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내 활솜씨는 전설이 된다
황후가 힘을 주어 준비한 덕에, 이번 궁술 시합 때는 내명부뿐만이 아니라 외명부 사람들까지 많이 참석했다.
덕택에 사방에는 귀부인들이 가득했고, 그들이 데려온 딸들도 제법 수가 많았다.
특히 후궁들은 간만에 제 어머니와 이모, 고모들이 찾아오자 다들 그쪽과 대화를 나누며 노느라 즐거워했고, 자연스럽게 이런 자리를 마련한 황후에 대한 평판도 올라갔다.
하지만 황후와 같은 가문이면서도 이런 행사에 넘어가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폐하께선 황후 마마가 이 일에 범인일 수가 없고 증좌도 없다며 그냥 넘어가셨지만, 난 믿지 않아요.”
온 귀인과 그녀의 모친 안화군부인이 그랬다.
분노로 가득 찬 딸의 말에 안화군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습니다. 어릴 때부터 황후 마마가 우리 소주를 동생이라고 한 번이라도 챙겨준 적이 있나요? 그런데 갑자기 앉을 자리를 권하고, 그러고 바로 유산하다니요. 누가 봐도 고의지요.”
“자기는 몇 년이 지나도 회임하지 못하는데 내가 한 번에 회임하니 그런 거예요, 어머니.”
“그럼요.”
안화군부인은 부채를 펼쳐서 주위를 살피고는, 다들 자기들끼리 대화하느라 바쁘다는 걸 확인하자 작게 물었다.
“다시 회임할 수는 있나요?”
“돌아가신 분이 왕족이었잖아요. 그 일로 황궁 전체에 감시가 심해졌어요, 어머니. 게다가 요즘 폐하는 천 귀인만 찾고 있어서…….”
회임할 수 없단 이야기였다. 안화군부인이 쯧쯧 혀를 차자, 온 귀인은 어머니의 팔을 잡고 살짝 흔들며 애원했다.
“어머니랑 아버지가 힘을 좀 써 주세요. 가문 사람들을 움직여서 황후를 내쳐줘요.”
“황후의 아비가 가주인데 그게 되나요.”
“그럼 이대로 내 원수는…… 참아야 해요? 폐하도 안 나서주고 부모님도 안 나서주면 난 누구의 도움을 받아요?”
온 귀인이 눈가가 그렁해지자, 안화군부인은 얼른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며 당부했다.
“울지 마세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됩니다. 누가 볼지 모르는데, 여기서 울면 안 되지요.”
“내가 안 울게 생겼어요, 어머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머니가 아신다면…….”
“당연히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참지만, 절대로 황후를 그대로 두지 않을 거예요.”
단호하게 말한 안화군부인은 딸이 안쓰러운지 덩달아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하지만 곧 그녀는 눈을 빠르게 깜빡여 눈의 물기를 말라붙게 하고서,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바꾸었다.
“듣자 하니 천 귀인이 소주를 구해주었다지요?”
딸에게 충고했듯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여봤자 남들이 수군거리기나 할 테니, 평소 같은 모습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네.”
온 귀인은 천 귀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제야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경계했는데. 제가 아파하고 있으니까 혼자 나서서 뛰어줬어요. 내 언니인 황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는데.”
“힘든 일이 생기면 누가 진짜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법이지요. 은혜를 잊지 말아요.”
“그럴 거예요, 어머니.”
“나도 좋은 선물을 하나 챙겨 왔으니 테니, 나중에 직접 천 귀인에게 가져다줘요.”
* * *
몹시 부담스럽다. 아주 부담스러워.
온 귀인은 맞은편에서 자꾸 날 향해 손을 흔들고, 온 귀인 어머니로 추정되는 분도 날 향해 자꾸 따뜻한 미소를 날려주신다.
이 악적 천년비에게 따뜻한 미소라니! 심지어 저런 귀부인이!
이것도 당황스러워 죽겠는데. 연비와 천소여 엄마는 나와 연비 사이에 앉아서 아주 상냥하고 다정한, 그, 무슨 악기 같은.
무슨 악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무슨 악기 같은 목소리로 대해준다.
여기까진 좋아. 좋은데…….
문제는 그 옆쪽으로 앉은 영빈이었다. 서녀라는.
그녀는 표정이 눈에 띄게 우중충한 데다 평소와 달리 말도 거의 없었다.
영빈이 누구의 눈치를 보는지는 딱 보아도 뻔했다.
‘영빈은 천소여 엄마를 무서워하는구나.’
왜 그러지? 성장 환경에 따른 사정이 있나? 천소여 엄마가 영빈에게 무섭게 대했나?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해. 본처 입장에서 첩 자식이 싫긴 할 테니.
하여튼 이렇게 양옆과 앞으로 죄다 불편한 그때. 다행히 황후가 나와서 몇 마디 인사말을 하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영빈도 황후가 앞으로 나서자, 여기는 자기 집안이 아니라 외명부 내명부가 다 모인 궁중이란 걸 떠올렸는지 달달 떨던 걸 멈추고 평소 같은 모습으로 우아하게 앉았다.
