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궁술 시합
“싫어.”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거절할 수밖에. 사실 진짜 내가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상대는 개원이 정도가 다이긴 했다.
만약 진짜로 개원이가 내 스승이 된다면, 뭐 도움이 되긴 하겠지. 강력한 적은 때론 스승이 되기도 하니.
문제는 개원이가 내 실력을 샅샅이 알고 있다는 데 있었다.
개원이에게 무술을 배우다 보면, 까딱 잘못할 시 정체를 발각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웬만해서는 후궁 몸에 내 영혼이 들어와 있을 거란 상상은 하지도 못하겠지만.
사실 기몽도 ‘천년비’ 이름을 묻었을 때 내가 연달아 쓰러지지 않았다면 의심조차 못 했을 거고.
그걸 본 지금도 확신하지 못하고 내내 의심만 하고 있잖아?
어쨌든…….
“싫어.”
내가 재차 단호하게 거절하자 떡돌이는 의아한 얼굴로 설명했다.
“개 답응의 사촌은 무림에서 유명한 영웅이라던데. 이왕 배울 거 그런 자에게 배우는 게 좋지 않으냐?”
“난 잘난 놈은 싫어.”
“?”
“얼마나 코가 높겠어. 난 본격적으로 배울 거 아니잖아. 거드름 안 피우고 적당히 가르쳐 줄 스승으로 붙여줘.”
그래도 떡돌이가 영 납득하는 얼굴이 아니어서 나는 개시시의 이름도 팔았다.
“개 답응 생일에 잠깐 봤는데 아주 재수 없는 새끼더라고.”
좀 거친 표현까지 사용했으나, 떡돌이는 내가 거친 말을 해도 좋은지 오히려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게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내가 재수 없다고 하는데도 오히려 더욱 살갑게 권했다.
“스승이라면 너무 제자의 눈치를 보아서도 안 되지. 조금 재수 없는 정도가 좋아. 역시 그자로 하자.”
뭐야. 나한테 재수 없는 스승을 붙여주고 싶단 거야? 저건 또 무슨 심보야?
하지만 딱 잘라서 거절을 하려고 보니, 문득 불안한 생각이 연달아 떠올랐다.
기몽 장군…… 떡돌이한테 ‘천년비’에 대해 보고했잖아. 그럼 ‘천년비’와 개원에 관한 이야기도 했겠지.
안 나올 수가 없어. 그냥 사귄 것도 아니고, 막판에 개원이 그놈이 나를 죽였으니.
그러면 황제는 ‘천년비’가 개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단 걸 알 터.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개원이 불러오는 일을 지나치게 반대하면…….
‘찔려서 이런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보통은 개원이처럼 대단한 스승을 붙여준다고 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할 테니.
심지어 마교 자식들한테 물어도 백이면 백은 스승으로 달라고 할 거다.
‘젠장. 왜 하필 떡돌이는 여기서 개원이 얘기를 꺼내서!’
속으로 씩씩거려 보았지만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 근데 조금만 배울 거야. 큰 욕심은 없으니까. 미리 말해 둬. 나는 아주 소극적인 제자라고.”
* * *
아직 가을이지만 날씨는 급격히 추워져서 이게 겨울인지 가을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태감들은 땔감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궁녀들은 두툼한 바느질거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온 귀인은 아픔을 이겨냈는지 이제는 조심 조심히 산책을 다니게 되었으나, 여전히 나를 보면 반가워한다.
그렇게 평화롭게 지낼 무렵. 요즘 좀 조용하다 싶었는지, 내명부에서 또 이상한 걸 하겠다고 통보가 왔다.
“활?”
궁술 시합을 하자고.
시합 이유로는 이런저런 명분을 가져다 붙였지만, 그냥 심심해서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 읽은 서신을 옆에 내려두고서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건 왜 하는지 모르겠어.”
원웅은 서신을 잡아 들면서 웃었다.
“소주는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좋아하지.”
“그런데 왜 그러세요?”
“활은 내가 움직이지 않잖아. 화살이 움직이는 거지.”
내가 질색하자 두 궁녀는 안됐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들이 황후가 고른 궁술 일정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어쨌든 궁술 시합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중간은 가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연습하기 위해 활을 들고 청적으로 향했다.
그런데 청적으로 가보니 바삭하게 말라가는 초록색 풀들 위에 앉아 있는 건 떡돌이가 아니었다.
