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얼결에 돕다
“낭군은 어떨까? 어감도 좋고 부드럽구나.”
“기각.”
제안하자마자 거절을 해버리자 떡돌이가 고운 이마를 구기고서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짐은 네 봉호가 이상해도 그냥 받아들여 주었는데.”
“돌떡이는 어때? 아님 춘덕이.”
“…….”
“떡돌이가 제일 마음에 들지?”
히죽 웃으면서 그의 다리에 내 다리를 걸고 너무 아프지 않게 죄자, 황제는 사로잡힌 자신의 다리를 입을 벌리고 쳐다보다가 이마를 짚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얼마나 작게 중얼거리는지 내 귀에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뭐라 그랬어?”
그러고는, 자기가 한 말이 뭔지 설명해주지도 않고서 딱 잘라 거절했다.
“짐이 널 너무 사랑스럽게 불렀지. 이젠 짐도 널 떡순이라 부를 거다.”
“그래 그럼. 상관없어.”
“!”
* * *
책상 위에는 여러 개의 서신이 놓여 있었고, 그 책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눈을 부릅뜬 채 서신을 유심히 살피는 여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화려한 차림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연얼 군주였다.
“…….”
한참 뒤. 여인은 서신에서 눈을 떼더니, 자신의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전부 다 같은 사람이 작성한 거로군요. 저기 위쪽 오른쪽 서신과 대각선에 있는 서신을 작성할 땐 손을 다치던가 했네요. 글씨체가 흔들리는 걸 보니. 하지만 다 같은 사람이 쓴 건 확실합니다, 전하.”
그녀는 연얼 군주가 오래 기다려 불러온 필적 전문가였다.
원래라면 전문가를 수배하고 사나흘 뒤면 만날 수 있어야 할 터이나, 중간에 일이 생겨 일정이 꼬이면서 생각보다 늦게 만나게 된 것이다.
“아닌가요?”
여자가 손을 내리고서 빙그레 웃자, 연얼 군주는 비통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맞았다. 일부러 연얼은 ‘수상한 사람’으로부터 받은 서신을 집에 보관한 오라버니의 서책이나 서신들과 뒤섞어 두었다.
그러고서 저 전문가에게 이 중에서 단 하나만 다른 사람이 쓴 것인데, 자신은 잘 모르겠으니 그녀가 대신 골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저 전문가는 모두 다 같은 사람이 쓴 글자라고 말한다.
게다가 군왕이 승마를 하다 손가락 하나를 다쳤을 시기의 서신까지 완벽하게 골라냈다.
‘수상한 사람’이 수오부 군왕이 쓴 서신이라며 전한 서신은…… 진짜 오라버니의 서신이 맞았던 것이다.
“수고했다.”
연얼 군주의 칭찬에 전문가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녀의 수행원이 건넨 돈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수행원은 전문가가 사라지자 문을 굳게 닫은 다음 연얼 군주를 살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연얼 군주는 비틀거리며 걸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괜찮지 않다. 전혀.”
“전하…….”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연얼 군주가 눈을 번쩍 뜨자 안광이 파랗게 빛이 났다. 그녀의 두 눈은 복수심으로 흉흉해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라비를 죽인 황제에게 복수할 거다.”
“전하.”
“아무리 이복형제라지만 그래도 형제인데. 어떻게. 하. 진짜……. 정 없는 자인 건 알았지만 어떻게.”
연얼 군주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황제의 이복 남매라지만 여러 가지로 사정이 다른 이복 남매들보다 더 복잡했다.
어릴 때는 황녀로 지냈으나, 친모가 폐비 되면서 동복오빠와 그녀는 황궁에서 나가 양부모에게 보내졌다.
다행히 양부모가 좋은 사람들이라 잘 성장할 수 있었고, 폐비 된 친모가 사후 복권되면서 두 사람도 황녀와 황자의 신분을 되찾았으나, 이번에는 몇 해 지나지 않아 양부모가 암살당해 둘 다 죽어버렸다.
