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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31화 (131/283)

##  131화. 몸을 사리는 게 낫지 않겠느냐?

초조하다. 초조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겠지.

“옷…… 갈아입으실 거예요, 소주?”

“아니. 그냥 가도 돼. 뭐 잘 보일 일 있다고.”

조심스레 물어보는 원웅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고서, 나는 평상으로 가 철퍼덕 앉아버렸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은 있었지만 내가 개원이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싶지 않다는…… 이걸 뭐라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마음 때문에.

하지만 오 공공은 내가 옷을 세 번은 갈아입고도 남았을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타났다.

“소주께 인사를 올립니다.”

드디어 왔네. 다행이야. 차라리 빨리 보고 해치우는 게 낫지.

“개 답응 사촌이 왔는가?”

“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나는 얼른 평상에서 내려와 오 공공을 따라갔다.

발치에서 들려오는 낙엽 부스러지는 소리가 마음을 더 심란하게 했지만, 걸어가는 내내 나는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말을 계속 걸었다.

개원이를 상대하는 건 노력이야. 내공을 증진하기 위한 노력.

영약을 자연스럽게 마실 수 있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신경 쓸 거 없어.

애써 마음을 다잡는 사이 우리는 빠르게도 도착했고, 오 공공은 어느 전각 앞에서 멈추어 서서 안쪽으로 목소리를 높여 고했다.

“폐하. 천 귀인을 데려왔습니다.”

오 공공이 ‘이제 들어와도 좋다’고 내게 눈짓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두 개 아치를 지나자 커다란 의자에 앉은 떡돌이와 그 앞에 선 개원이가 보였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낀 두 사람이 나를 동시에 돌아보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딱 그 순간만 시간이 느리게 느껴졌다.

이런 것조차 싫어서 나는 일부러 무표정을 지었다.

“귀인을 뵙습니다.”

개원이가 공손하게 인사할 때도 말없이 고개만 까딱했다.

혹시 떡돌이가 평소 내 모습과 다른 태도를 이상하게 여길까 걱정도 됐지만, 떡돌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리 가까이 오라며 팔을 뻗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내가 다가가자 자신의 품 안으로 나를 끌어당겨 감싸고는 개원이에게 이해하란 듯이 말했다.

“천 귀인이 낯을 많이 가리지. 스승이 될 터이니 미리 말해두어야 할 것 같군.”

“그렇군요.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떡돌이에게 더욱 가까이 붙었다.

개원이 ‘천소여’를 연모한단 걸 알지만, 그가 이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프건 말건 상관없었다. 하나도!

“이리 앉거라.”

하지만 떡돌이가 자기 옆자리를 가리키며 내 허리에서 손을 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놓고 앉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개원이는 여전히 서 있었는데, 떡돌이는 그에게는 앉으란 말을 하지 않고서 물었다.

“그래, 무림인. 수업은 며칠에 한 번 할 생각이지?”

무림인이래. 이름도 안 부르네.

“생각하신 날짜가 있으신지요.”

하지만 침착한 시늉을 누구보다 잘하는 개원이는 그래도 태연하고 공손하게 대답만 잘했다.

“너무 잦아서 천 귀인의 시간을 뺏어도 안 되고. 너무 멀어서 효율적이지 못해도 안 된다.”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을 때도 그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다가 제안했다.

“소인은 사흘에 한 번을 권하고 싶습니다.”

“글쎄.”

하지만 일정 짜는 건 내 의견도 중요한지, 떡돌이는 이번엔 자기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날 돌아보았다.

“그렇게까진 시간을 못 내요, 폐하.”

나는 옳다구나 싶어서 새침한 척 대답했다.

그래도 개원이는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나흘에 한 번은 어떠십니까? 대신 제가 없는 날에도 혼자서 수련은 계속하셔야 합니다.”

“그러지.”

두 번째 질문에는 새침한 척도 관두고 무표정하게 대답했으나, 개원은 역시 덤덤했다.

“예.”

그리고 나는 개원이가 왜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알아차렸다.

황명 때문에 오긴 했지만 자기도 큰 의욕이 없어서 저러는 거였다. 분명해.

“수업은 한 번에 두 시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건 줄일 수 없습니다. 이미 최소 단위입니다.”

하지만 개원이가 의욕을 안 갖는 편이 내겐 좋지.

“그러지.”

“시간은…….”

“오시에서 미시까지.”

시간을 황제가 정하는 것으로 우리 사이의 볼일은 다 끝났다.

개원은 이번에도 별다른 반박 없이 “예.” 하고 대답하며 나를 보았고, 나는 보란 듯이 황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별로 소용은 없어 보였지만.

