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봉호를 정했다
부성은 당황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마치 도주로를 찾는 다람쥐처럼.
하지만 내가 눈길을 떼지 않고 쳐다보자 결국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주께서 자시에 동쪽 보서고에 가서 꽃을 들고 있는 사람이 주는 보따리를 받아 오라고 하셨어요.”
“무슨 보따리?”
“보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소주. 그저 들키면 저와 소주 둘 다 죽으니 조심하라고만…….”
이렇게 들어서야 전혀 짐작이 가질 않는데.
‘아!’
“혹시 그러고 나서 내가 용고를 먹었던 거야?”
“소주께서 받아 오라 지시하신 게 용고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소주께서 용고를 드시고 문제가 생긴 건 그로부터 두 달 뒤인걸요.”
두 달이라. 두 달 묵혔다 사용할 수도 있지. 오히려 바로 사용하는 편이 더 수상해 보이고.
문제는 그걸 왜 본인이 먹었느냔 거지만.
“내가 그걸 어디에 쓸 거란 말은 없었어?”
자결하기 위해 용고를 구한 건 아닐 거야. 그렇다면 이렇게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진 않았겠지.
“그 이야기를 하실 때 소주가 누군가에게 화가 많이 나 계시긴 했어요.”
“누구한테?”
“저도 그걸 잘…….”
아는 게 없잖아.
아니, 아니야. 그래도 몇 가지는 알았어. 천소여가 누군가를 노렸단 것.
부성은 잘 모르겠다지만, 어쩌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지도 모르지만, 분명 부성이 받아 온 그건 용고야.
아니면 궁궐에 틀어박혀 사는 천소여가 그걸 무슨 수로 구했겠어?
그럼 천소여가 누구를 죽이려고 용고를 구했는데, 역으로 당해서 자기가 먹은 걸까?
그 상대가 누구지? 죽이려던 자와 역습한 자가 동일인은 맞나?
용고를 구해준 사람은 또 누구고?
그러고 있자니 원웅이 신나 안으로 들어오며 “소주! 소주!” 하고 외쳤다.
“봉호는 뭐로 하실 거예요? 정하셨어요?”
* * *
“폐하께서 천 귀인에게 봉호를 직접 고르라 하셨다고?”
황후는 새로 진상된 알이 굵은 대추를 먹다가 상궁이 전해준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예.”
“확실한 일이냐?”
“예, 마마. 지금 그쪽 처소 궁녀와 태감들은 난리가 났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면서요. 쉬쉬하지만 알 사람은 다 안대요. 폐하께서도 비밀로 할 생각은 없으신 듯하니 다들 말을 전하고 있고요.”
궁녀는 몹시 불만스러운 듯 보고를 하다 말고 연신 인상을 찡그렸다.
“처음이긴 처음이지.”
차갑게 중얼거린 황후는 대추를 마저 입에 넣고 씹고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걱정이구나. 천 귀인에 대한 폐하의 총애가 도를 넘었어.”
상궁은 대추 찌꺼기를 치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후궁들 중엔 천 귀인이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요? 천 귀인은 큰 야심이 없고 멍청하잖아요, 마마.”
“그렇지. 천 귀인은 모두가 다 아는 맹한 후궁이지. 하지만 그 자매들은?”
황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비는 독수리 같은 사람이다. 영빈은 연비 앞에서만 양처럼 구는 늑대지. 천씨 가문 사람들은 또 어떻고? 천 귀인이 맹하든 욕심에 없든 그들과 한배를 타고 있단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아아. 하긴. 그건 그래요.”
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그렇게 생각하던 황후는 곧 아예 몸을 일으키며 지시했다.
“직접 봉호를 고르라 했으니 분명 좋은 뜻을 가진 글자를 골랐겠지. 거기에 꼬투리를 잡아서 살짝 경고를 해야겠다. 미리 선을 그어두는 것도 좋겠지.”
* * *
황제를 보러 갈 때면 내 궁녀들은 온 정성을 다해서 꾸며준다.
머리카락을 땋아도 한 가닥 한 가닥 튀어나오는 부분이 없도록 눈을 부릅뜨고 땋고, 진주 같은 장신구를 쫓아줄 때도 장거리와 근거리에서 내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 다음 신중하게 꼽는다.
하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더했다.
“폐하께서 소주께 봉호를 주는 날이잖아요.”
“내가 정한 건데.”
