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아이가 크면 셋이서 추겠지.
“온 귀인의 머리장식 반쪽이요! 누가 그걸 피에 젖은 머리카락에 꽂아서 가져다 뒀대요!”
원웅의 말에 부성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랬대?”
나도 원웅이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려서 좀 더 캐물었다.
원웅은 뒤늦게 빈 바구니를 발견하고 내려놓다가, 내 질문에 황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왜 그런지는 범인만 알겠지요, 소주. 확실한 건 좋은 의도는 아닐 거예요.”
“아, 소름 끼쳐.”
부성은 자신의 팔을 손으로 싹싹 쓸면서 치를 떨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무섭다는 듯이.
원웅은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부성을 쳐다보며 한 번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곧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누구 머리카락인진 모르겠지만 온 귀인이 그걸 보고 혼절했다니 문제가 커질 것 같아요.”
“혼절해서?”
천소여가 죽었다 깨어났을 땐 병문안 온 사람 한 명 없었는데. 혼절 정도가 큰 문제인가?
“네. 온 귀인은 회임했잖아요, 소주. 궁의가 달려와서 진맥해보고는, 태아가 많이 놀랐다며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한댔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벼루에 걸쳐놓은 붓을 쥐었다.
원웅도 펄쩍 뛰면서 들어온 것치고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서 도로 바구니를 들고 나갔다.
부성이 다시 이불을 털고 방 정리를 하는 사이.
나는 턱을 괴고 온 귀인의 장신구를 건드린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해보았다.
* * *
“괜찮아요?”
우 귀인이 머리맡에 의자를 가져다 앉고서 걱정스레 묻자, 온 귀인은 힘없이 물었다.
“폐하랑 태후 마마는요?”
“진맥하는 동안 돌아가셨어요.”
우 귀인은 한숨을 내쉬고서 온 귀인의 궁녀가 가져다준 따뜻한 수건을 대신 받아 온 귀인의 이마에 얹어 주었다.
“두 분 다 몹시 진노하셨어요. 아마 범인은 큰 벌을 받을 거예요.”
온 귀인은 이불을 꼭 감싸 쥐고서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단순히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이번 일로 크게 놀란 눈치였다.
우 귀인은 그런 온 귀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자신의 궁녀와 온 귀인의 궁녀에게 슬쩍 ‘자리를 비키라’고 눈짓을 보냈다.
두 궁녀가 인사를 올리고 나가자 온 귀인이 의아한 눈으로 우 귀인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우 귀인은 재차 문이 잘 닫혔는지를 뒤돌아 확인까지 하고는, 아무도 없단 확신이 들자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은 가요?”
“모르겠어요.”
온 귀인이 고개를 젓자 우 귀인이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럼 우리 천 귀인에게 덮어씌우면 어떨까요?”
* * *
“뭐? 내가 한 거 아니냐고요? 그럼 조사해 봐요.”
‘나는 온 귀인과 친하지 않으니 병문안을 가지 않겠다’고 주장했으나, 그러면 절대로 안 된다며 두 측근 궁녀가 풀쩍 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온 귀인의 처소로 찾아와야 했다.
그곳에는 나 말고도 다른 후궁들은 물론 태후 마마까지 모여 있었는데, 우 귀인은 내가 태후 마마에게 인사를 다 끝내자마자 바로 시비부터 걸었다.
‘천 귀인이 한 짓 아닌가요?’라고.
우 귀인이 저렇게 나오는 건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어서, 나는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나 아니에요. 근데 난 조사 받아도 상관없어요. 수사청에 한두 번 다닌 것도 아니고. 기몽 장군 얼굴도 오래간만에 보고. 좋네.”
“!”
“근데 아마 진범은 그동안 멀쩡히 온 귀인을 계속 공격할 거예요.”
온 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고 내가 거짓 범인이 될 시 일어날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해 주었다.
“아마 다음번엔 남 머리가 아니라 온 귀인 머리가 뽑힐지도 모르겠네요. 남 머리카락만 두 번 보낼 리가 없잖아요.”
온 귀인은 자기가 공격 목표가 된 상황이라 그런가.
평소와 달리 그래도 날 붙잡고 시비를 거는 대신, 우 귀인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우 귀인은 새로운 친구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은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반면 태후 마마는 이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고서 평소보다 한층 무뚝뚝하게 경고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이든 상관없다. 회임한 온 귀인을 공격한 건 귀하디귀한 첫 번째 황손을 해치려 한 거나 다름없으니. 누가 범인이든, 잡히면 품계를 내리고 냉궁에 보낼 것이니 그리들 알라.”
* * *
오늘은 개원이한테서도 편지가 안 오고 떡돌이도 시침에 안 부르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개원이 그놈의 편지를 기다렸다거나, 떡돌이가 시침 들라고 불러 놓고서는 맛있는 거 주길 기다렸단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 할 일도 없이 평상에 오도카니 앉아 있으려니 좀 심심하긴 해.
결국 혼자 방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심법을 따라 호흡하다가, 집중이 잘되지 않아 밖으로 나가 평상 위에 올라갔다.
거기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하늘을 보고 있자니, 원웅이 지붕에 달린 등롱 안에 불을 피우다가 깜짝 놀라 불렀다.
“소주? 거기서 뭐 하세요?”
“생각 중이야.”
