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장공주의 무덤
결국 늦은 밤. 나는 떡돌이가 왜 저러는지 이유를 밝혀 보기로 했다.
물론 내가 먼저 거리를 두자고 하긴 했지. 하지만 너무 쉽게 받아들이니까 이상하잖아.
게다가 난 면사 쓰고 만나자고 했지 이렇게 피해 다니라곤 안 했는걸. 피하면 피했지 숨어서 쳐다보는 건 또 뭐야?
여기가 황궁이 아니라 무림이었고, 내가 천소여의 몸이 아니라 본래 천년비 몸으로 있었다면 암살자로 여기고 바로 해치웠을 거다.
“소주? 지금 나가시려고요?”
침상에 누워 잘 자던 내가 갑자기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옷을 입자, 당직인 원웅이 놀라서 물었다.
“응. 잠이 오지 않아서.”
“그러면 같이 가요, 소주. 귀자도…….”
“혼자 갈 거다.”
절대로 안 된다는 원웅에게 괜찮으니 여기 있으라 명령을 내리고서, 나는 슬그머니 처소 밖으로 빠져나간 다음 아까 떡돌이가 있던 곳에 가보았다.
그가 사라지는 걸 보고 왔기에, 떡돌이가 서 있던 자리에는 흙만 발자국 모양으로 깊게 눌려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발자국이 파일 정도면 여기에 오래 서 있던 건가.’
여기 서서 날 바라볼 정도면 그냥 오면 되지, 대체 왜 이래?
“…….”
하지만 깊게 팬 발자국을 보고 나니, 똑같이 나도 그를 쫓아간 다음 ‘왜 따라다녀?’ 하고 묻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이렇게 오랫동안 날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가까이 오지 않는 거라면, 뭔가 자기만의 생각이 있으니 그러겠지 싶어서.
그래. 이대로 떡돌이가 나한테서 거리를 두다 차츰 멀어진다고 해도…… 어쩌면 친구 사이보다 더 멀어진다고 해도. 어쩌겠어. 그게 그가 원하는 거라면.
* * *
“회임한 온 귀인을 습격한 사람은 멀쩡한데. 천 귀인에게 독을 먹이고 누명을 씌우려 한 우 귀인은 바로 처벌받다니. 대우가 차이 나는군요.”
“온 귀인을 습격한 범인은 모르니까 그런 거고. 천 귀인을 습격한 범인은 누군지 바로 알게 됐으니 그런 거지요.”
“어쨌든 궁의 실세는 천 귀인입니다. 천 귀인을 내내 적대하던 우 귀인이 순식간에 연금된 걸 봐요.”
“우 귀인이 아니라 우 답응이죠, 이제.”
“그래도 요즘은 폐하께서 천 귀인을 덜 찾는다던데.”
“독을 먹어 아프니 그러시겠지요. 그래도 꼬박꼬박 탕약을 보내고 잘 관리되나 신경 쓰신답니다.”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운월과 친한 관리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볍게 찔렀다.
“자네는 이제 날아갈 일만 남았구먼. 천 귀인이 이토록 총애를 독차지하다니.”
다른 동료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래. 천 귀인과 결탁한 관리는 자네밖에 없지 않나.”
“자네가 권력을 보고 멍청한 후궁과 손을 잡았느니 어쩌느니 한 놈들, 다들 배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겠구먼.”
친한 관리들은 천 귀인과 결탁한 일로 운월이 비웃음을 샀던 게 덩달아 분이 난 모양들이었다.
하지만 동료들의 부러움 반 뿌듯한 반 섞인 말에도 운월은 쉬이 웃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간 계속 천 귀인과 줄을 연결해 달라며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 골치라네.”
그러나 하소연을 하는 입꼬리는 분명 희미하게 올라가 있어서, 동료 관리들은 계속해 그를 놀려댔다.
* * *
“천 귀인, 오랜만이에요!”
“몸은 좀 어때요?”
“세상에. 얼굴 수척해진 거 좀 봐.”
“내가 진짜, 우 귀인이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
오늘 무슨 날인가. 기혈이 안정되었으니 이젠 문안에 가도 된단 궁의의 허락이 있었던 다음날.
