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반응하는 피
우 귀인이 비원에 대해 고자질하는 건 ‘너 죽고 나 죽자’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비원이 우 귀인의 의뢰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도, 우 귀인이 비원에 관해 쉬이 이야기를 꺼내진 못할 거라 여겼다.
그런데 황제에게 찾아와 저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뭔가 적당한 변명거리를 준비해서 왔나? 아니면 진짜로 아무 생각도 없이 찾아온 건가?
황제가 물었는데도 우 귀인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우 귀인은 도움을 간청하는 눈으로 함께 온 온 귀인만 쳐다보았다.
다행히 온 귀인은 그 눈빛을 받자마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말을 꺼냈다.
“염 귀인이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폐하.”
“염 귀인?”
염 귀인 이야기가 나오자 우 귀인이 순간적으로 온 귀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주 찰나였고 그녀는 곧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서 시선을 떨구고 대답했다.
“네, 폐하.”
염 귀인 이야기까지 하는 건 합의된 얘기가 아니었나 보다.
떡돌이 반응은 어떨까? 나는 힐긋 황제를 보았다.
하지만 그새 면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떡돌이도 죽은 염 귀인 이야기를 꺼내는 게 불쾌한 걸까? 일단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긴 한데…….
떡돌이가 조용히 있자 눈치가 보이는지 온 귀인과 우 귀인도 말을 멈추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권력이란 건 좋구나. 입만 다물어도 주위에서 눈치를 봐준다니.
“우 귀인.”
한참 만에야 떡돌이가 입을 열자 우 귀인과 온 귀인이 동시에 자세를 바로 했다.
“네, 폐하.”
“네가 말한 그 비원이란 자는 네가 짐에게 이 이야기를 했단 걸 아느냐?”
우 귀인은 재빨리 대답했다.
“모를 겁니다.”
맞다. 걔 모르고 있어. 하지만 내가 가서 말해주면 알게 되겠지!
“온 귀인과 황손을 위해 나선 것이니까요.”
“그자와 만날 약속을 ‘다시’ 잡거라.”
우 귀인은 “예.”하고 대답하다가 표정이 얼어붙어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 황제를 보았다.
“폐, 폐하?”
우 귀인은 더듬더듬 황제를 불렀다. 갑자기 왜 저래?
“왜, 제게 약속을 잡으라 하시는지…….”
아아. 저래서 당황했구나.
그래. 우 귀인은 자기가 비원과 계약했단 말은 꺼내지 않았지.
그런데 떡돌이는 우 귀인이 전에 비원과 계약한 걸 아는 것처럼 말했으니.
하지만 황제는 자기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우 귀인을 바라만 볼 뿐.
“…….”
그뿐인데도 우 귀인은 결국 “네.” 하고 아주 작게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였다.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약속 장소와 시간을 잡거든 짐에게 알리라. 함께 가겠다.”
“네, 폐하.”
* * *
“염 귀인이 아니라 우 귀인이 비원과 계약한 거란 건 어떻게 알았어?”
우 귀인이 나가고 발소리가 충분히 멀어진 걸 확인하자마자, 나는 떡돌이에게 물었다.
그는 태연히 붓에 먹물을 묻히면서 대답했다.
“염 귀인도 얽혀 있긴 할 거다. 어느 정도로 얽혀 있는진 모르겠지만.”
맞아. 염 귀인도 계약했을 거야. 염 귀인도 내 이름 파묻다 걸렸으니까.
하지만…… 와. 나야 이것저것 목격한 게 있어서 알지만, 떠돌이 쟤는 어떻게 아는 거야?
“하지만 우 귀인은 분명히 계약을 했지. 혜비가 얽혀 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그래서 우 귀인이 계약자란 건 어떻게 알았단 건데? 왜 들어도 이해가 안 가냐.
별개로 혜비가 비원과 관계가 있는 건 맞다.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우 귀인이 비원 관련해서 혜비를 만나는 건 봤지.
그때 종이에 무언가를 휘적휘적 쓴 떡돌이가 붓을 벼루에 내려놓더니 나를 보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하거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난 이런 건 들어도 잘 모르겠어.”
황제는 무식하다고 타박하는 대신 그저 웃더니, 다시 붓을 쥐었다.
