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칭찬해줘! 부러워해줘!
“천씨 가문 딸 셋이 모두 비빈입니다! 이게 말이 된다 생각하십니까?”
낮출 대로 낮추었는데도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감히 황후를 꾸짖었다.
“아버님. 목소리를 낮추세요.”
황후는 마음을 다스려준다는 은애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안연자약하게 부친을 달랬다.
“충분히 낮춘 겁니다. 여기서 더 낮추면 제 속이 문드러질 겁니다.”
그러나 황후의 달래는 말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좌칙승상은 이만 갈았다.
그걸 본 황후의 측근 궁녀 영영은 눈치껏 모든 창문을 닫고, 다른 궁녀와 태감들에게 나가란 눈짓을 보냈다.
이미 믿을 만한 이들만 남아 있었는데도.
“황후 마마. 신은 부귀영화만 누리라고 마마를 그 자리에 앉힌 게 아닙니다.”
“압니다.”
“모르시는 것 같으니 짚어드리는 겁니다.”
“…….”
“부귀영화요? 누리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아비로서 마마가 잘 지내면 좋지요. 하지만 가문을 위한 행동도 해주셔야 합니다.”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하셨다면 천씨 가문 세 딸이 다 비빈이 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겠지요.”
은애차도 효과가 없다. 황후는 차를 내려놓고 찻잔을 아예 옆으로 밀어버렸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반쯤 눈을 내리깔았다.
“더 어찌하란 겁니까. 온 귀인이 회임했을 때 편의를 봐주었고, 잘 적응하게 도왔습니다. 내명부의 수장이면서도 온 귀인이 천소여를 따돌릴 때 못 본 척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더 구질구질하게 굴어야 하는 겁니까.”
“구질구질해질 필요 없습니다. 신도 그건 바라지 않습니다. 마마는 누구보다 고귀한 분이어야 하니까요.”
딸이 자신의 말을 흘려듣는 기색이자 좌칙승상은 몸을 일으키고서 구겨진 옷자락을 힘주어 털었다.
퍽 소리가 나면서 먼지가 날리자, 황후는 내리떴던 눈을 뜨고 부친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건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마마께서 고고하게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동안, 이 아비와 가문 사람들은 물 아래에서 죽어라 마마를 떠받들고 있단 걸요.”
“!”
“위치를 바꾸자곤 안 합니다. 우리 가문 사람이라도, 마마의 위치를 노린다면 이 아비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마마. 우리가 가라앉으면 마마도 가라앉습니다.”
* * *
좌칙승상이 황후를 찾아가 초조하게 닦달하는 반면, 천혜음은 자신의 저택에서 흐뭇하게 웃으며 부인과 담소하고 있었다.
“딸 하나는 비이고 둘은 빈입니다. 이런 가문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요. 어려운 일이지요.”
“게다가 우리 소여를 향한 폐하의 총애는 유명할 정도 아닙니까.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습니다. 이젠 황후 자리를 우리 가문이 가져와야 할 때입니다, 부인.”
천혜음의 자랑에 공오부인은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식에게 좋은 일이 생긴 걸 두고 이야기하는데, 서로 얼굴을 찌푸릴 리가 없었다.
그러나 공오부인은 곧 미소를 거두고 신중하게 충고했다.
“일이 잘 풀리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해요. 특히 소여는 폐하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으니 더더욱이요.”
천혜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소여는 기억을 잃어서 말과 행동이 독특해졌지요. 덕택에 폐하의 총애를 받게 되었지만, 예법을 다 익히지 못했다니 흠 잡힐 구실도 줘선 안 됩니다.”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일 뿐이지만요, 여보. 총애받는 사람이 황후 자리에 오르면 오히려 반발을 사니, 소여와 대여 둘 중엔 대여를 황후로 밀어야 할 것 같아요.”
“일리가 있습니다. 대여는 진중한 데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지요. 소여는 사랑스럽지만 큰 짐을 지기엔 너무 자유분방하고요.”
“우리 소여는 황귀비가 되어서, 어려운 일은 하지 않고 폐하의 사랑만 받으며 지내는 게 제일 좋겠네요.”
