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앞으론 얼굴 보이지 마
“오늘은 당과를 가져오지 못했어요, 소주.”
원웅이 타준 홍차를 후 후 불면서 마시고 있을 때였다.
내무부에 갔던 부성이 금색 테를 둘러 장식한 초 두 개를 가지고 들어오며 툴툴거렸다.
“뭐? 왜?”
내심 당과를 기대하고 있던 터라 내가 홍차를 도로 내려놓으며 묻자, 부성은 초를 원웅에게 건네며 설명했다.
“개 답응의 궁녀에게서 당과를 받고 있는데, 갑자기 우 귀인이 황후 마마를 대동하고 오는 거예요.”
“갑자기 우 귀인? 황후 마마? 왜?”
“그러니까요. 오셔서 물으시더라고요. 그게 뭐냐고. 그래서 당과라고 했거든요. 근데 안 믿으시는 거예요.”
“왜 그랬지?”
당과를 당과라고 하는데 안 믿을 이유가 있나?
“모르겠어요. 소주 물건이라는 데도 막 수상한 거 아니냐 외치더니 결국 제가 들고 있던 당과 주머니를 낚아채 버렸는데……. 그때 당과가 우르르 다 쏟아졌어요.”
“아이구.”
아까워. 그 당과 진짜 맛있는 당과인데.
“그래서 우리 소주 당과 다 망가졌다고 어쩔 거냐고 하니까, 황후 마마가 우 귀인한테 화를 내시더라고요. 앞으로 우 귀인이 하는 말은 전부 거짓말로 여길 거라고요.”
어라.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여기서 황후 마마는 왜 우 귀인한테 화를 낸 거지?
“무슨 말일까?”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아 묻자, 원웅이 초를 들고 여기저기 등롱을 살피고 다니면서 대신 대답했다.
“우 귀인이 소주가 개 답응한테 이상한 물건을 받는다고 수군수군했겠죠 뭐.”
“그렇구나.”
일리가 있다.
“그럼 잘됐네.”
게다가 우 귀인이 그런 짓을 하다가 황후에게 찍힌 거라면 아주 잘된 일이었다.
손 안 대고 코 풀기 아닌가. 어차피 우 귀인은 날 싫어하니까.
“그쵸? 저…… 그런데 소주.”
“응?”
“어제 폐하와는 잘 화해하신 건가요?”
“화해?”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좀 걱정했어요.”
“난 화 안 났는데.”
“아. 폐하는 화가 나신 거 같아서요.”
떡돌이가? 아아. 내가 춤추는 걸 보고서 아주 잠시 오해를 하긴 했지. 자기가 안 오는 게 춤출 만큼 신나냐고.
하지만…….
“안 났을 거야 아마. 다른 데 더 신경 쓴다고 바빴거든.”
* * *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 사람들 죄다 날 비웃고 있는데!”
우 귀인이 외치는 소리가 너무 크자, 옆에서 쩔쩔매며 그녀를 달래던 궁녀는 초조하게 입가에 손을 대고 말렸다.
“소주. 소주. 제발 고정하세요, 소주. 누가 들을까 겁나요.”
“누가 들으면 뭐!”
그러나 평소에는 침착한 편이던 우 귀인은 지금 너무 화가 나 있었다.
궁녀가 달래는 말을 듣고 순순히 언성을 낮출 상황이 아니었다.
“어차피 다 내 얘길 하고 있는데 뭐!”
우 귀인은 버럭 고함을 지르고서 아직 뜨거운 물이 담겨 있는 찻잔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찻잔이 깨어지며 뜨거운 물방울이 튀자 궁녀는 얼른 옆으로 몸을 피했다.
“내가 천 귀인을 질투해서 온갖 누명을 씌우려 한다고 다들 수군거려. 그게 내 귀에까지 들려!”
“소주…… 다들 뭘 몰라서 그래요.”
“황후 마마는 이제 날 미워할 거야. 천 귀인이 찍혀 나가기 전에 내가 미움받게 생겼다고!”
“아니에요, 소주. 그럴 분이 아니신걸요.”
“그럴 분이야. 황후 마마는 차가운 분이라고!”
황후의 서늘한 시선을 떠올린 우 귀인은 흐느끼다가 이번에는 화살을 뜬금없이 비원에게로 돌렸다.
“비원 그놈, 쓸모라곤 하나도 없잖아? 내가 없애 달라 의뢰한 촉비도 천 귀인도 멀쩡해. 잘만 살아! 그런데 왜 나만 이 고생이지?”
궁녀는 분에 차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제 소주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다가가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소주. 소주께서 너무 정직하셔서 그래요. 그 사람들처럼 술수를 부리지 못하시니까요. 정직한 건 좋은 일이니, 소주가 화내시지 않아도 돼요.”