하얀 옷자락을 넓게 펼치고서 반쯤 찌그러진 눈사람처럼 엎어져 있는 이는 사자 친왕이었다.
‘찌그러졌다’라는 표현을 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옷이 넓게 펼쳐졌단 거고. 사자 친왕은 아주 아름답게 있었다.
“응? 천 귀인 아니십니까?”
사자 친왕도 나를 보자 의외인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더 누워 있긴 어려운 듯 그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폐하는요?”
내 질문에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아쉬운 척 툴툴거리기까지 했다.
“제가 여기 있는데 오자마자 폐하부터 찾으시더니. 참 무정한 분이십니다.”
그러다가 사자 친왕은 내가 활을 꺼내서 쥐자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쏠 필요까지야.”
내가 자기를 쏠 거라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그는 화살을 자세히 보더니 더욱 당황해서 다가왔다.
“아니, 그렇다고 스스로를 쏠 필요도 없습니다.”
“응? 뭐가요?”
“화살촉이 반대로 되어 있잖아요, 귀인!”
“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도 사자 친왕은 쩔쩔매더니, 조심스럽게 활과 화살 사이에 손을 넣어 두 개 모두 가져가며 충고했다.
“잘 다루지 못하는 무기는 아예 손도 안 대는 게 낫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아까 그가 드러누워 있던 풀 위에 그대로 앉았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어쩔 수 없어요. 황후 마마가 또 궁술 시합인지 뭔지 한다고 우리를 불렀거든요.”
사자 친왕은 잠시 나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내가 눈을 마주하고서 눈썹을 치켜뜨자 웃으면서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아니, 별건 아닙니다. 그냥 후궁이 바닥에 이렇게 철퍼덕 앉는 건 처음 봐서요.”
“나도 친왕 전하가 철퍼덕 앉아 있던 건 처음 봤는데. 신기하네요.”
사자 친왕은 낡은 경첩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를 내며 웃다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래요. 황후 마마가 궁술 시합을 여신다고요?”
“네.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원웅의 말에 따르자면, 온 귀인이 유산을 하고 그 범인으로 황후를 지목한 일 때문에 그녀의 평판이 흔들렸단다.
원래 황후는 침착하면서도 서늘하고 곧은 성정으로 관리들 사이에서 평판이 아주 좋았는데, 이 정도로 평판이 흔들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고.
유산한 온 귀인을 동정하는 만큼 황후는 조용한 비난을 받고 있다고 했다.
평판이 나빠지셨으니 행사 같은 걸 많이 열어서 분위기를 돌리셔야겠지요. 원웅은 이렇게 이죽거렸다.
들어도 잘 이해가 안 갔지만.
“뭐. 어쨌든 그렇게 되어서. 조금 연습을 하려고요.”
그러고서 내가 활을 쥐려는데, 사자 친왕이 얼결에 손을 뻗어서 활 쥐는 자세를 고쳐주며 물었다.
“무림 고수를 초빙해 무공을 배우실 거라더니. 그건 어찌 되셨습니까?”
떡돌이가 얘기했나 보네?
“아직 안 왔어요.”
인편을 보냈는데 마침 개원이 어디에 가 있어서 못 만났다고 들었다.
개시시는 자기는 궁궐에 있어서 개원이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도 개원은 여기저기 돌아다니길 좋아한다고 했고.
이 때문에 개원이와의 만남은 잠시 뒤로 밀려나 있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저러지?
내가 활 쏘는 연습을 하기 위해 화살에 시위를 재면서 움직이고 있자니, 사자 친왕이 그 모습을 좀 불안하게 쳐다보지 않는가.
“이번엔 땅으로 화살을 겨누고 있는데요.”
혹시 내가 화살촉을 이상한 방향으로 하는 게 걱정되어 저러나 싶어 빤히 보자, 그가 잠시 주저하더니 내게 물었다.
“귀인. 활 잘 쏘십니까?”
나는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암요.”
사자 친왕은 잠시 자기 이마를 짚고서 내가 만지작거리는 화살을 재차 보더니,다시 한번 더 물었다.
“혹시 궁술을 배운 적은…….”
“없는데요.”
“…….”
“이번 시합에 목표가……?”