“나흘에 한 번. 오시에서 미시까지, 한 번에 두 시진씩. 이렇게 알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떡돌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개원이는 나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갔고,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꿋꿋하게 떡돌이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개원이는 ‘천소여’를 좋아하니까 그래도 조금이라도 상처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상처…… 받았을까?

“소여야.”

악의적이고 통쾌한, 그러면서도 기분 나쁜 바람은 떡돌이가 내 허리를 감싸며 귀에 속삭이자 끈적한 자국을 남기며 사라졌다.

“네 스승은 어떤 것 같으냐.”

개원이를 보고 남은 질척한 자국은 흔적이 덕지덕지 남긴 했으나 뻥뻥 걷어차주자 결국엔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곰곰이 고민하는 척하다가, 완전히 개운해지자 입을 열었다.

X나 재수 없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말하려다 보니 주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개원이를 좋아해. 그가 첫인상이 좋다고 해.

그런데 내가 개원이에 대해 나쁘게 말하면, 떡돌이가 날 의심하지 않을까?

떡돌이는 기몽에게 들어서 내가 천년비인가 의심한 적이 있는데. ‘천년비’와 개원이는 원수 사이인 게 유명하니까.

그러다 떡돌이가 내 정체를 다시 의심하면…… 안 되지 안 돼.

그렇다고 좋게 말하자니 내 마음이 싫다고 한다.

게다가 개원이에 대해 너무 좋게 말하면 떡돌이가 그건 싫어할 것 같다. 그는 속이 좁으니까.

“왜 대답이 없지? 설마. 잘생겨서 마음에 든다거나…….”

거봐. 벌써부터 속 좁은 티를 내는 거.

“잘생기긴 했지만 폐하가 더 내 취향이야.”

결국 나는 애매하게 대답하고서 그를 향해 눈을 빠르게 깜빡여주었다.

“스승으로서 어떤지 물은 거였는데. ……듣기 나쁜 말은 아니로군.”

효과는 좋아서, 떡돌이는 좋다고 웃었다.

하지만 개원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고 싶었기에, 나는 얼른 말을 돌려버렸다.

“근데 폐하. 나한테 비단을 세 필 보내줬잖아.”

“마음에 드느냐?”

“어. 그걸로 폐하랑 나랑 한 쌍인 잠옷을 만들 거야.”

“우리는 부부니까.”

“내가 거기에 수도 작게 놓을 건데. 혹시 들어갔으면 하는 문양이 있어? 동물이라거나.”

“원앙으로 할까? 우리는 부부니까?”

아 어려운 것으로도 고르네. 원앙은 알록달록하잖아?

* * *

천년비가 자기도 바쁜 몸이라면서 갑자기 가버린 뒤에도 월요는 그 자리에 남아 차를 한 잔 마시며 곧 자신이 입을 원앙 잠옷을 떠올리고 흐뭇해했다.

하지만 차를 반 정도 다 마셨을 즈음. 그의 표정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폐하? 괜찮으신지요?”

이를 눈치챈 오원요가 얼른 묻자, 월요는 굳이 마음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생각보다 개 답응 사촌이 잘생겨서 좀. 그렇군.”

후회하는 목소리로.

오원요는 잠시 놀라긴 했으나, 황제의 이런 태도가 조금 재밌기도 해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예. 개 답응이 참으로 곱다 했더니, 사촌 오라비가 똑 닮았더군요.”

그러나 월요가 ‘역시 괜히 그자로 했나’ 하고 더욱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자, 오원요는 얼른 달래는 목소리로 바꾸어 황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귀인께선 폐하가 더 좋다고 하지 않으십니까. 그럼 된 거지요.”

하지만 오원요는 잘못 알고 있었다. 월요가 후회하는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반숙이가 문제가 아니다.”

“예? 하면……?”

“반숙이가 너무 아름다우니까.”

“예?”

“개원 그 무림인은 반숙이 같은 미녀를 처음 봤겠지. 그자가 혹시 천 귀인에게 반하기라도 할까 영 신경이 쓰이는군.”

오원요는 처음에는 황제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럴 리가요. 자주 본 사촌 누이가 그리 아름다운데, 그럴 리는…….”

하지만 말을 이으면서 보니 황제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황제가 정말로 천 귀인을 세상에 둘도 없을 미인이라 착각하고 있단 걸 깨닫자, 오원요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월요는 그를 탓하지 않고, 승언을 불러 명령만 내렸다.

“승언아.”

“네.”