당연히 이런 다독임도 우 귀인에겐 통하지 않았다.
“비원 그자, 천 귀인과 촉비를 없애고 나비 모양 비녀를 놔두겠다더니. 나비 장신구는 엉뚱하게 온 귀인한테서…… 음?”
그러나 재차 언성을 높이려던 우 귀인은 뜻밖에도 혼자 조용해졌다.
말을 쉬지 않고 퍼붓던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고서 입을 다물자, 궁녀는 어리둥절해 물었다.
“소주? 왜 그러세요?”
“말하다 보니 이상해서.”
“?”
“전에 내가 비원에게 ‘그쪽이 천 귀인과 촉비를 공격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일로 둘이 무너지는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냐’고 물었지.”
“네.”
“그러니 그자가 그랬어. 자기가 한 일이면 나비 모양 비녀를 현장에 놔두겠다고.”
“저도 기억이 나요.”
궁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 귀인의 말에 동의하다가, 우 귀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 알아듣고서 “아!” 하고 탄식했다.
“온 귀인에게 온 피 묻은 머리카락이요! 거기에 꽂힌 게 나비 모양 장신구였어요, 소주!”
“그러니까! 세상에. 비원 그자. 다른 사람 의뢰를 받아서 온 귀인을 공격했나 보다!”
우 귀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놀라 외치자, 궁녀는 이번에는 겁이 나는지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어쩌죠? 황후 마마께 이 일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다행히 우 귀인도 서서히 이성을 찾았는지 목소리를 함께 낮추었다.
“그래, 황후 마마. 아니, 아니다. 황후 마마는 안 돼. 이젠 내 말은 안 들으실 거라 하셨잖아.”
그러나 궁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진 않았다.
“하지만 진짜라면 온 귀인이 위험해요, 소주.”
궁녀는 재차 걱정이 되어서 우 귀인에게 약간 조르는 목소리를 냈다.
온 귀인은 현재 우 귀인과 가장 절친한 사이였다.
궁궐에서는 자기 자신의 행실만큼 아군들의 행실도 중요했다.
자신이 아무리 잘 처신하더라도 손잡은 이가 잘못 행동하면, 덩달아 휩쓸려 평판이 나빠지는 일은 드물지도 않았다.
우 귀인은 회임한 온 귀인 덕에 그간 어깨를 꽤 펴고 지냈다.
그러니 온 귀인이 위험에 빠지면 우 귀인도 이후 뒷일이 좋지 못할 터.
온 귀인의 위협을 알게 되었으니 그들도 나서주어야 했다.
“그래. 두 번이나 친구를 잃을 수는 없지. ……이번엔 폐하께 말씀드려야겠다. 직접.”
“네!”
“그리고 먼저 온 귀인에게도 알려줘야겠어. 본인 일이니까.”
* * *
인정을 해야겠다. 나는 떡돌이의 얼굴을 조금 좋아한다.
아니, 사실은 조금보다 많이 좋아한다.
그가 미운 말을 하면 입을 찰싹 치고 싶지만, 그가 입을 다물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 금세 만족감이 차오른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떡돌이의 얼굴만 좋은데도 그가 온 귀인과 그 얼굴을 맞댈 생각을 하면 좀 기분이 이상해지는데.
내가 떡돌이의 얼굴 외에도 좋아하게 되면 어쩌지?
그러니까…….
“앞으론 내 앞에서도 얼굴 가리고 있어 줘.”
내 단호한 말과 위엄에 압도된 떡돌이가 교자를 집어 입가에 대주다 말고 눈살을 찡그렸다.
“갑자기 무슨 말이지? 당황스러운데.”
무슨 말이겠어? 말 그대로지.
“난 폐하를 네 번, 아니, 세 번째로 좋아하잖아.”
“네 번째?”
“세 번째.”
“처음에 분명 네 번째라 했는데. 중간에 말을 바꾸던데.”
“세 번째야. 지금은. 하지만 나중엔 네 번째가 될지도 몰라. 하여튼 이건 중요한 게 아니야.”
떡돌이가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하는 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에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아니, 짐에겐 중요한 문제 같다, 반숙아.”
떡돌이는 이상한 데 집요했다.
“반숙이라 하지 마.”
“너도 짐에게 멋대로 덕춘이니 떡돌이니 불러 놓고선 왜.”
“알았어. 그럼 반숙이라 불러.”
게다가 말하다 말고서 혼자 좋아서 웃기까지.
갑자기 왜 저렇게 좋아하는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반숙이 얘기는 정리가 된 눈치이기에 나는 다시 본론을 이어갔다.
“앞으론 얼굴을 가리고 웃어 줘. 난 폐하를 세 번째로만 좋아할 거고 이 이상 올릴 생각이 없거든. 근데 폐하 얼굴을 보면 그게 잘 안 돼.”
