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너도 비슷한 걸 주어야지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영약부터 주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심지어 ‘천액귀의 피’는 보통 영약도 아니다. 이건 정말로 유명한 영약이었다.
먹으면 내공을 증진시켜 주는 건 물론 정순하게 만들어준다지.
천신괴의가 3년에 한 번씩 딱 세 병만 파는데, 이게 진짜 피인지 아닌지부터 어떻게 구한 건지, 혹시 만든 건지, 아무도 그 정체를 몰랐다.
그저 효능이 대단하단 소문만 돌 뿐.
“진짜 영약이야? 사기 아니고?”
“이런 거로 사기를 왜 치겠습니까?”
“그렇긴 해.”
뚜껑을 열어서 냄새를 맡아 보니, 작은 병 안에 담겼는데도 지독하게 맑은 향이 난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해?
“고마워.”
어쨌든 몸이 바뀐 후 가장 부족한 게 내공인지라, 나는 순순히 영약을 받았다.
내 무공이 내공을 많이 사용하는 무공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내공은 많을수록 좋지. 좀 걸리는 게 있긴 하지만.
“다 드시고 꼭 옛 힘을 되찾길 바랍니다. 그래야 제 환상도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테니까요.”
비원은 영약을 주면서 얄미운 소리를 퍼붓고는,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잠시. 나도 물어볼 거 있어.”
하지만 애초에 내 쪽에서도 비원에게 볼일이 있어서 찾은 건지라, 나는 비원의 옷자락을 잡고 그를 말렸다.
“무슨 일입니까?”
비원은 옷이 구겨지는 게 싫은지, 뒷짐을 지고 돌아서다 말고서 도로 몸을 돌렸다.
슬그머니 자기 옷을 당겨 내 손에서 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혹시 천소여랑 친했어?”
“귀인……이 그 몸에 들어오기 전의 귀인 말씀이신지?”
“어. 친했어?”
“아니요.”
비원의 표정이 꼭 ‘난 그쪽이랑도 안 친한데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럼 혹시 천소여랑 거래 같은 거 했어?”
“왜 그러시는지.”
“했구나.”
“한 적이 없습니다. 한 건도요. 왜 그러십니까?”
“천소여가 용고를 먹고 죽었었잖아. 누군가한테 그걸 받았다는데. 은밀히 받았대. 그래서 넌 줄 알았어. 네가 그런 거 잘하잖아. 몰래 나쁜 짓 하고 꿍꿍이 굴리는 거.”
“욕이죠?”
“자신에게 자신을 가져.”
“욕을 꼭 위로처럼 하시네요. 어쨌든 천소여와 거래한 적은 없습니다.”
“확실해?”
“네. 독을 직접 쓰면 썼지 구해서 남 주진 않거든요. 흔적이 쉽게 남으니까.”
비원의 표정을 보니 아주 뻔뻔하고 단단하다. 진실 같아. 물론 저런 얼굴로 거짓말하는 사람이 없진 않겠지만.
“젠장. 그러면 대체 누가 천소여에게 용고를 가져다 줬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보통 사람은 아닐 텐데.
“난 어떻게 딱 천소여가 죽을 시기에 맞춰서 이 몸에 들어온 거고? 희한해.”
“천소여가 죽을 시기에 맞춰서 들어온 게 아니라, 귀인이 죽은 시기에 천소여가 죽은 거지요.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 시간에 죽은 게 천소여 하나뿐이겠어?”
“그 시간에 용고로 죽은 게 천소여 하나뿐이었나 보죠.”
“?”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죽었으니, 영혼이 착각한 거 아닐까요?”
“!”
뭘 알고 하는 말은 아닌지, 비원은 고개를 기웃거리고는 바쁘다면서 가버렸다.
그가 완전히 떠난 뒤. 나는 홀로 벽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아 손에 쥔 영약 병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 * *
뜻하지도 않게 영약을 손에 넣었지만, 이후 내 처소로 돌아와 밤이 될 때까지도 나는 영약을 먹지 않고 서랍에 보관만 해두었다.
마음 같아서야 그냥 당장 먹어 치우고 싶지만…… 막상 먹으려고 보니 이래저래 걸리는 게 많아서 그렇다.
기몽은 내가 천년비인가 의심한 적이 있지.