그는 고요하게 손을 움직였지만…… 아마 머릿속을 엄청나게 굴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우 귀인이 오기 전에 나랑 나눈 대화를 다 까먹은 눈치니까.
나 역시 걱정된다. 나는 비원과 한패는 아니지만, 이래저래 밀접한 관계는 맞으니까.
비원이 잡히면 수사 도중 내 비밀이 까발려질 수도 있을까?
내가 ‘천소여’가 아니란 비밀이?
* * *
결국 떡돌이와 헤어지자마자 나는 비원을 찾아가 이 이야기를 전했다.
내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그를 이 상황에서 구해줄 수는 없지만, 말해두면 자구책이라도 찾겠지 싶어서.
비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더니 진지하게 인사했다.
“귀인께 또 신세를 지는군요. 감사합니다.”
“방법이 있어?”
“알아보아야지요.”
“무력으로 해결해……라고 하면 또 안 된다고 할 거지?”
“무력은 제일 마지막 수입니다. 제가 무림 세력이란 건 절대로 들키면 안 되니까요. 무력을 쓴다고 바로 들통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흔적을 아예 남기지 않는 게 좋지요.”
“왜? 왜 들키면 안 되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생각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우 귀인이 혜비 이야기도 꺼냈다니, 그쪽의 도움을 받아도 될 것 같고요.”
비원은 팔짱을 끼더니, 정말로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생각하려고?
어쨌든 이 이상은 내가 나설 일이 아닌 듯해서,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든 다음 돌아섰다.
“열심히 생각해 봐. 난 갈게.”
그런데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그가 곁으로 재빨리 다가오더니 내게 이상한 요구를 했다.
“귀인. 밤부터 아침 사이에 올라온 음식 말입니다. 귀인은 절대로 드시지 마세요.”
“왜?”
“하여튼 드시지 마세요.”
* * *
저런 말을 한단 건 음식에 해코지를 할 거란 뜻이지.
음식에 독을 섞든 이물질을 섞든, 하여튼 안 좋은 걸 섞을 거란 거다.
그게 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지만, 저런 말은 안 따르면 찝찝하기에 나는 처소로 돌아가자마자 배가 아프다고 방에 틀어박혔다.
“소주, 괜찮으세요?”
“궁의를 불러올까요, 소주?”
그 때문에 내 측근 궁녀들은 괜한 걱정을 하느라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그런데 웬걸. 저녁 식사를 할 때가 되니, 밖에서 아주 희미하게 음식 냄새가 풍겨오지 않는가.
내가 안 먹더라도 다른 사람들까지 굶을 수는 없으니, 다들 밖에서 식사를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음식 냄새를 맡으니까 속이 안 좋아. 근처에서 음식을 아예 안 만들었으면 좋겠어.”
비원이 다른 사람들까지 굶기란 말은 안 했지.
그렇지만 내 음식 재료에 이상한 게 들어갔는데, 다른 사람들 재료만 무사할 리는 없다.
비원과 우 귀인이 싸우는데 내 궁녀나 태감들이 불똥을 받게 하고 싶진 않기에, 그들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나는 같이 굶자고 우겼다.
“그럼요. 그렇게 전할게요.”
“저도 마침 속이 안 좋아서 굶고 싶었는데, 소주랑 같이 아파서 다행이에요.”
원웅과 부성은 둘 다 내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동참해주었다.
심지어 부성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미안해. 그렇다고 음식에 뭐가 섞였는지 모르는데 너희만 먹게 할 순 없잖아.
“응. 같이 굶자. 혼자 안 굶으니 마음이 편하네.”
“…….”
“…….”
어쨌든 이 고생이 효과가 있긴 했다.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밖이 어수선한가 싶더니 떡돌이가 다급히 찾아와서 물은 것이다.
“소여야. 괜찮으냐?”
“뭐가?”
“보자. 얼굴 좀 보자.”
떡돌이는 다짜고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더니, 자기를 보도록 얼굴을 들게 하고서 이리저리 내 얼굴을 좌우로 움직였다.
나중에는 이마에 손도 대어 보고 자기 이마도 대어 보고, 귀도 조물조물해보더니 안심해서 중얼거렸다.
“평소처럼 맹하구나. 다행이다. 멀쩡해 보여.”