“좋아해야 하는 건지 서운해해야 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얼굴은 가려 줘.”
그게 결론이거든.
하지만 내가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는데도 떡돌이는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왜? 짐은 네가 짐을 좋아하면 좋은데, 왜 그래야 하지?”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잖아.”
“짐을 지금보다 더 좋아하면 마음이 불편해지느냐?”
“응. 폐하는 나 말고도 후궁들이 많으니까.”
숫자가 총 몇 명인지 모르겠으나 자주 보는 얼굴만 해도 수두룩한걸.
하지만 떡돌이는 내가 이렇게까지 풀어서 설명해 주었는데도 여전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는 입을 다물고서 말없이 교자를 내 입에 넣어주기만 하다가, 갑자기 성질이 났는지 마지막 교자는 입에 물었는데도 도로 빼내 가고서 항의했다.
“짐이 원해서 들인 후궁들이 아니다. 그리고 말했잖아. 짐이 동침하길 원하는 건 너뿐이라고. 네가 원한다면.”
이놈아 내 교자 내놔라. 그리고 뭐? 동침하길 원하는 게 나뿐이야?
“그 말 믿었는데. 거짓말이었잖아. 온 귀인이 회임했잖아.”
“!”
“아이를 가졌어. 아이가 태어나면 이쁠 거잖아.”
그리고 아이가 이쁘면 떡돌이는 이제 온 귀인을 좋아하게 되겠지.
“……신경 안 쓰는 거 같더니.”
안 쓰려 했지.
“근데 얼굴 보니까 신경이 좀 쓰여서. 그러니까 계속 신경 안 쓰게 앞으론 면사를 착용해줘.”
그럼 될 것 같다.
떡돌이의 저 고운 얼굴을 한 달, 아니, 보름 정도만 안 봐도 이런 기분이 사그라들지 않을까?
“좀 당황스러운데. 어제는 분위기가 좋았잖아.”
“분위기가 좋아서 위기감이 생겼어.”
그런데 내가 떡돌이를 다 설득하기 전. 난데없이 오 공공이 떡돌이의 책상 가까이 다가오더니 허리를 굽히며 보고했다.
“폐하. 우 귀인과 온 귀인께서 폐하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
우 귀인 이야기를 듣자 나도 반사적으로 고개가 밖으로 향했다.
내가 선 곳에서는 우 귀인이 잘 보이지도 않지만.
“바쁘다 하라.”
어쨌든 떡돌이는 거짓말로 대답했다. 사실은 교자나 먹고 있으면서.
그러나 평소라면 황제의 말에 바로바로 수긍할 오 공공은, 오늘은 나가는 대신 한 걸음 더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가 소곤거렸다.
“무척이나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하셔서요.”
“중한 일?”
“예.”
오 공공은 그 중한 일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는 눈치였는데도.
하지만 떡돌이는 그게 무엇이냐고 캐묻는 대신,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뜬금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왜 날 봐? 마음대로 해.”
대답을 기다리는 건가 싶어서 내 의견을 알려주자, 떡돌이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오원요에게 지시했다.
“들어오라 하라.”
“예, 폐하.”
그러고는 오 공공이 나가자마자 손가락으로 나를 딱 가리키면서 당부했다.
“우리 얘긴 이어서 하지. 얼굴 가리기. 여기까지 했다. 기억해 두어라.”
말을 마치자마자 우 귀인과 온 귀인이 아까 오 공공이 나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나를 본 우 귀인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떡돌이가 옆에 있어서인지 안타깝게도 오늘은 시비를 거는 대신 순순히 인사만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내 쪽을 향해서도 “천 귀인도 여기 있네요.”라고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긴 했다.
내가 화답을 하자마자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하지만 인사를 교묘히 무시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이다음에 그녀가 한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의뢰를 받아 궁궐 사람들을 공격해주는 ‘비원’이란 남자, ‘비원’을 만날 수 있게 주선해주는 그와 한패인 후궁 혜비, 온 귀인이 그들의 목표가 되었을 거란 추측 등등.
다행히 비원을 진짜 이름이 아니라 ‘소원을 돕는다’는 뜻에서 만든 가명이라 여기는 눈치지만…… 그걸 제외하면 전부 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신기하네. 자기도 얽혀 있으니 이 일은 절대 떡돌이한테 얘기하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어쨌든 보통 이야기는 아닌지라,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 말이 참이냐.”
“예, 폐하.”
당당하게 말하는 우 귀인은 정말로 자신이 가져온 정보에 확신이 있어 보였다.
떡돌이도 심각한 얼굴이고.
“한데 우 귀인.”
“예, 폐하.”
“너는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