그 사이. 황후는 잘 왔다, 와서 좋네, 잘 놀다 가라 등등의 말을 건네는 걸로 적당히 인사를 마무리하고는, 자신의 옆에 선 태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태감이 앞으로 나서서 궁술 시합의 규칙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과녁을 쏴서 점수를 높게 맞히는 사람이 승리하는 규칙.
거기에 우승 상품은 내 궁녀들이 노리던 호숫가 배 한 척.
그때쯤 황제와 사자 친왕, 연얼 군주 등도 시합을 구경하기 위해 나타났고, 잠시 뒤 태감이 들어가자 시합이 시작되었다.
황후는 상을 주는 입장이자 주최자이기에, 같이 활을 쏘진 않았으나 황제와 있지 않고 경기장 안쪽에 마련된 의자에 편안하게 앉았다.
다른 후궁들은 모두 다 참여해야 하기에, 자기 가문 사람들과 떨어져서 그 근처에 따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니까 황후의 주위가 일종의 대기실쯤인 거다.
궁녀들은 그사이를 바쁘게 오가면서 후궁들에게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날랐고, 몇몇 후궁들에게는 부채질을 해주었다.
처음 순서는 승빈이었는데, 그녀는 꽤 솜씨가 좋은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가더니 대번에 정중앙을 쏘아 맞혔다.
하지만 이후에는 8점 칸을 연달아 맞추어서, 총 점수가 26점이었다.
첫 순서가 너무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자 다른 후궁들은 두 번 만에 서로 안 나서려다가, 결국 황후의 눈치를 받고 온 귀인이 나섰다.
“실수예요. ……실수. ……실수.”
하지만 온 귀인은 세 번 연달아 실수를 해서 고작 5점을 받은 게 다였다. 그게 진짜 실수인진 모르겠지만.
그다음으로는 영빈이 나섰는데, 7점 칸을 연달아 세 번 맞추어서 21점을 받았다.
다음으로 나선 남빈은 3점을 받았고, 규빈은 8점을 받았다.
그렇게 차례차례 궁을 쏘고, 실수할 때마다 낄낄 웃으면서 즐거워하는 사이.
내내 우아하게 앉아 활 쏘는 걸 지켜보던 연비가 마치 가장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대장 적처럼 일어나더니 제일 앞으로 걸어가 태연히 한쪽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태감이 활을 내밀었고, 연비는 그림책에나 나올 법한 자세로 활에 시위를 메겼다.
“9점이요!”
“10점이요!”
“10점이요!”
그리고 멋들어지게 간 만큼 압도적인 점수를 내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멋있긴 하네.’
열렬히 나한테 활을 가르쳐 준 걸 보니, 떡돌이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좋아하는 눈치였어.
연비가 이렇게 멋지게 활을 쐈으니, 떡돌이가 반하려나?
나는 원웅의 부채질을 받고 있다가 슬그머니 떡돌이 쪽을 보았다.
떡돌이는…… 나를 보고 있었다. 연비가 아니라. 그렇다고 사랑을 담아서 보는 건 아니다.
아주 걱정스럽게 보고 있어. 뭐야.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오히려 연비에게 홀린 건 영빈이었는데, 그녀는 연비가 콩을 가리키며 “팥!”이라 외치면 “팥팥!”이라 따라 외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천 귀인.”
그때. 시합을 돕는 태감이 내게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천 귀인 차례십니다.”
왜 내 차례야? 아직 사람 많이 남았잖아? 놀라서 보니, 내가 황제와 연비를 구경하는 사이 두 사람이 활을 쏜 모양이었다.
함성이 없던 걸 보니 둘 다 활을 못 쏘았나 보네.
알겠다고 대답하고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소주, 잘하세요!”
뒤에서 응원하는 원웅에게 나만 믿으란 표시를 해 보이고서, 나는 중앙으로 가 서서 한쪽 소매를 걷었다.
왜 그러는진 모르겠지만 앞서 다른 후궁들도 다 이렇게 했으니까.
태감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활을 내게 건넸고, 곧 화살 세 개를 담은 쟁반도 가져왔다.
힐긋 보니 떡돌이는 이젠 아예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서 불안하게 날 보고 있었다.
옆에서 사자 친왕은 아예 ‘못 보겠어’라고 입 모양으로 중얼거리며 부채를 팔락이고.
아니, 대체 왜 저렇게들 불안해하는 거야?
“천 귀인 자세 좀 봐요.”
“아 웃겨. 저게 활을 쏘는 거예요? 활을 집어 던지는 거지?”
“눈은 왜 저기 두는 거래요?”
……아. 자세가 안 좋아서 그랬나.
뒤에서 키득키득 웃으며 소곤거리는 걸 들으니, 왜 며칠 동안 사자 친왕과 황제가 저렇게 걱정했는지 알겠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지.
