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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24화 (124/283)

##  124화. 그 사람 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공이요.”

근데 이거 참. 안 쓰다가 존대하려니 참으로 어색하구먼.

황제는 내가 재차 대답해주었는데도 여전히 당혹스럽단 눈치였다. 갑자기 무공을 익힌다고 해서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 혼란의 먹구름이 가시지 않기에, 나는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최근에 습격도 많이 받았잖아요, 나도 그렇고 다른 후궁들도 그렇고.”

“그렇지.”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스스로 강해질 필요가 있단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무공을 친히 익히겠다?”

“원래도 무공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게다가 난 보나 마나 재능도 많을 테니,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 거예요.”

하나부터 열까지 헛소리를 뱉으며 배를 내밀자 황제가 고개를 기우뚱했다.

내가 무림인 천년비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데.

대놓고 무공을 배울 거라 나오면서 허풍 비슷한 걸 떨자, 오히려 더 헷갈리는 눈치.

나는 그가 내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일부러 눈을 커다랗게 뜨고 빠르게 깜빡거렸다.

황제는 움찔하긴 했으나 내 눈을 피하진 않았다.

대신 곰곰이, 그리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누구를 스승으로 할지는…… 좀 생각해 보자.”

* * *

천 귀인이 자신의 궁녀들을 찾아 떠나가자 황제 역시 볼일이 끝났는지 돌아서서 심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가마를 타고 다닐 것이나, 지금 그는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해 일부러 걷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들과 측근 태감들은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덩달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돌길을 지나 화원을 지나 심궁 부근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내내 조용히 걸어가던 황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승언아.”

승언이 얼른 앞으로 나서자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공을 배운 사람이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다른 사람,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에게 무공을 배우겠다 하진 않겠지?”

승언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그가 본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자존심이 높았다.

멀리서 얼핏 소문으로 들은 이들부터, 가까이는 그림자들을 가리키는 스승들까지.

그 대답에 황제는 더욱 헷갈리는 얼굴이 되었다.

“역시 무림인 천년비와 짐의 반숙이는 연관이 없는 건가.”

오원요도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말을 보탰다.

“찔리는 게 있다면 먼저 무공 이야기를 하시진 않을 겁니다, 폐하.”

하지만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원요는 저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 장공주의 시신이 사라졌을 적. 천 귀인은 높은 담을 넘어 황제를 보러 왔다.

환상이 아니란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장신구까지 떨어뜨려 가면서.

무공을 아예 모른다면 그게 가능한가?

“조금 익히다 말았나?”

“예?”

“경공 위주로……?”

“?”

* * *

천 귀인의 무공에 대한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집무실로 돌아와 업무를 보는 황제에게 마지막으로 전해진 기몽의 보고서 때문이었다.

월요 황제는 눈썹을 찌푸리고서 기몽이 건넨 종이를 날카로운 눈으로 흉흉하게 쏘아보았다.

그동안 기몽을 비롯해 다른 부하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한참 뒤. 월요는 보고서를 ‘쿵’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책상에 내려놓았다.

“범인은?”

황제의 질문에 기몽 장군이 송구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이제 막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증좌가 될 만한 건 있느냐.”

“바로 눈에 띄는 건 없었으나, 차례대로 수사해 갈 것입니다.”

기몽의 말에는 딱히 정보랄 게 없었으나 황제는 그가 얼마나 사냥개 같은지 잘 알고 있기에 더 꾸짖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에게 나가보라 지시했다.

기몽이 인사를 올리고 나가자 곁에 선 오원요가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강흠예군의 목이 발견되었다.”

“아…….”

오원요는 작게 탄식했다.

“결국 예군의 시신이 맞았군요.”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러나 황제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고? 종친이 죽었는데?

“처음에 몸이 발견되었을 때. 기몽이 그랬지. 시신의 품에서 선황제께서 그에게 건넨 보라색 보옥이 나왔다고.”

“네, 그랬지요.”

“머리에서도 그게 발견되었다.”

“!”

놀라운 이야기에 오원요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보옥이 두 개일리는 없다. 그렇다는 건…….

“설마. 적이 시신을 뒤져 보옥을 가져간 걸까요?”

“그렇지. 게다가 감출 마음도 없는지, 아예 입에 물려 두었다니.”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오원요는 입을 쩍 벌렸다.

