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봉호
“아. 여기 폐하 후원이구나.”
“…….”
“나는 폐하 보러 왔어.”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내 떡돌이.” 하고 덧붙이자, 그의 눈동자에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떡돌이의 면사를 벗겨냈다. 그가 희미하긴 하지만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내가 와서 싫어?”
이미 안 싫어하는 티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물어보자, 떡돌이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면서 뒷짐을 지었다.
“말 돌리는 솜씨는 선수로군.”
“저기, 누나의 무덤에 관한 소식 들었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마자 웃고 있던 떡돌이가 표정을 굳혔다.
“괜찮아?”
조심스럽게 묻자 떡돌이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서 허리를 감쌌다.
그 바람에 그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같이 걸어가게 되었는데, 떡돌이가 날 데려간 곳은 아까 그가 멍하게 앉아 있던 그 의자였다.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은 너뿐인 거 아느냐.”
“다른 사람들은 안 물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지.”
“고민하다가 안 물어?”
“못 묻는 게 아닐까.”
떡돌이는 맞은편에 앉더니, 내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고서 내 어깨에 자기 머리를 대었다. 앉은키가 훨씬 커서 불편할 텐데도.
솔직히 말해서 좀 무거웠으나, 나는 어깨를 치우는 대신 그의 허벅지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떡돌이는 가만히 앉은 채 내 토닥임을 받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아무도 날 방해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나 갈까?”
“네가 오니 좋다.”
“나 있어?”
고개를 끄덕인 떡돌이가 내 어깨에서 머리를 들더니, 자기 허벅지 위에 올라온 내 손을 꽉 쥐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대화를 나누기 전. 안쪽에서 오 공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집채를 중심으로 담이 두르고 있어 외부로부터 완전히 가려져 있다. 즉, 이 후원에 오려면 꼭 집채를 통과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오 공공은 누군가 정문을 통하지 않고 여기에 와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 갈까?”
내가 어마어마하게 높은 담벼락을 어떻게 넘어온 건지, 떡돌이가 묻지 않고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없기에 나는 ‘갈까?’ 하고 물으면서도 일단 몸부터 일으켰다.
“갈게.”
떡돌이가 황후를 돌려보내진 않을 테니 내가 떠나야지.
“같이 있자.”
그러나 떡돌이는 내 손을 꼭 잡아서 다시 자리에 앉게 하고는, 오히려 문 안을 향해 소리쳤다.
“머리가 아프니 고맙지만 돌아가라 해라.”
“예, 폐하.”
발소리가 멀어지자 떡돌이가 손을 쥔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이 있자, 소여야.”
* * *
“폐하께서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십니다, 마마.”
전각 앞에서 기다리던 황후에게 오원요가 다가와 죄송스러워하며 말하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많이 편찮으신가. 하면 어의를 불러야지.”
“몸의 문제가 아니시니까요.”
“이런 일은 혼자 곯으면 더욱 힘드실 터인데.”
“시간이 약인 일도 있으니까요.”
“…….”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지.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나 모르겠습니다.”
오원요가 한숨을 푹푹 섞어가며 중얼거리자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돌아섰다.
“폐하께 본궁이 다녀갔다고 전해주시게.”
“예, 마마.”
이후 대문을 빠져나온 황후는 가마에 오르는 대신 그들을 뒤로 물리고서 측근 궁녀만을 데리고 잠시 길을 걸어갔다.
얼마나 그렇게 걸어갔을까. 담을 따라 쭉 걸어가던 그녀는 멈추어 서서 고개를 위로 들어 높다란 담에 기대듯 자라난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나무 앞에 환상처럼 한 사내가 일렁였다. 용포를 입었으나 황제는 아닌 사내가.
그를 떠올린 황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자, 궁녀가 이를 눈치채고 작게 “마마.” 하고 두려워하며 불렀다.
황후는 스스로에게도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게 물었다.
“온은연이 회임한 그 아이…… 그의 아이일까.”
“마마.”
겁이 난 상궁이 다시 작게 부르자, 황후는 쓸쓸히 웃고서 돌아섰다.
“무슨 소용일까. 가자. 내가 미련하였다.”
혹시 이곳에 오면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으려나, 생각한 게 후회되었다.
만나서 할 말도 없으면서.
그때 돌아서는 그녀의 눈에, 무언가 작은 것이 햇빛을 받아 땅에서 반짝였다.
‘저게 무엇이지?’
황후가 눈짓하자, 곁에 선 상궁이 얼른 그곳으로 달려가 땅에서 반짝거리는 물건을 집었다.