“한 중간 정도?”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사자 친왕이 다시 자기 머리를 감싸고 내 손에 들린 활을 초조하게 쳐다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게 어색하게 웃으면서 제안했다.
“내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귀인.”
* * *
사자 친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대체 날 어떻게 본 건지, 떡돌이에게 무슨 말을 한 게 틀림없었다.
다음날 연습을 하고 있을 때는 떡돌이가 와서 활 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으니까.
“사자 친왕이 네게 활 쏘는 법을 꼭 알려주라던데.”
“왜?”
“네가 구경하던 사람을 쏠지도 모른다고.”
게다가 사자 친왕이 내 실력을 얼마나 폄하해 댔는지, 가르쳐주기 전에 떡돌이는 우선 내게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자세를 잡아봐.”
그래서 자세를 잡았더니, 그는 “듣던 대로네.” 하고 중얼거리고서 활 쥐는 법부터 쏘는 법을 차근차근 알려주기 시작했다.
“과녁을 잘 봐라. 흔들리지 말고. 목표를 주시해.”
“하고 있어.”
“목표가 보이느냐?”
“보여.”
“쏴라.”
“근데 왜 꼭 목표를 향해 쏴야 해?”
“안 쏴도 돼. 다른 사람들한테 아무 문제 없어. 네가 혼자 질 뿐이니.”
그렇게 며칠 동안 황제에게 활 쏘는 법을 배웠더니, 원웅이와 부성은 몹시 즐거워서 이렇게 외쳐댔다.
“폐하께 배웠으니 반드시 우승할 수 있을 거예요, 소주.”
“황후 마마께서 우승한 사람에겐 호수에 띄워두는 작은 배를 한 척 주신대요. 그게 있으면 마음대로 배를 꾸며서 돌아다닐 수 있어요.”
하지만 궁녀들과 달리 나는 전혀 의욕이 나지 않아서 그저 이 궁술 시합에 그냥 묻혀 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개원이가 언제 내 스승으로 돌아올지 모르다 보니, 영 기운이 나지 않는걸.
하지만 시간은 훌쩍훌쩍 빠르게도 지나갔고, 마침내 궁술 시합 날이 다가왔다.
* * *
“궁술 시합에 맞춰서…… 황후를 죽이라고?”
수도 내에서 대기 중이던 사하비단의 간부 후보 원노행은, 총관 상락으로부터 내려온 지시서를 보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총관의 심부름을 온 인형평을 쳐다보았다.
총관의 심부름만을 맡아서 한다던 인형평은 소문대로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무리 아닐까?”
원노행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황후 주위에 사람이 몇인데.”
그는 궁술의 고수였고, 세 개의 화살을 동시에 쏘아 다른 사람은 잘 보지도 못할 만큼 먼 곳에 있는 적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 외 다른 비기도 있었다.
하지만 큰 규모의 행사에서 황후를 죽이는 일은 달랐다. 황후의 곁에는 목숨을 바쳐 그녀를 지키려 할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화살을 막아내진 못해도 몸 바쳐 지킬 이들이 많다면 그의 화살은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황후를 죽여서 뭘 어쩌려고.”
“황후를 죽이는 게 가장 좋지만, 안 된다면 후궁도 괜찮습니다.”
“아니, 왜 죄다 내명부 사람들인가?”
“그 시합에 참여하는 게 황후와 후궁들이니까요. 원하는 건 소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설마……!”
원노행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사고로 위장하란 건가?”
인형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적당히만 위장해도 됩니다. 황후와 후궁들은 전부 고위 관료의 여식들. 그들 중 누군가 죽는다면, 황실에선 그 집안을 달래기 위해 가짜 범인이라도 알아서 만들어낼 테니까요.”
“하지만…….”
“못 할 것 같으면 안 하면 됩니다. 간부 후보에선 탈락하겠지만, 임무에 어중간하게 실패해 죽는 것보단 낫겠지요.”
반박을 딱 잘라 끊어낸 인형평은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림자처럼 인형평이 사라지자 원노행은 걱정스럽게 뒷짐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벽에 걸린 커다란 활들에 닿았다.
벽에는 온갖 종류의 활과 화살들이 종류별로 매달려 있었는데, 개중에는 황궁에서 사용하는 화살 역시도 구비되어 있긴 했다.
그는 그 앞으로 걸어가 화살촉 하나를 집어 들고서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