월요는 면사를 걸치고 있는 것조차 귀찮은지, 면사를 벗어 책상 위에 올리고는 의자에 깊게 몸을 묻고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현우 군왕에 이어 강흠예군까지 죽었다.”

현우 군왕은 자결한 거로 되어 있으나, 월요는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현우 군왕이 자결한 사실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강흠예군까지 죽자,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둘 다 살해당한 거다.”

깊게 생각에 잠긴 채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 툭 툭 일정하게 두드리던 황제가 마침내 생각을 정리했는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수오부 군왕과 손을 잡은 무림 단체.”

“예, 폐하.”

“그 단체가 알아챈 모양이다. 짐이 군왕을 죽였단 걸.”

오원요는 물론, 이런 쪽으로는 나설 마음이 없기에 조용히 대화를 듣기만 하던 승언이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폐하, 그 말씀은…….”

“종친들과 손을 잡고서 꿍꿍이를 벌이더니. 이번엔 종친들을 다 죽이고 있군.”

“현우 군왕과 강흠예군이 그들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범인들은 자신들과 손을 잡았던 종친들을 살해하고 있다. 그게 ‘증거를 인멸하고 손을 떼기’ 위해서인지…… ‘증거를 인멸하고 계획을 바꾸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상을 두드리는 황제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지자 승언과 오원요가 걱정스럽게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책상 위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던 황제의 손가락이 멈추자 승언과 오원요는 더욱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삼키고 주군을 바라보았다.

뭘 생각하기에 저렇게 말없이 혼자 생각하고 있던 건지, 그들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손을 떼기 위해서라면 굳이 입에 보옥을 물려 두진 않았겠지.”

“아, 하면……!”

“자기들이 엮인 증거를 인멸하고 방향을 바꾸기 위해 이러는 걸 거다.”

‘투두둑 투두둑’ 소리를 내며 다시 책상을 두드리던 황제가 마침내 생각이 마무리되었는지 붓을 쥐더니 빠른 속도로 무언가를 적었다.

마침내 붓을 내려놓은 황제는 아직 먹물이 다 마르지 않는 서신을 오원요에게 건네며 지시했다.

“종친들에게 보내라.”

* * *

그 시각. 강흠예군의 입에서 보석이 발견된 일로 착잡한 건 황제만은 아니었다.

연얼 군주 역시도 자신의 사가에서 뒷짐을 진 채 초조하게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분명 입에서 보라색 보옥이 발견되었다 했지?”

“예, 전하.”

그녀에게 접근해 수오부 군왕이 남겼단 편지를 전한 그 수상한 이.

그 수상한 이가 자기들의 능력을 검증하겠다며 ‘보라색 보석’을 찾아보라고 했는데. 이걸 두고 말하는 게 분명했다.

연얼 군주는 서너 바퀴를 더 돌다가 부하에게 물었다.

“자기들과 손을 잡지 않으면 나까지 죽이겠단 이야기 같으냐.”

“고정하십시오, 전하.”

연얼 군주는 그래도 고정하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다가 평상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복수를 위해서 위험한 이들과 손을 잡는 거. 한번 해 볼 수도 있지. 있는데.”

그녀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천 귀인이…… 황제를 연모하고 있단 게 걸린다.”

* * *

황제가 천 귀인에게 무공 스승을 붙여주는 문제를 다시 기억해낸 건 다음 날 옷을 입으면서였다.

종친들과 손잡은 무림인들을 파악하는 일로 바빠 다른 일은 잠시 잊고 있던 탓이었다.

오원요가 옷 입는 걸 돕는 동안 황제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물었다.

“오원요. 너는 천 귀인의 무공 스승으로 누가 적당한 거 같으냐.”

“소신이 뭐 하는 게 있겠습니까.”

황제는 잠시 ‘짐이 직접 가르쳐줄까’ 하고 생각했다.

같이 수련을 하면 얼굴 보는 시간도 길어지고 좀 더 가까워질 테니까.

천 귀인은 이쪽에 마음이 없진 않은 듯한데, 미묘한 선을 그어 놓고 그 이상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 보였다.

같이 수련을 하다 보면 이 선을 지워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짐이 직접 가르칠 수는 없겠지.”