중간 정도만 하자.
나는 적당히 마음을 먹고서 활에 화살을 메겨 과녁을 향해 쏘았다.
“!”
그런데 이게 뭔 일이야?
내가 쏜 화살이 잘 날아가는가 싶더니,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확 휘어지는 게 아닌가.
그 위치가 딱 관람석 중앙 즈음이라, 구경하던 사람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내가 한 게 아닌데?’
나 역시 당황해서 옆에 선 태감을 보자, 태감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잠시만요.” 하고 웅얼거리더니 아까 다른 후궁이 사용한 화살을 가져와 내밀었다.
“활에 문제가 있나 봅니다, 귀인. 이걸로 하시지요.”
나는 활에 다시 화살을 메기면서 아까 내가 쏜 화살이 날아간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 있는 귀부인들은 다들 식겁해서, 화살로부터 붕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화살을 잡자, 기존 본인들의 자리로부터 다들 다섯 걸음 정도씩 한 번 더 물러났다.
떡돌이를 보니 그는 두 손을 모으고서 무어라 중얼중얼 기도하고 있었고.
후우…….
사실 드러내지 않으려 했는데. 나는 활을 잘 쏜다.
정말이다. 내가 중간만 하려 한 건, 지나치게 몸 쓰는 걸 다 잘하는 모습을 보이면 떡돌이가 날 의심할까 봐서였다.
이미 온 귀인을 안고 언덕에서 의부까지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내려와서 다들 ‘천 귀인은 달리기를 어마어마하게 잘하는 데다 폐활량도 좋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여기에 활 솜씨까지 뛰어나면 너무 눈에 띄니까.
활 쥐는 자세가 나쁜 건…… 그냥 처음부터 그 자세로 익혀서 그런 거고.
하지만 이렇게 되니 내 솜씨를 보여주는 수밖에 없겠어.
나는 재차 자세를 잡은 다음 뒤에서 초조하게 쳐다보는 원웅에게 멋있게 알려주었다.
“원웅. 잘 봐라.”
“네, 네 소주!”
“나는 지금부터 전설을 쏠 거다.”
“예?”
“놀라지 마.”
완벽하게 과녁을 조준한 뒤. 나는 시위를 당겼고…….
-핑!
화살은 멀쩡히 날아가는가 싶더니 과녁 반도 못 가서 시들시들 떨어졌다.
“…….”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원웅이 울면서 외쳤다.
“소주, 처음 화살 쏘면서 이 정도면 전설이 맞아요!”
원웅은 그걸로도 모자라다 여기는지, 옆에 선 태감에게까지 나를 변호해주었다.
“우리 소주가요, 활을 처음 배워서 그래요. 활 며칠 배우고 이 정도면 우리 소주 천재인 거잖아요. 안 그래요?”
태감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내게 힘을 주기 위해서인지 온 귀인과 개시시가 뒤에서 외쳐주었다.
“며칠 배우고 그 정도면 진짜 잘하는 거예요, 천 귀인!”
“천 귀인, 자세가 족자에 나오는 사람 같아요! 며칠 배우고 그 정도면 정말 대단해요!”
며칠 배우고 잘한단 소리는 다들 꿋꿋하게 넣는구나.
아니, 근데 이상해. 나 진짜 활 잘 쏘는데. 왜 이러지?
한숨을 내쉬면서 세 번째 화살을 쥐자, 이번에는 거꾸로 활이 올 거라고 생각들이라도 드나.
뒤에서 응원하던 원웅과 옆에 선 태감들이 뒤로 다섯 걸음씩 물러난다.
좀 기분이 상해서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활을 잡는 순간.
나는 내 화살이 왜 이따위로 굴었는지 범인을 알아차렸다.
‘귀화살?’
예전에 타천천이 자랑하듯 말해준 적이 있다.
사하비단에는 특이한 재주를 지닌 이들이 많은데, 개중 자기 화살뿐 아니라 남의 화살까지 조절하는 귀화살도 있다고.
혹시 그자인가?
생각을 마치고 보니 과연 저기 홀로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병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결론을 짓자마자 나는 적당히 화살을 내 발치에 쏘아 버렸고, 태감은 어리둥절해서 “영점……이요.”라고 대답했다.
다른 후궁 하나가 “합쳐서 빵점이라니.”라고 비웃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자가 두 번 내 화살을 이상한 방향으로 꺾었다는 건, 누군가의 화살을 조절하기 위해 미리 연습을 했다는 것.
그자가 어디로 활을 쏘든, 내 근처에 있으면 내가 알아서 다 잡아챌 수 있지만…… 그러면 내 실력이 들통난다.
저자가 화살 방향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전에 미리 잡아야 했다.
“소주? 어디 가세요?”
당황해서 묻는 원웅에게 배가 아프다고 적당히 둘러대고서, 나는 아까 그 수상한 병사가 있던 방향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