“소주께서 정해도 내려주시는 건 폐하니까요. 폐하께서 보시고 깜짝 놀랄 만큼 잘 차려입어야 해요, 소주.”
원웅과 부성은 시침 첫날 경사방 태감이 놀랐던 기술을 한 번 더 발휘해서, 나를 봄비 내리는 날 슬프게 헤어진 아련한 첫사랑 같은 인상으로 만들어주었다.
황제에게 그런 첫사랑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완벽해요!”
“책봉례 때 꾸밀 모습도 미리미리 생각해 두어야겠어요, 소주.”
자신들의 작품이 마음에 드는지 한껏 즐거워하는 두 궁녀를 데리고 나는 심궁 어실로 향했다.
그런데 어실 앞에 도착해보니 이미 화려한 가마 한 대가 세워져 있고 주위에 낯선 태감들이 서 있었다.
누군가 싶어 힐긋거리자니, 오 공공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알려주었다.
“천 귀인. 지금 안에 황후 마마께서 와 계십니다.”
황후가 왔구나. 어쩐지. 가마가 엄청나게 화려하다 했어.
“그러면 난 좀 있다 올까?”
“아닙니다. 먼저 폐하께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귀인.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나중에 와도 상관없는데.
오원요는 내 머리 위에서 찰랑찰랑 소리를 내는 장신구를 보더니, 얼른 몸을 돌려 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황제를 보기 위해 이렇게 잘 치장하고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라고, 나름 신경 써 주는 기색이었다.
어쨌든 바로 허락을 들었는지 얼마 가지 않아 그는 다시 나와서 황제가 들어오라 했다고 대답했고, 날 안내하기 위해 앞서 걸어갔다.
‘그럼 황후랑 나랑 떡돌이랑 셋이 보는 건가?’
봉호 얘기를 하러 왔는데. 황후 앞에서 하긴 좀 그렇겠지?
아주 편하진 않은 상태로 방 안에 들어가자, 오원요는 “폐하. 황후 마마. 천 귀인이 왔습니다.”라고 알려주고는 꾸벅 인사를 한 다음 먼저 나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나는 오원요가 완전히 나가기 전에 떡돌이와 황후에게 차례로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서 고개를 드니 떡돌이와 황후는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었고, 나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어디 앉지?’
눈을 굴리니 다행히 의자 하나가 보이긴 하는데. 저걸 마음대로 가져와서 앉아도 되는지는 알 수 없어서, 나는 멀뚱히 선 채 떡돌이를 보았다.
하지만 내게 먼저 말을 걸어 준 건 떡돌이가 아니라 황후였다.
“오늘따라 천 귀인의 안색이 참으로 맑군. 날이 가면 갈수록 이렇게 어여뻐지는 걸 보니, 폐하께서 총애할 수밖에 없지.”
황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서늘했지만 나온 말은 제법 다정했다.
어리둥절하지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나자, 떡돌이는 황후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서 “오원요!”하고 외쳤다.
그러자 나갔던 오원요가 들어오더니 방 안 상황을 눈치 빠르게 알아채고서 얼른 의자를 가져다가 내 뒤에 놓아주고 나갔다.
“앉거라.”
오원요가 나가자 떡돌이는 그제야 앉으라 말했고, 나는 어정쩡하게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좀 당황스러웠다.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그냥 나더러 ‘너도 의자 가져다가 앉아라’라고 하면 내가 알아서 가져다 앉을 텐데. 왜 굳이 나갔던 오 공공을 불러다가 의자를 옮기라 한 거지?
심지어 의자 거리가 멀지도 않고 의자 무게가 무겁지도 않은데?
평소의 떡돌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황후와 황제 둘 다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이 이야기를 묻기도 좀 뭐해.
그러고 있자니 이번에는 황제가 내게 말을 걸어 주었다.
“봉호는? 생각해 보았느냐?”
다행히 그렇게 물어보는 황제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서, 약간 그가 어색하게 여겨졌던 마음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네. 저와 어울리는 아주 멋진 단어를 생각했어요.”
떡돌이한테 안 쓰던 존대를 하려니 좀 혀가 안 굴러가는구먼.
그런데 황후는 내가 봉호 고르는 걸 알고 있나? 황후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해도 돼?
“천 귀인이 어떤 봉호를 골랐을지 본궁도 궁금해지는군.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후궁은 한 명도 없었지. 좋은 봉호를 골랐길 바라겠다.”