천혜음이 고개를 끄덕이자 공오부인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찻잔을 내릴 때 그녀의 표정은 서늘했고, 고개를 돌려 옆에 우두커니 선 여인을 보았을 때 그녀의 표정은 얼음장이나 다름없었다.
공오부인이 바라본 곳에 있는 여인은 영빈의 친모인 해운잠이었다.
해운잠은 공오부인의 적개심 가득한 표정을 보고서도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조아렸다.
“동생.”
“네, 마님.”
공오부인이 ‘동생’이라 불러도 같이 친근하게 부르지 않고 깍듯하게 자신을 숙였다.
“우여가 두 아가씨를 잘 모시게 해야 한다. 괜히 헛물을 켜고서 아가씨들 발목을 잡지 않게 해.”
그러나 공오부인의 서늘한 충고에는 해운잠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표정이 흔들리는 걸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내리깔고 대답해야 헸다.
“네.”
그래야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단 걸 감출 수 있으니까.
해운잠은 순종적인 가면 아래로 억울한 마음을 감추었다.
자신의 딸도 그 멍청이 천소여와 같은 빈인데.
아니, 오히려 먼저 빈이 되었는데. 머리도 훨씬 좋고 훨씬 아름다운데.
일국의 빈이 된 제 딸을 아직도 종처럼 취급하는 공오부인에게 화가 났다.
서출이라더라도 그녀의 딸은 황제의 빈이었고, 공오부인은 아무것도 아닌데!
하지만 고개를 숙여 자신의 표정을 감추면 남의 표정도 볼 수 없는 법이었다.
해운잠은 고개를 푹 숙여 화난 표정을 감출 수 있었으나, 그런 해운잠을 공오부인이 ‘네 속은 훤히 알지’란 얼굴로 보고 있단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이제 천 귀인 소리 들을 날도 얼마 안 남았군.”
자려고 누웠을 때였다. 황제가 들어오면서 건네는 말에 나는 머리만 들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겉옷을 벗으며 침상으로 와서는 괜히 내게 시비를 걸었다.
“이젠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자는 거냐.”
하지만 난 저런 데 넘어가지 않지.
“마마는 피곤해서.”
나는 이제 너그러운 마마니까!
떡돌이는 내 말에 혀를 찼으나, 면사를 벗은 입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었다.
“이미 마마가 됐네. 책봉례 하기도 전에 벌써 됐어.”
“미리미리 익숙해지자는 거지. 금방 익숙해질 것 같아. 타고났나 봐. 편하네.”
떡돌이는 내 말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혼자 웃고는, 나를 옆으로 굴려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냈다.
그러고는 침상에 걸터앉아 옷을 주섬주섬 벗는데, 아주 망측하니 보기가 좋았다.
“천빈이 될 텐데. 소감은 어떻지?”
“어떻긴. 아주 좋지!”
“널 천빈으로 만들어준 사람에겐 어떤 마음이 들지?”
“내가 막 자랑스러워!”
“……아.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거냐.”
하지만 떡돌이는 옷을 잘 갈아입어 놓고서는, 뭐가 그리 성질이 난 건지 괜히 내 뺨을 잡고 옆으로 늘리면서 또 시비를 걸어댔다.
“그 자랑스러움 사이에 짐이 어디 한구석 조그맣게라도 박혀 있을까? 응?”
“끄트머리쯤에 희미하게 보이긴 해.”
“있다니 다행이다.”
그래도 내가 또다시 마마다운 품격을 보여주자, 떡돌이는 속 좁은 자신이 부끄러운지 내 뺨을 놓고는 이불 안으로 꾸물꾸물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응?”
베개에 머리를 두자마자 그는 도로 상체를 일으키더니, 뜬금없이 이불을 휙 걷고서 내 몸을 내려보았다.
근육? 내 근육과 부딪쳤나?
“잠옷이 바뀌었구나?”
아, 잠옷을 본 거구나.
잠옷이라면 자랑할 만하지!
나는 그가 잠옷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이때다 싶어 얼른 자랑했다.
“온 귀인이 준 구름비단으로 만들었어! 어때?”
당장 오늘 밤부터 입고 싶다고 했더니 내 궁녀들이 다 달라붙어서 만들어주었지.