“천 귀인이 수업을 받을 때 네가 따라가서 지켜보아라. 혹시라도 그자가 천 귀인에게 흑심을 품는 거 같으면 칼같이 차단해야 한다.”

“예.”

승언은 순순히 대답했으나 오원요는 옆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볼 땐 개원 그자가 천 귀인 미모에 빠지는 게 아니라, 천 귀인이 그자 미모에 빠질 걸 염려해야 하던데.

‘우리 폐하는 정말 편파적인 안목을 가지고 계시는구나. ’

하지만 오원요는 이 말을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반사적으로 잠시 나가긴 했으나, 황제가 그를 쳐다보자마자 오원요는 얼른 다른 일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아차, 폐하. 태후 마마께서 소희 태군의 생일이니 종친들이 모여 저녁에 식사하자 하십니다. 연회를 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긴 가엾으시다고요. 폐하께서도 참석하실 건지요?”

* * *

그날 저녁.

일과를 마친 월요는 태후가 말한 생일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금룡궁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종친들이 여럿 모여 있었으나, 소소한 식사 자리라 태후의 말처럼 모든 종친이 다 모인 건 아니었다.

내명부에서 온 사람도 황후 하나였기에, 월요는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상석으로 가 앉았다.

생일의 주인공인 소희 태군이 태후의 옆에 있다가 그를 보자 얼굴이 벌게져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올렸지만, 친척이라도 몇 번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사이이기에 월요는 손을 저어 도로 앉으란 신호만 보냈다.

잠시 뒤.

태감들은 준비한 음식을 날라왔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안 친한 친척들이 모인 것치고는 나름대로 좋은 분위기 속에서의 식사였다.

그런데 한참 식사하던 도중.

월요가 태후와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잠시 대화를 멈춘 틈에, 내내 조용히 식사만 하던 연얼 군주가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 괜찮다면 신이 질문을 하나 해도 될는지요.”

월요는 ‘연얼 군주가 웬일이지?’ 싶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연얼 군주는 이전부터 그를 멀리했기에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척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너는 입을 열지 마라’고 할 수도 없기에, 월요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연얼 군주는 쇳덩이보다도 더 딱딱하고 서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 오라버니를 살해한 비열하고 잔악무도하고 더럽고 끔찍한 범인은 언제쯤 잡을 수 있을까요?”

태후는 꼭 어린 태군의 생일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싶어 불쾌했으나, 제 오라비가 죽어서 저러는 연얼에게 무어라 하기도 꺼려져 조용히 인상만 찌푸렸다.

월요는 태후가 넘어가 주는 듯하자 덤덤하게 대답해주었다.

“수사 중이다. 힘들겠지만 기다려라. 기몽 장군은 유능하니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다.”

그로서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는 대답이었으나, 애초에 연얼은 황제 앞에서 일부러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가 범인이란 걸 알기에 그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

하지만 황제가 너무 태연하게, 너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그 모습에 연얼은 더욱 괴로워졌다.

“범인이 누구든…… 잡게 되면 제가 죽이게 해 주십시오, 폐하.”

저절로 목소리에 살기가 스며들어 갔으나, 연얼은 굳이 그 기운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살기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모를 테니.

그러나 이 살벌한 말에 돌아온 건 월요의 짧은 웃음이었다.

웃어? 연얼이 움찔해서 쳐다보자, 월요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칭찬했다.

“좋은 마음가짐이군.”

“!”

“하지만 군왕을 죽인 사람이 동생인 자네까지 노리면 어쩌려고 그러나.”

연얼 군주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저 황제…… 혹시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그 의심에 친히 서명이라도 해주듯, 월요는 평소보다 훨씬 다정한 목소리로, 너무 다정해서 꺼림칙한 목소리로 연얼에게 물었다.

“군주. 몸을 사리는 게 낫지 않겠느냐?”

* * *

떡돌이가 오늘은 종친들끼리 식사를 한다고 해서, 나는 침상에 일찍 누워 눈을 감았다.

온몸으로 이 구름 같은 잠옷의 포근함을 느끼면서.

잠옷 덕분에 잠은 빠르게 몰려왔고 나는 그걸 한 줌 쥐어 의식에 열심히 뿌려댔다. 자라. 자. 자!

“소주.”

하지만 원웅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반쯤 가라앉았던 의식은 개구리알처럼 위로 솟아올랐다.

눈을 뜨고서 고개를 돌리자, 원웅이 침상 가까이 오더니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소주. 소주의 무공 스승이 아까 하지 못한 중요한 말이 있다고…… 서신을 보냈습니다. 개 답응의 궁녀가 답서를 받아 가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어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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