“왜 그래?”
“뭐 먹은 게 있느냐? 배가 아프진 않아?”
아아. 내 처소 음식에 뭐가 들어갔단 걸 떡돌이가 알게 됐나 보다.
“아파. 근데 먹어서 아픈 게 아니라, 아파서 안 먹었어.”
“무슨 소리냐?”
“속이 안 좋길래 아무것도 안 먹었어. 음식 냄새도 맡기 싫어서 내 궁인들에게도 먹지 말라 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왜 그래?”하고 새침하게 물었다.
떡돌이는 “잠시.”하고 말하더니 방 밖으로 나가서 오 공공에게 지시했다.
“음식을 모두 가져가 살피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태감들은 곧장 부엌으로 달려갔고, 내 처소 궁인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달달 떨었다.
떡돌이는 직접 방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내 손을 잡아 긴 의자에 나란히 앉게 하고서 설명해주었다.
“우 귀인이 비원이란 자와 약속을 생각보다 빠르게 잡았다. 우 귀인은 그자를 만나러 가고, 짐은 그림자들을 함께 보낸 다음 뒤에서 따라갔지.”
“응.”
“한데 가보니 비원이란 자는 약속 장소에 없고, 대신 작은 서찰만 남아 있더라. 거기에 내용이…….”
떡돌이는 말을 하다 말고서 미간을 찡그리더니 다시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우 귀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천 귀인의 음식 안에 독을 섞어 두었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었어.”
“그래서 바로 달려온 거야?”
고개를 끄덕인 떡돌이는 손을 뻗더니 나를 자기 가슴에 넣고 꼭 안았다.
“놀랐다. 갑자기 네 이름이 튀어나와서.”
나도 놀랐다. 갑자기 떡돌이 가슴에 얼굴이 밀착하게 되어서.
물론 떡돌이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딱 달라붙게 되면 그의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으니까.
그에게서 먹물 냄새와 대나무 냄새, 난초 냄새가 마구 뒤섞여 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쩌면 떡돌이가 내가 독을 먹었을지도 모른단 말에 이렇게 헐레벌떡 달려와서 그럴 수도 있고.
떡돌이가 나를 첫 번째로 좋아하진 않아도 나름 좋아하긴 하나 봐.
“내가 독을 먹었을까 봐 걱정했어?”
“걱정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다시 머리를 들려 했지만, 떡돌이는 나를 안고서 내보내 주질 않았다.
“이거 참. 곤란하군.”
“짐이 널 걱정한 게 곤란할 일인가?”
앞으로 너랑 거리를 좀 두려 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딱 달라붙으니 원.
별개로 흐뭇하긴 하다. 싫은 사람을 걱정해주진 않을 테니까.
그러나 내가 떡돌이에게 내 이 심리에 대해 설명하기 전.
한발 먼저 오 공공이 들어와서는 내 처소에 있는 소금에서 독이 발견되었단 말을 전했다.
날 죽이는 게 목표가 아니니, 적당히 들여보내기 쉬운 데다가 독을 넣은 모양이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떡돌이는 화가 나는지 나를 품에서 놓아주고서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언제 온 건지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발을 구르던 우 귀인이 오 공공의 옆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외쳤다.
“억울합니다, 폐하. 이건 전부 천 귀인이 꾸민 일입니다!”
우 귀인은 고개를 들어 나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이까지 갈았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폐하? 음식에 독이 있는데 우연히 천 귀인과 천 귀인의 궁인들 모두 음식을 먹지 않았다니요!”
처음부터 다 듣고 있었구나. 황제가 올 때 같이 뛰어왔나 보네.
“비원이란 자가 굳이 제 이름을 언급한 쪽지를 놔둔 것도 이상하고, 천 귀인이 하필 음식을 안 먹은 것도 이상합니다. 천 귀인은 그날 저와 폐하의 대화를 모두 들었지 않습니까!”
심지어 주장하는 게 꽤 그럴듯하게 들린다.
장본인인 내 귀에도 우 귀인의 말이 제법 논리적이기에, 나는 전에 안비 앞에서 한 것처럼 기혈을 뒤틀어 피를 토해 버렸다.
“까악! 소주!”
“소주, 피! 피가!”
“소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