“여기 있습니다, 마마. 보시지요.”
상궁은 물건을 바로 황후에게 다가가 바쳤다.
상궁의 손바닥 위에서는 위에 금색 테를 둘러 새 모양으로 세공한 보석이 있었다. 딱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물건.
황후는 그 금색 새를 집어 모양새를 샅샅이 살폈다.
“장신구에서 떨어진 것 같군.”
“다른 후궁이 여길 지나간 걸까요?”
“……후궁이 여길 지나갈 일은 없을 텐데.”
황제의 별채 후원과 맞닿은 담. 이곳은 오가는 이가 거의 없다.
연금이 이곳을 자주 오가는 이유 역시 마주칠 사람이 거의 없어서라고 들었다. ‘자주’라고 해도 정말로 매일 있는 건 아니라지만.
그런데 여기에 후궁의 장신구 일부가 떨어져 있다고?
장신구를 집은 황후의 눈길이 담벼락을 따라 올라갔다.
“저기서 떨어지진 않았을 거예요, 황후 마마. 누가 이런 장신구를 달고 저길 올라가겠어요.”
상궁은 황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고서, 웃으면서 추측을 부정했다.
하지만 황후는 표정을 푸는 대신 그 장신구를 손바닥 안에서 굴리다 지시했다.
“아주 값비싸 보이니 이것의 주인은 분명 수선을 하려 들 거다. 내무부에 장신구를 수선해달라 부탁하는 이가 누구인지, 며칠간 계속 지켜보도록 해라.”
* * *
황후의 명령을 착실하게 따른 상궁은 내무부에 사람을 보내어 누가 그런 부탁을 하는지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이틀 뒤. 답을 찾아내서 황후에게 그 일을 보고했다.
“황후 마마. 내무부에 장신구를 수선해달라 청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
황후는 책을 읽다 말고서 고개를 들었다.
“누구였지?”
그런데 상궁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게 아닌가.
시원시원한 상궁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황후는 재촉했다.
“왜 말을 하지 않느냐.”
그 재촉에 상궁은 더욱 우물거리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 수선해 간 분은 폐하라고 하십니다, 마마.”
“?”
* * *
“자.”
수련을 위해 나가려는데, 뜻밖에도 황제가 다가오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웬일로 이 시간에 오셨어요?”
주위에 사람이 많기에, 나는 평소와 달리 예의를 갖추어 떡돌이에게 물었다.
실제로 이 시간은 평소 떡돌이가 오는 시간이 아니었다. 이런 애매한 시간에 우연히 청적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그가 처소로 오는 일은 드무니까.
떡돌이는 대답 대신 품에서 얇은 보석을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자. 네 것이다.”
내 거? 갑자기 찾아와서?
떡돌이가 눈짓하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순식간에 마당 안에는 우리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나는 그가 건넨 보석을 유심히 살피며 편하게 물었다.
“내 거라니? 이게 왜 내 거야?”
의아해서 보니, 떡돌이가 ‘내 거’라면서 내민 건 그냥 보석이 아니라 새 무늬 보석이었다.
“예쁘다. 근데 내 거 아닌데.”
내가 감탄하자 떡돌이는 재차 한 번 더 말했다.
“네 거다.”
“내 거라니?”
나도 다시 되물었다. 그가 내 거라고 하지만…… 나한테 이런 게 있었던가?
“전에 네가 짐을 보러 왔을 때. 이걸 하고 있었잖아.”
이틀 전?
“아 그래? 이거 내 머리에 있던 장신구야? 근데 왜 네가 가지고 있어?”
“네가 떨어뜨리고 갔으니까. 그것도 부서진 걸.”
떡돌이는 ‘그것도 모르다니’ 하는 표정이긴 했으나, 타박하는 대신 그 장신구를 내 머리카락 사이에 달아주었다.
그러고는 흐뭇하게 웃는데, 마치 우리가 싸우기 전의 모습처럼 보여서 나도 좀 심장이 들썩거렸다.
떡돌이는 내 머리에서 움직이던 손을 내리고는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내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가 놓았다.
“네 머리 위에 무슨 장식이 있는지도 모르느냐.”
“장신구가 눈에 들어왔겠어? 난 그땐 너밖에 안 보고 있었는데?”
“!”
머리 위에 그가 달아둔 장신구에서 작은 방울들이 부딪치면서 ‘차르르’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게 신기해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웬일일까. 떡돌이가 돌아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러나 싶어서 마주 보고 있었더니 그가 뜻밖에도 작게 중얼거렸다.