이런 연유로 황제는 이복형제라고 해도 남보다 더 멀게 느껴졌고, 동복오빠인 수오부 군왕은 무탈한 집안의 형제자매들보다 훨씬 각별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그런데 그 황제가. 고생 한 번 하지 않고 곱게 곱게 자라서 황좌를 차지한 그 황제가.
내내 고생만 하다가 가까스로 안정을 찾은 오라버니를…….
“단요야.”
“예, 전하.”
“난 반드시…… 반드시 황제를 죽일 거다. 내 손으로.”
연얼 군주의 서늘한 말에, 그녀의 최측근 심복인 단요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대로 문단속을 했다지만 저런 말은 입 밖으로 뱉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말이니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그때. 어디선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연얼 군주가 벌떡 일어섰고 단요는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검을 뽑았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얼굴을 검은 천으로 칭칭 감아 알아보기 힘든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내게 서신을 준 그자로군.”
연얼 군주는 목소리만으로 이 수상한 사람이 전에 만난 수상한 사람이란 걸 바로 알아차렸다.
“영명하십니다.”
이죽거리며 칭찬한 수상한 사람은 연얼 군주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듯 더 앞으로 오는 대신 몸을 반쯤 숙이면서 고개만 드는 괴상한 자세로 물었다.
“자, 제 말이 진실인 걸 이제 아셨고. 황제를 죽이고 싶단 말씀도 하셨고. 그러면 우리가 좀 더 본격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본격적인 대화?”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하지요.”
수상한 자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연얼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도 황제를 노리고 있단 건가.”
“예. 그러니 그런 서신을 전해 드린 거겠지요. 우리의 목표가 같으니, 전하를 돕고 싶어서요.”
단요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연얼 군주를 살폈다.
분노에 잠식된 연얼 군주가 수상한 사람과 함부로 손을 잡을까 염려되어서.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에서도 연얼은 침착했다.
그녀는 바로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수상한 사람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으란 거지? 오라버니의 서신을 전해준 것 외에 네가 뭔 줄 알고서.”
수상한 사람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믿으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전하를 믿지 않습니다.”
“!”
“이용한단 마음만으로도 충분하지요. 이용당해드릴 마음이 넘치니까요, 이쪽은. 목표가 일치할 동안만 잠시 손을 잡을 뿐이랍니다. 언제든 그 손을 놓으셔도 우리는 괜찮습니다, 전하.”
연얼은 수상한 사람이 말하는 ‘우리’란 부분을 귀담아들었다.
“글쎄. ……이용할 가치가 있을까?”
연얼이 쉽게 넘어오지 않자, 수상한 사람은 그럴 줄 알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공으로 손가락을 튕기며 제안했다.
“그렇지요. 그러면 저희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우선 알려드리지요. 내일…… 음. 그래요. 보라색 보석을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보라색 보석? 그게 뭐냐고 연얼이 물으려 했으나, 그 말을 끝으로 어느새 수상한 사람은 흔적도 없었다.
연얼 군주는 숨을 고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복수. 동맹. 수상한 자.
‘보라색 보석.’
* * *
‘양의억액의효과정’이란 이름도 괴상한 후궁 기본 서책을 다 익히고 왔더니, 부성이 그다음 기본 서책이라며 <축체화심>이란 책을 가져왔다.
“기본 서책이 대체 몇 개야?”
“열두 권밖에 되지 않아요, 소주.”
돌아온 대답은 이랬고, 나는 책에 머리를 박고서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그러고서 한숨 자다가 눈을 떠 보니, 개시시가 웃으면서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들자 그녀는 신이 나서 말했다.
“언제 깨어나나 기다렸어요. 이제 더 잘 게 아니라면 얼른 준비해요, 천 귀인.”
“왜요?”
“모두 다 함께 단풍 구경을 갈 거예요. 황후 마마도 함께요!”
단풍 구경을 하는 데 다 같이 몰려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다른 후궁들과 내가 잘 지내길 바라는 원웅과 부성이 간절히 쳐다보는 바람에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야 했다.