원웅의 의견에 따라 연한 녹색 옷을 입고 수수한 차림으로 황후 문안을 왔더니, 후궁들이 죄다 내게 모여들어서 말을 건다.
아니, 웬일들이래? 평소에는 나를 못 본 척하더니?
“천 귀인, 독을 먹었다면서요? 괜찮아요?”
심지어 온 귀인까지도 다가와서 걱정스레 묻자, 나중에는 오히려 경계심이 들 정도였다.
저기요. 당신들 눈에 나 안 보이는 거 아니었나? 단체로 나 무시하기로 한 거 아냐?
혹시 단체로 날 속여먹나…… 싶어서 개시시를 보니, 그녀가 잘됐다는 듯 생긋 웃는다.
짜고 치는 속임수는 아니란 얘기. 그런데 왜 이렇게들 행동이 바뀌었을까.
고민하는 와중에도 후궁들은 나를 둘러싸고 우르르 방 안으로 데려가, 의자에 앉게 한 다음 온갖 이야기를 다 걸어댔다.
“왜들 그런 거 같아?”
돌아가는 길. 부성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서 묻자, 어렵지도 않다면서 쉽게 대답했다.
“우 귀인이 소주를 따돌리는 주동자였는데 이제 연금당했잖아요. 품계도 내려갔고요.”
“우 귀인이 주동자긴 했지만 다들 신이 나서 어울려댔잖아.”
“폐하께서 우리 소주를 제일 총애하는 걸 다들 공개적으로 알게 됐잖아요. 알음알음 짐작은 했지만 이번엔 대놓고 소주를 위하셨으니까요.”
“그런가?”
“네. 회임한 온 귀인보다 더 총애하시니, 소주와 척을 지고 싶지 않겠지요.”
부성은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게 된 상황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하게 웃었다.
“온 귀인이 설령 황자를 낳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선 안심하지 못할걸요?”
* * *
개원이는 몇 번씩이나 빠르게 답장하더니. 요즘은 통 편지를 보내지 않고 있다.
뭐. 사실 안 보내는 건지 개시시 쪽에서 ‘서신을 주고받는 횟수’를 조절하고자 안 전해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개원이에게서 오는 건 당과뿐이고, 황제는 황제대로 일이 바쁘다며 나뿐만 아니라 모든 후궁들을 찾아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 때문일까. 하루가 멀다고 나를 찾던 떡돌이가 이젠 날 찾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내가 가장 총애받는 후궁이라고들 했다.
‘먹을 걸 계속 보내오는 걸 보면 신경은 쓰는 거 같은데.’
게다가 부엌에 호위도 늘어서, 식재료가 오면 그게 어떤 것이든 그들이 꼭 확인하고서 들여보내 주게 됐지.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새 모든 나무에서 가을 향기가 물씬 풍기가 되었다.
하지만 떡돌이의 수려한 얼굴을 멀리해서 너무 그에게 끌리지 않도록 하려던 내 계획은 그리 효과가 없었다.
이유는 뻔하고 간단했다. 떡돌이가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내내 내 주위를 맴도니까.
차라리 평범하게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이전처럼 지낸다거나, 아예 사라진 것처럼 내 곁에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았을까.
이도 저도 아니게 내내 주위를 맴도니,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매일매일 얼굴을 볼 때마다 더 신경이 쓰였다.
사건은 그렇게 평화로우면서도 거슬리는 일상 가운데에서 일어났다.
* * *
개시시와 점심을 함께 먹은 다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놀고 있을 때였다.
“어제 양의억액의효과정을 다 읽었어요.”
“드디어 다 읽었군요!”
“너무 지루했어요.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사실…… 갈 때마다 보고 있어서, 저는 귀인이 그냥 책을 펼쳐만 놓고 있는 줄 알았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많이 편해졌는지, 농담을 던진 개시시가 까르르 웃는 동안.
나는 개원과 꼭 닮은 그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찻잔을 얼굴을 가릴 정도로 높게 들어 마셨다.
그런데 갑자기 헐레벌떡 개시시의 궁녀가 들어오더니, 나와 개시시를 번갈아 보다가 말하는 게 아닌가.
“소주, 천 귀인. 큰일 났습니다.”
개시시는 의아해서 물었다.
“큰일이라니?”
궁녀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내 눈치를 보았으나, 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닌지 결국 털어놓았다.