“이젠 짐을 피하지 않는구나.”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폐하를 피한 게 아니라 폐하가 날 피한 거야.”
“그래. 짐이 피하려고 시도해 보았지. 네가 피해달라 했으니까.”
“난 면사만 쓰라 한 거지.”
“노력은 해 보았는데 자꾸 발길이 여기로 닿더라.”
떡돌이가 자꾸 내가 그를 밀어낸 것처럼 말하기에, 나는 사실관계를 계속해서 정정하고 짚어주다가, 그가 한 말을 듣고 말을 멈추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털어놓았다.
“이삼일에 한 번꼴로 이 부근까지 와서 널 보다 갔다.”
거짓말하기는. 매일 세 번 이상 왔으면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하는 모습에 코웃음이 났으나, 나는 그의 거짓말을 지적하는 대신 그가 머리에 꽂아준 장신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있자니 보석끼리 부딪히는 장신구 소리와 떡돌이의 목소리가 위와 앞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아직도 짐이 면사를 썼으면 좋겠느냐?”
그 말을 듣는데 괜히 손바닥이 가려워졌다. 그가 머리에 달아준 장신구에서 방울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안 보느니 그냥 보는 게 낫겠어.”
진심이었다. 아예 안 보면 모를까, 그가 얼굴을 보이지도 않으면서 근처만 맴도는 건 별로였으니까.
내 말에 떡돌이는 그럴 줄 알았단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여주었다.
* * *
“폐하가 나더러 봉호를 직접 정하래.”
늦은 밤. 잠들 준비를 하다가 내가 중얼거리자, 잠자리를 봐주던 두 궁녀가 동시에 “네?” 하고 외쳤다.
원웅은 이부자리를 빳빳하게 하다가, 부성은 따뜻한 물을 받아서 공기가 건조하지 않게 하다 말고서 황급히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봉호를 직접 정하라 하시다니요?”
뭐지. 이게 이렇게 호들갑을 떨 일인가?
“말 그대로. 내가 원하는 글자를 골라서 알려주면, 적당한 때 폐하가 직접 주는 걸로 발표해주겠대.”
그냥 천 귀인이 다른 귀인으로 바뀔 뿐인데. 두 사람은 그게 어마어마한 일이라도 된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그래서 ‘용’자를 달라고 하려고.”
이러면 멋지겠지.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 입들은 더욱 크게 벌어졌고, 이윽고 동시에 고함이 터졌다.
“안 돼요, 소주!”
“다른 거로 하세요!”
“왜?”
“그러면 정면으로 황후 마마께 선언하는 것 같잖아요. 그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요.”
“용은 황족을 나타내는 거니까 쉽게 사용하면 안 돼요, 소주.”
“그래? 그럼 다른 거로 골라보지 뭐.”
두 사람은 불안한 얼굴로 나를 보았으나, 내가 순순히 수긍하자 안도하더니 다시 서로 손을 맞잡고 좋아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나를 굉장히 총애한다, 후궁에게 봉호를 직접 정하게 해주는 황제는 없었다. 봉호를 주셨으니 곧 품계도 올려줄 거다, 이젠 고생할 일이 없다 등등 좋은 말로 가득했다.
듣기 좋은 말들이라 나도 뿌듯하게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더니, 원웅은 야식을 준비해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고 나는 부성과 둘이 남게 되었다.
부성은 눈을 빛내면서 반쯤 타들어 간 초를 갈았고, 나는 침상에 앉아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러고 있자니 전에 몹시 궁금했던 일. 하지만 때가 아니란 원웅의 말에 잠시 뒤로 미루었던 일. 그러고서 잊어버렸던 일이 떠올랐다.
전에 부성이 내가 아니라 우리 가문을 위하는 사람이란 걸 알았을 때. 원웅이 부성을 용서해 달라 청하면서 한 말이 있지.
천소여가 ‘일이 잘못되면 너와 나 모두 죽으니 조심해라’라고 당부하면서 부성에게 은밀히 지시한 일이 있다고.
원웅은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그 일을 자연스럽게 물으라 했다. 지금이라면 물어도 되지 않을까?
“부성아.”
“네, 소주. 창문은 닫을까요, 열까요?”
“닫자. 그리고 말이야, 내가 요즘 기억이 돌아올 듯 말 듯 하고 있어.”
“정말요? 잘됐어요, 소주!”
“다 돌아온 건 아냐. 근데 희미하게 기억나는 것 중에 좀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네? 당연하지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소주.”
“내가 너한테 은밀하고 중요한 일을 시킨 거 같은데. 그게 뭐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