당시엔 내공이 적으니 잘 갈무리해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약을 먹으면 내공이 눈에 띄게 많아질 텐데. 괜찮을까?
황제도 나한테 영약을 선물로 줄지 물어보면서 떠본 적이 있잖아.
분명 기몽한테 무슨 말을 들어서 그런 걸 텐데.
떡돌이 움직임…… 보통이 아닌 걸 몇 번이나 봤다.
내색은 안 하지만 떡돌이도 분명 무공을 익혔겠지.
심지어 솜씨도 꽤 좋아 보이던데. 내 내공이 늘어난다면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옆에 자주 붙어서 자기도 하니까?
“소주. 무슨 고민 있으세요?”
“원웅아.”
“네.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난 가끔 생각해.”
“뭘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편할까. 이런 생각.”
“아, 누가 소주한테 그렇게 말한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소주. 부러워서 그래요.”
“?”
원웅은 날 보면서 활짝 웃더니, 조심해서 팔을 끌었다.
“그보다 얼른 머리카락 빗고 예쁘게 땋아요. 오늘은 폐하께서 오실 것 같아요. 느낌이!”
원웅에게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머리를 다 땋기도 전에 정말로 황제가 왔다.
게다가 떡돌이는 덜 땋은 내 머리카락을 보더니, 호기심이 동하는지 가까이 와서는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나섰다.
“짐이 마저 땋아주마.”
원웅은 좋다고 얼른 빗을 넘기더니 야식을 챙겨오겠다며 나갔다.
반면 떡돌이는 본격적으로 머리카락을 땋을 생각인지 내 뒤에 딱 붙어 서서는 소매를 좀 더 걷어 올리고서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잡았다.
“머리 땋는 방법은 알아?”
“그럼. 짐이 가끔 누이 머리카락을 땋아주었거든.”
“진짜?”
내가 아는 남매는 사이가 아주 나쁘던데. 떡돌이는 장공주랑 정말 사이가 좋았구나.
그런 반면 연얼 군주랑은 사이가 데면데면한 것 같지만.
떡돌이는 빙그레 웃더니, 내가 똑바로 거울을 보게 하고는 조심조심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두피를 스치고 갈 때나 머리카락을 휘저을 때마다 간지러우면서도 나른한 기분이 전해져서, 나는 곧 멍하니 앉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천 귀인. 봉호를 내려도 그대로 천 귀인인 내 반숙 계란아.”
떡돌이가 나를 아주 희한한 이름으로 불렀다. 길기도 하네.
“왜.”
“넌 머리카락이 왜 이리 꼬불거리는 게냐.”
몰라. 내 머리카락 아닌걸. 그리고 자기 몸이라지만 천소여도 모를걸.
터무니없는 화제에 입을 다물어 버리자, 떡돌이는 내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살짝살짝 잡아당기더니 뒤통수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모든 행동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빠르게 일어나서, 나는 찰나에 다녀간 입맞춤을 바로 깨닫지 못했다.
“뭐 한 거야?”
뒤늦게 놀라서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 땋은 머리카락을 목 옆으로 늘어뜨리고서 침상으로 가 앉으며 물었다.
“봉호를 ‘천’으로 하겠다는 거. 혹시 황후 때문이냐.”
“어?”
“혹시 황후가 네게 꼬투리를 잡을까 봐 일부러 그런 글자로 고른 게 아닌가 묻는 거다.”
“황후 마마가 나한테 왜 그걸로 꼬투리를 잡는데?”
“지나치게 좋은 글자를 고르면 꼬투리를 잡기 쉬우니까?”
그런가? 아아. 그래서 황후가 그때 떡돌이랑 같이 있던 거구나.
평소에는 떡돌이에게 가도 없던 황후가 왜 오늘은 옆에 같이 있던 건지,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는 아니야.”
그냥 고르다 보니까 그런 거지.
하지만 이거 참.
“내가 하고 싶은 봉호를 못 골랐을까 봐 온 거야? 신경 쓰여서?”
떡돌이가 안 어울리게 이쁜 짓을 하네.
내가 코웃음을 짓고서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힐긋 내 눈치를 살피다 제안했다.