그의 무공 실력은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비장의 방패이자 무기였다.

“승언을 붙여줄까?”

자기 이름이 튀어나오자 승언이 움찔해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승언이 고개 젓는 걸 보진 못했으나 다행히 그 의견도 접어두었다.

“하지만 승언의 무공은 너무 은신 위주라.”

이후 점심 무렵에 만난 사자 친왕은 황제의 고민을 듣더니 같이 고민하다가 제안했다.

“천 귀인은 후궁이지 않습니까, 폐하. 무공을 쓸 일은 거의 없겠지요. 그러니 정순해서 익히기에 안전하고, 보기에도 화려한 검술이 좋을 듯싶습니다.”

문안을 갔을 때 만난 태후는 천 귀인이 상으로 무공을 배우고 싶다 했단 말에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곧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자신도 의견을 내주었다.

“개 답응 가문에 유명한 무림인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드님.”

“그렇다고 듣긴 했지만…….”

“완전히 문외한인 무림인을 불러왔다가 괜히 소동이 벌어질 수도 있지요. 하지만 개 답응 가문 사람이라면 스스로도 조심할 테니, 그자를 불러오는 게 어떨까요?”

황제는 그럴듯하게 여겨 고개를 끄덕였으나 곧 눈살을 찌푸렸다.

개 답응 가문의 무림인이라면…… 그 ‘개원’이란 자 아닌가?

그리고 그 이름은 기몽 장군이 ‘천년비’란 이에 대해 보고할 때도 있던 이름이었다.

천년비를 잡기 위해 사귀는 시늉을 하다가 배신했다는 이.

황제는 표정이 더욱 굳었다.

만약 ‘천년비’와 ‘천 귀인’이 다른 사람이라면, 개원이란 자에게 그 일을 맡겨도 상관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면…….

“아드님?”

황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태후가 걱정스레 불렀다. 황제는 곧 마음을 정리하고서 웃으면서 찻잔을 들었다.

“모후의 의견이 괜찮겠네요.”

‘개원이란 자는 천년비를 죽였단 소문이 났지. 하지만 그건 천 귀인이 입궁한 뒤에 있던 일이라 했으니, 반숙이와 관련 있는 일일 수 없다.’

* * *

원웅이가 이것저것 여러 찻잎을 섞어서 만들었다는 다소 실험적인 차를 마셔보고 있는데, 밖에서 떡돌이의 도착을 알리는 신호가 왔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나는 부성이가 먼저 차를 마실 때까지 찻잔에 입술만 대고 기다리다가 얼른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부성이도 나와 비슷하게 찻잔에 입술만 대고 있다가 아예 밖으로 나가 문을 여는 시늉을 했다.

원웅이는 자기가 만든 차를 아무도 제대로 마시지 않자 입술을 비죽였지만, 어쩔 수 없는지 들어오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잠시 뒤 두 궁녀는 나갔고, 떡돌이는 내 맞은편 긴 의자에 앉았다.

나는 새 찻잔을 그의 앞에 놓은 다음 주전자에 아직 남아 있는 원웅이의 실험적인 차를 따라주며 권했다.

“마셔봐.”

“?”

“어떤 맛이 나는지 마셔보고 알려줘.”

떡돌이는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우뚝 멈추더니 나를 지그시 째려보았다.

“혹시 상한 거냐.”

“아니야. 원웅이가 이거저거 타서 만들었다는데, 영 신뢰가 안 가서. 맛……있어?”

“괜찮은데.”

떡돌이의 말에 슬그머니 용기를 얻어 나도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마셔보았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바로 욕이 나왔지만.

“와 XX.”

떡돌이는 웃으면서 나를 보다가 표정이 굳었지만, 내가 시치미를 뚝 떼고 찻잔을 내려두자 자기 귀를 두드렸다.

“왜 그래?”

나는 새초롬하게 묻고서 그에게 눈을 깜빡이다가 아차 싶어서 물었다.

“그래, 내 스승은 구했어?”

“짐이 여러 사람에게 의견을 구해 봤는데.”

“응. 누군데? 누구든 상관없어.”

누굴 데려오든 나보다 약할 테니. 딱 한 사람 빼고.

“개 답응의 사촌은 어떠냐?”

그래, 저 사람 빼고. 근데 딱 그 사람을 골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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