승언이는 연무장 입구 쪽에 서 있었는데, 내가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다가, 내 옷을 보더니 당황해서 항의했다.
“귀인. 설마 그걸 입고 무공을 익히시려고요? 제가 뭘 잘못 안 거라 해주십시오.”
“제대로 안 게 맞아, 승언아.”
“그걸 입고는…… 절대로 익힐 수 없습니다.”
“아냐, 승언아.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거든. 가능해.”
“그 옷을 고르는 순간 이미 마음가짐이 제일 글렀습니다, 귀인.”
“하지만 이런 걸 입고 무공을 펼쳐야 옷자락이 펄럭거려서 멋지잖아?”
“그건…… 그런 건 무공 고수가 된 다음에나 하시고요.”
하지만 원웅과 부성이도 말리지 못한 나를, 나보다 떡돌이랑 더 친한 승언이가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근데 넌 왜 여기 있어?”
승언이는 내 질문에 바로 설득을 멈추었고, 얼른 말을 바꿨다.
“그런데 하늘색이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귀인.”
그 소리를 들었을까.
저 안쪽에서 목검을 들고 꾸물꾸물 뭘 하고 있던 개원이 힐긋 이쪽을 보더니 걸어오기 시작했다.
내 옷을 보고 잠시 주춤하긴 했으나, 개원이는 의외로 덤덤하게 웃고서 다가와 내게 인사를 올렸다.
“천 귀인께 인사드립니다.”
내가 자기 서신을 무시한 걸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
서신 이야기를 꺼내 그를 약 올리고 싶었으나, 나는 그 이야기를 하는 대신 승언에게 개원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봐봐. 사부는 뭐라 안 하잖아. 그럼 된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승언이가 이 옷 입고는 무공을 못 익힌다지 않소. 그래서 내가 괜찮다, 말하고 있었지.”
물론 이 말 역시 개원이를 약 올리기 위해 한 것이다.
나는 ‘약 올라라! 열 받아라!’ 속으로 외치며 개원에게 방긋 웃었다.
“그대도 내 편을 들어주시오. 내 스승이잖나.”
개원이를 유혹해야 하니 놀리기보단 잘 대해 주어야 한단 건 안다.
하지만 그가 천소여에게 밤중에 서신을 보낸 일이 아직 기억나니, 이럴 때 조금이라도 복수해야지.
그러나 개원이는 내가 이렇게까지 나서는데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승언이에게 진짜로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입으셨으니 열심히 하실 겁니다. 작고 사소한 데서 동기부여가 되는 법이니까요. 천 귀인은 의욕을 잘 북돋우시는군요.”
승언은 기가 막혀 입을 벌렸고, 나도 덩달아 입을 벌렸다.
‘이걸 말이라고 하나?’
왜 또 열이 받지?
‘너한테 무공을 배우긴 하지만 널 존중하진 않는다’는 뜻으로 이런 옷을 입고 온 건데.
동기부여니 어쩌니 하면서까지 ‘천소여’를 두둔하려 들 줄이야!
기가 막혀. 무공을 배운단 사람이 이딴 옷을 입고와도 그저 좋다고 헤헤 웃을 만큼 천소여가 좋아?
* * *
‘저 여자는…… 무공을 배울 생각이 있긴 한 건가.’
천년비가 개원의 온화한 미소를 보고 화나 있을 때. 개원도 사실 천 귀인이 입은 옷을 보고 언짢은 상태였다.
황명까지 동원해 무공을 배우겠다고 했으니, 재능이 있건 없건 그래도 의지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첫날부터 저런 옷을 입고 오자 너무 실망스러웠다.
‘역시 천년비가 아닌 건가.’
천년비라면 절대로 저런 짓을 할 리가 없다.
개원은 쓸쓸하게 웃었다.
하긴. 천 귀인이 천년비라면 그를 봤을 때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그를 두고 자결할 정도이니 천년비가 그를 모른 척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엉망으로 굴진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