되나 보다. 황후도 이미 알고 있네.
두 사람이 어디 이야기해 보라는 듯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황후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떡돌이는 면사 때문에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역시나 기대하는 듯했다.
나는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내가 열심히 골라서 써온 글자를 꺼내 내밀었다.
“‘천’ 자로 하겠습니다.”
‘용’ 자는 안 된다고 해서, 여러 가지 다른 글자들을 생각해 보았지.
원웅과 부성이 봉호는 뜻이 중요하다고 하기에 내가 좋아하는 ‘금’자를 넣어서도 해 보았고, 강하단 뜻을 넣어서도 해 보았다.
용맹하다던가 호랑이 같다던가, 행운을 받으라던가, 그야말로 온갖 글자를 다 넣어보았다.
하지만 아예 다른 이름을 하려니, 뭐랄까. ‘천년비’의 이름이 너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느낌이어서.
그래서 내 이름에서 글자를 고르려 했는데, ‘년’을 봉호로 하려니 ‘년귀인’은 발음이 너무 어렵고.
‘비’를 봉호로 하려니 ‘비귀인’은 괜찮지만, 나중에 품계가 올라갔을 때 ‘비빈, 비비’가 될 거 아닌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천’으로 온 거였다.
황제는 내가 내민 종이를 유심히 보더니, 면사 아래로 드러난 입술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발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천’ 자로군.”
황후도 궁금한지 몸을 조금 숙여서 내가 내민 종이를 쳐다보다가, 글자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멋대로 하다’는 뜻을 봉호로 정하다니. 천 귀인은 과연 늘 독특해.”
그녀는 곧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다시 몸을 원래대로 했다.
“잘 어울리는구나.”
이렇게 덧붙이고서.
나는 떡돌이를 보았다. 떡돌이는 아직까지도 내가 쓴 글자를 보고 있었는데, 내가 쳐다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종이를 내리며 물었다.
“정말로 이 글자로 해도 괜찮겠느냐? 다른 좋은 뜻을 가진 글자도 많을 텐데.”
“네. 그게 좋아요.”
* * *
봉호가 생겼는지 생기지 않았는지 거의 티가 나지 않는 천 귀인이 물러나자, 월요 황제는 오원요가 가져다 놓은 차를 마시면서 황후에게 물었다.
“꼬투리를 잡으러 왔는데. 못 잡고 가서 안타깝겠소?”
빈정거리기보다는 놀리는 투였다. 게다가 꽤 친근한 목소리.
하지만 황후는 월요 황제가 자신이 왜 여기에 찾아온 건지 모를 거라 여기고 있었기에, 같이 웃을 수 없었다.
정곡을 찔린 그녀의 손이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곧 황후는 침착함을 되찾고서 평소처럼 차갑게 웃으며 수긍했다.
“그렇군요. 너무 거창한 단어를 봉호로 가져가려 하면 한소리를 하려 했는데 말입니다.”
월요 황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빈 의자를 쳐다보았다.
“천 귀인은 가문도 좋고 사랑스럽지. 하지만 고작 귀인일 뿐인데. 왜 그렇게까지 경계하는지 모르겠군.”
“왜 그런지는 폐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천 귀인이 지금은 귀인이지만 계속 귀인일 수 없다는 것도요.”
“…….”
“신첩은 폐하께서 천 귀인을 총애하는 걸 무어라 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천 귀인에게는 승냥이 같은 두 자매와 독사 같은 아비가 버티고 있단 걸 늘 기억하세요, 폐하.”
* * *
떡돌이에게 봉호를 ‘천’으로 하겠단 말을 전한 후.
이왕 심궁까지 온 김에 나는 비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에게 ‘혹시 천소여에게 용고를 구해다 준 게 너야?’라고 묻고 싶어서였다.
다행히 비원은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어려운 수준이 아니라 쉬웠다.
비원도 내가 여기에 들렀단 이야기를 알고 있던지, 그쪽에서 오히려 먼저 접근을 해왔으니까.
그리고 장소를 바꿔서 인적 없는 곳으로 가게 되자마자 비원은 내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작은 병을 내밀었다.
“절 구해준 보답입니다, 귀인.”
“이게 뭔데?”
“영약입니다. ‘천액귀의 피’라고 하는 것이죠. 많이 아깝지만……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