“장공주님의 무덤이요. 누가 무덤을 파헤쳤답니다!”
장공주라면…….
“화연 장공주?”
“네.”
전에 원웅이었나 부성한테 장공주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떡돌이의 누나인데, 떡돌이가 무척 따랐다고 했지.
장공주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고궐’이란 자 때문에 자결했고, 이 때문에 떡돌이가 자신을 감추는 사람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떡돌이가 장공주의 기일에 착잡해 하던 것도 떠오른다. 그런데 그 공주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어쩌다가?”
내 질문에 궁녀는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천 귀인. 하지만 발견 당시부터 이미 흙이 다 파헤쳐져 있었대요.”
그래. 어쩌다가 그랬는지가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폐하는? 폐하는 괜찮아?”
* * *
개시시의 궁녀는 자기가 듣기로 황제는 화가 나긴 했지만, 그뿐이라고 했다.
방금 죽은 누이도 아니고, 죽은 지 몇 해가 지난 누이이니 갑자기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진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나는 내내 떡돌이가 신경이 쓰였다.
떡돌이는 황제라서인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엉엉 울진 않지만 몇 해나 지났는데도 누이를 그리워하며 슬퍼했으니까.
고궐을 찾아서 죽여버릴 거란 각오도 중얼거렸고.
기일이 되어도 그 정도로 슬퍼했는데…… 아예 무덤이 파헤쳐진 지금은 기분이 괜찮을지 모르겠어.
하루가 지나자 나는 떡돌이의 상태가 더 걱정스러워졌다.
이전에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아도 주위를 빙빙 맴돈 떡돌이가, 장공주의 무덤이 파헤쳐지자 아예 나타나지 않게 되어서였다.
이틀 정도를 지켜보아도 그가 나타나지 않자, 결국 이번에는 내가 직접 그를 찾아가 상태를 보고 오기로 결심했다.
‘너무 안 아파하고 있는지만이라도 봐야겠어.’
떡돌이가 날 피할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가 나를 슬쩍 먼발치서 보고 갔듯, 나도 그를 슬쩍 먼발치서 보고 갈 테니.
* * *
마음을 먹은 뒤.
나는 산책을 하는 척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떡돌이가 회의가 끝나자마자 황제만 출입할 수 있는 후원에 틀어박혔단 걸 알아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그 후원으로 간 다음, 높고 높은 후원의 담벼락 너머로 떡돌이가 있을지를 찾아보았다.
‘있다.’
가만히 주의를 집중하고 있으려니 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위치를 확인하고 주위에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하자, 나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정원으로 돌아 이동한 다음 재빨리 담을 타고 넘었다.
‘경공 실력이 늘어서 다행이야.’
담을 빠르게 넘은 다음에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서 떡돌이가 어디 즈음에 있는지를 찾아냈다.
‘저기 있다!’
후원 안에는 긴 의자가 있었는데, 떡돌이는 그 위에 앉아있었다. 우수에 젖은 얼굴…….
역시 장공주 무덤이 파헤쳐져서 놀랐구나. 이틀이 지났는데, 그래도 놀라 있어.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 어두워진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등을 텅텅 두드리고 걱정하지 말라 위로하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랬다간 내가 몰래 담을 넘어 들어온 티가 나겠지.
그렇게 황제의 상태를 먼발치서 살피기를 한참.
아무리 지켜보아도 떡돌이가 아예 미동도 하지 않기에, 나는 떡돌이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렇게 봐봤자 내가 위로되지 않으니, 그냥 돌아갈 셈이었다.
그러나 다시 후원 담벼락을 넘어가기 전.
“반숙아.”
떡돌이가 무거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담 넘어갈 준비를 하다가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서 몸을 돌렸다.
‘언제 왔지?’
내내 시무룩하게 의자에 앉아있던 황제가 어느새 뒤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인기척이 없었는데?’
인기척을 살폈는데도 그가 온 줄도 몰랐던지라, 나는 놀라서 나오는 말을 아무것이나 뱉었다.
“폐하. 폐하가 왜 여기 있어?”
“짐이 묻고 싶은 거다. 여긴 짐의 후원이니까.”
떡돌이의 눈이 나와 그의 키를 합한 것보다도 두 배는 높은 담벼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