이후 나는 옷을 갈아입었고, 이동하기 편한 신발로 갈아신은 다음 개시시와 함께 다른 후궁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다른 후궁들도 오늘은 걷기 좋은 옷차림을 하고서 모여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가 가장 꼴찌로 모인 건 아니었다.
얼마 기다리자 품계가 높은 다른 후궁들이 하나둘 나타나서, 우리는 간식거리를 궁녀들에게 들린 채 천천히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갔다.
언덕이라고 표현은 하지만, 사실 언덕이 아니라 그냥 아주 약간 볼록 솟은 산책로쯤 되는 길을 말이다.
“와, 저 단풍색 좀 보세요!”
“붉은색이 정말 고와요, 황후 마마.”
“단풍은 왜 색이 다 비슷비슷할까요?”
“파란 단풍은 이상하니까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있으면 나름대로 이쁠걸요?”
“천 귀인, 천 귀인은 붉은 단풍이 좋아요 노란 단풍이 좋아요?”
오르막길이라고 해도 매우 야트막해서, 후궁들은 지치지도 않고 재잘재잘 얘기하면서 걸어갔고 나 역시 우 귀인, 아니 이제 우 답응의 사건 덕에 무시당하지 않고 끼어서 갔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그리 다리가 아프지 않을 무렵, 경관이 유달리 예뻐지는 곳이 나타났다.
옆에는 작은 폭포가 흐르고 있고 아래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르고 있고, 그 위로 그냥 조경에 가까운 다리가 있는 넓은 공간이었는데, 원래도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곳인지 돌로 된 탁자도 놓여 있었다.
“여기서 쉬어가면 되겠군.”
황후가 이렇게 말하자 궁녀들은 각기 가져온 음식을 풀어놓기 시작했고, 후궁들은 서로가 가져온 음식을 칭찬하면서 좋아했다.
“황후 마마. 여기에 앉으시지요.”
그러고 있자니, 촉비가 황후에게 단풍잎이 유달리 곱게 쌓인 한 의자를 가리키며 권했다.
“아니. 본궁은 괜찮다.”
하지만 황후는 자신이 그 자리에 앉는 대신, 웬일로 온 귀인에게 권했다.
“네가 앉거라. 회임한 몸이니 조심해야지.”
그 말에 온 귀인은 좋아하면서 인사하고는 제 궁녀의 부축을 받아 그쪽으로 걸어가 조심히 의자에 앉았고, 나는 음식 냄새에 홀려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와. 영빈은 어마어마한 요리를 가져왔잖아. 이거 나도 먹어도 되는 건가?
“이거. 나도 먹어도 돼?”
“그럼요, 천 귀인. 전부 영빈 마마께서 직접 요리하신 거예요. 얼른 드셔 보세요.”
그런데 영빈이 직접 요리했다는 이름 모를 냄새 좋은 음식을 막 입에 넣는데,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그 때문에 음식이 목에 걸려 콜록거리며 쳐다보니, 온 귀인이 털썩 주저앉은 채 연달아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악! 아악! 아아아악! 치워! 치워! 치워줘! 아악!”
치우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녀가 완전히 정신이 나가 손을 휘젓는 바람에, 온 귀인의 궁녀는 제 주인을 부축하려 시도할 때마다 얼굴을 맞고 튕겨 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다른 곳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저게 뭐야!”
“까악!”
“어의! 궁의! 아니 병사!”
계속 기침이 터지는 가슴을 콩콩 주먹으로 두드리면서 가까이 가 보니, 상황 파악이 됐다.
의자인 줄 알았던 건 의자가 아니었다. 아니, 의자는 맞는데 그 위에 시체가 있었다.
그리고 시체 위에 낙엽이 쌓여 있는데, 그 위에 온 귀인이 앉은 거였다.
연신 비명을 토해내던 온 귀인이 이번에는 갑자기 배를 움켜쥐면서 “아아아! 배가!” 하고 소리 지르는 순간.
피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나는 일단 달려가서 온 귀인을 두 손으로 안아 들고 황급히 의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