“그런 거라면 지금이라도 원하는 봉호를 말하거라. 처음에 네가 고른 글자는 뜻이 너무 이상해서 짐이 새로 바꾸었다고, 이번에는 짐이 고른 거라고 발표하면 되니까.”
“오…… 웬일이야?”
떡돌이 얘가 그렇게까지 배려해주고, 막 그러는 애가 아닌데?
슬그머니 손을 올려 그의 귀에 걸린 면사를 벗기자,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곧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재차 손을 올리자 떡돌이는 자기 눈앞을 휙 가리더니 뒤로 물러나며 경고했다.
“눈 찌르지 마라. 눈 찌르면 진짜 화낼 거다.”
“안 찔러.”
그 꼴이 황당해서 말하자 떡돌이는 그제야 주춤주춤 손을 내리더니, 무릎 위에 얌전히 올라간 내 손을 보고 안도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원웅이 밤에 먹을 간식을 가져와 탁자에 내려두고서 문을 닫고 나갔다.
완전히 두 사람만 남자, 나는 좌경 앞에서 일어나 탁자 앞에 앉았다.
하지만 떡돌이는 배가 고프지 않은지 침상에 앉은 채 이쪽으로 오지 않고, 내가 젓가락 쥐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안 먹어?”
“짐은 배가 불러서.”
“그래 그럼.”
나 혼자 다 먹지 뭐.
그런데 막 쪄서 따끈한 교자를 집어 입에 넣고 씹고 있으려니, 배부르다던 떡돌이가 슬그머니 내 곁으로 다가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팔을 괴고서 내가 교자 먹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왜 저러나 싶어서 같이 쳐다보자, 그는 내가 음식을 다 삼키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짐이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전에 그러지 않았느냐. 너는 짐을 세 번째로 좋아한다고.”
“응.”
“잘도 대답하는구나.”
“근데 그게 왜?”
교자 하나를 더 집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보자,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허리를 쭉 펴면서 위엄있는 척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마음을 바꾸고 싶지 않으냐? 그러면 지금 바꾸거라. 순서를 바꿀 기회를 주마.”
거기에 대고서 “아직 없는데?”라고 대답하자, 떡돌이는 바로 허리에 힘을 풀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두 번째로 흑합 장군이 좋으냐?”
“응.”
“요즘은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면서.”
“못 보니까 오히려 그리움이 짙어졌어.”
“……짐하고도 한동안 떨어져서 지냈는데.”
“몸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도 멀어지더라.”
“왜 흑합은 못 보니 더 그리워지고, 왜 짐은 못 보니 마음에서 멀어졌단 거지?”
“사람 마음이 미묘하더라고.”
떡돌이 삐졌구나. 너무 대놓고 인상을 찡그리는데?
그래도 교자를 하나 집어서 입에 넣어주자, 오만상을 찌푸리고서도 받아먹긴 잘 받아먹는다.
그러다가 다 씹어 먹은 교자를 꿀꺽 삼키더니, 떡돌이가 아까보다 한결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이번엔 진지하게 묻자, 소여야.”
“반숙이라고 해줘.”
‘소여야’라고 부르면 너무 내가 아닌 티가 나잖아.
“너…… 아닌 척하더니. 짐이 지어준 별명이 마음에 들었구나?”
“그럼, 폐하도 아닌 척하지만 내가 떡돌이라 부르는 걸 좋아하잖아.”
“아니, 짐은 아닌데.”
“그럼 덕춘이?”
“네 별명 짓는 솜씨는 최악이다. 짐은 둘 다 싫다.”
“근데 뭘 진지하게 물어볼 건데?”
“그보다 짐이 네게 봉호를 주었으니, 너도 짐에게 비슷한 걸 줘야 하지 않을까?”
“비슷한 거?”
후궁이 황제에게 내리는 봉호 비슷한 게 있나? 그게 뭐지?
알아듣기 어려운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내 입가를 자기 소맷자락으로 쓱쓱 닦아주면서 진지하게 요구했다.
“네 봉호는 네가 정했으니 짐의 별명은 짐이 고르겠다. 너도 짐이 새롭게 짓는 별명으로 불러다오.”
떡돌이 쟤, 나한테 방금 진지하게 물어볼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별명이 문제인가? 진지한 질문은 그새 까먹은 건가?
황당해서 보고 있자니, 떡돌이는 팔짱을 끼고 진중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