내 궁녀들은 아주 재빠르고 영리해. 똘똘해. 꼭 나처럼!
“운문비단을 말하는 건가?”
“어! 구름 같은 비단이래. 이거 입으니까 정말로 좋아. 입고 돌아다니고 싶어.”
내가 연달아 자랑을 늘어놓자 황제는 슬며시 팔을 뻗더니, 내 목덜미에서부터 어깨를, 어깨에서 팔꿈치를, 팔꿈치에서부터 손까지 손을 느릿하게 내리면서 중얼거렸다.
“확실히. 좋군.”
그러고는 이 옷이 탐이 나는지 이번엔 위로 손을 주륵 주륵 올리면서 나를 묘한 눈길로 바라보는데…….
분명 질시의 눈길이었다. 내가 구름 같은 잠옷을 입고 있는 게 탐이 나는 거지. 자기도 갖고 싶단 거야.
그 생각을 하자 흐뭇해져서 나는 재차 자랑했다.
“온 귀인은 참 배려심이 있어. 재수 없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아.”
그걸로도 부족해 아예 황제를 타고 넘어가 침상 밖으로 나간 다음, 그 앞에서 한 바퀴 팽그르르 돌아도 주었다.
“어때? 잘 어울리지?”
생각보다 회전이 잘 되기에 한 바퀴를 더 돌고 두 손을 치켜들며 “짠짠짠!” 하고 외친 다음, 나는 그가 더욱 부러워하길 바라며 눈을 빛냈다.
“…….”
하지만 떡돌이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허망하게 자기 손을 바라보고 있을 뿐.
“왜? 뭐 해?”
나 봐줘! 나 보고 칭찬해줘! 내 옷 부럽다고 해줘!
안달이 나서 일부러 그 앞에 대고 소맷자락을 펄럭거렸지만, 떡돌이는 시무룩 제 손을 내리더니 아예 누워서 눈을 감아버렸다.
“떡돌아?”
“떡돌이는 잔다.”
나중에는 돌아눕기까지…….
이런. 너무 부러워서 기운이 빠져버렸나 봐! 이를 어쩌지?
* * *
다음날. 일이 있어 아침 식사를 함께하지 못하고 일찍 천 귀인의 처소에서 나간 월요 황제는 가마를 타고 잘 이동하다가 갑자기 중간에 멈추라 하고는 오원요를 불렀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걸어가던 오원요가 얼른 다가가 묻자, 월요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천 귀인 궁녀 둘을 데려와라. 늘 붙어 다니는 궁녀 둘.”
“예? 예.”
영 이상한 명령. 하지만 황명이니 따라야 하기에 오원요는 바로 돌아섰다.
“아니. 오원요. 다시 와라.”
그러나 세 걸음도 가기 전에 월요가 재차 그를 불렀다.
“네, 폐하.”
그러고는 오원요가 오자마자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렸다.
“이 얘길 꼭 짐이 할 필요는 없겠지.”
“예?”
“오원요. 네가 가서 천 귀인의 궁녀들에게 전해라. 품계 올라가는 게 얼마나대단하고 좋은 일인지. 운문비단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좋은 일인지. 확실하게 주인에게 알리라고.”
“아…….”
오원요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다가, 황제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요.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꼭 주지시키겠습니다.”
“흠흠.”
헛기침을 한 월요가 손짓하자 가마를 든 태감들이 앞으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원요는 심부름을 가기 위해 돌아섰다.
“오원요.”
그러나 황제는 또 세 걸음을 못 가서 그를 불렀고, 오원요는 조금 짜증이 났으나 표정을 잘 관리하고 다가갔다.
“예, 폐하.”
“내무부 안에 운문비단이 있느냐?”
“세 필인가 두 필인가 있을 겁니다, 폐하.”
“천 귀인에게 주어라. 짐이 주는 거라 꼭 말하고.”
자기도 민망한지, 월요는 햇볕을 가리는 척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가마를 움직이라 손짓했다.
오원요는 황제가 또 부를지도 모른다고 여겨서 일부러 그 자리에서 계속 서성였으나, 이번에는 황제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