원웅은 등롱에 불을 붙인 다음 성냥을 휘휘 저어 불을 끈 다음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온 귀인 때문에 그러세요?”
“아니, 온 귀인이 왜?”
“오늘 그 피 묻은 머리카락…….”
“아. 아니. 온 귀인 일은 나랑 상관없으니 관심 없어.”
내가 고개를 젓자 원웅은 “그럼요, 그럼요.” 하고 맞장구를 치다가, 다시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우세요?”
“폐하가 오늘은 시침에 안 부르길래. 이상해서.”
절대로 쓸쓸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내내 불렀고, 안 부르면 ‘오늘은 먼저 자라’거나 ‘먼저 먹어라’라고 꼭 사람을 보내서 알려 주었으니까.
갑자기 연락이 없으니 좀 궁금할 수도 있지.
원웅은 “아아. 폐하.”하고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재차 내 눈치를 살피며 밝게 말했다.
“온 귀인이 폐하의 첫 아이를 가졌잖아요. 그 아이가 오늘 위태로웠다니까 소주를 부르기 좀 곤란하실 거예요. 오늘은 온 귀인 처소에 가셨대요.”
“폐하는 온 귀인의 아이를 좋아할까?”
“어……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보통은 자기 자식은 다 예뻐하니까요. 게다가 온 귀인이 회임한 아이는 귀한 황손이기도 하시고요.”
문득 떡돌이가 아기를 안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아기는 아마 화려한 옷을 입고 있겠지. 황녀든 황자든, 나라에서 제일 귀한 아기니까. 아기도 아냐. 그 애는 아기님일 거야.
떡돌이를 닮았을까? 떡돌이를 닮으면 아기는 수묵화처럼 귀엽겠지.
아기 수묵화가 뭔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럴 거야.
아기가 온 귀인을 닮으면 어떨까.
떡돌이가 온 귀인 닮은 아기를 안고서 ‘아이구 내새끼, 아이구 내새끼’ 하고 노래를 부르면?
온 귀인은 그 옆에서 딸랑이를 들고 춤을 출 것이다.
아이가 크면 셋이서 추겠지.
셋이서 박자를 딱딱 맞춰서 춤을 추면 사람들은 금실이 좋은 부부이고 화목한 가정이라면서 찬양할 거야.
“그럼 나는 박수만 치게 될까?”
“예?”
“원웅아. 온 귀인이 아기를 낳으면 나는 박수를 쳐야 해?”
“예? 박수……는 안 쳐도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폐하가 춤을 출 건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예? 폐하는 왜 춤을 추시는데요?”
“온 귀인이 춤을 출 거니까.”
“예?”
“넌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 원웅아.”
“?”
전에 온 귀임이 회임을 했을 때는 떡돌이가 그냥 내게 사기를 쳤다고만 생각했다.
아무와도 시침하지 않았다더니. 온 귀인하고 아기는 잘만 만들었네! 하고.
이후 황제가 회임한 온 귀인의 편의를 봐준단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러려니 넘어갔다.
회임을 했으면 당연히 챙겨줘야 하니까.
그런데 온 귀인이 자기 머리카락도 아니고, 남의 머리카락을 보고 놀라 혼절했을 뿐인데 떡돌이가 놀라서 시름시름 앓고 있다니 조금 충격이었다.
떡돌이는 온 귀인이 회임해도 나만 총애한다고 했지.
이 말도 혹시 시간이 지나면 상하는 말이었나? 음식처럼?
떡돌이가 좋아하는 다른 여자가 있을 거라고, 가끔씩 의심이 들었다가 사그라들긴 반복하고 있는데.
이러면 나는 몇 번째로 밀려나는 거지?
황후, 좋아하는 다른 여자, 그다음이 나라 생각했는데.
이젠 황후, 좋아하는 여자, 온 귀인, 그다음 내가 되는 건가.
“소주?”
“무슨 상관이야. 나한테도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이다 뭐.”
두 번째는 흑합이라고! 떡돌이는 세 번째야!
하지만 내가 네 번째가 되면 떡돌이도 나한테 네 번째가 될 거다.
아직 그사이에 한 명은 없지만 조만간 만들 거야!
“춤도 나 혼자 추겠어! 원웅아, 무대를 만들어다오.”
* * *
“몸은 좀 괜찮으냐.”
황제의 위로에 온 귀인이 얼굴을 붉히고서 고개를 끄덕이자, 면사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다행이다. 앞으론 그런 걸 보고 혼절하고 그러지 말아라.”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가요.”
“그건 그렇지.”
황제가 순순히 수긍하자 온 귀인은 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이불을 끌어안았다.
황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주고서 몸을 돌렸다.
“폐하? 아…… 가시나요?”
황제가 오늘은 밤새 곁에 있어 줄 거라 여겼던 온 귀인이 놀라 부르자, 황제는 몸을 돌려 그녀를 보더니 다시 머리를 쓸어 주며 달래었다.
“짐은 일이 있어 가야 한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침상에서 편하게 자는 게 좋을 거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안심이 될 거예요, 폐하.”
온 귀인이 눈썹을 처연히 내리며 붙잡고 있으려니, 저 밖에서 태감들이 시간을 알리는 패를 치며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온 귀인의 손을 한 번 꼭 잡은 다음 내려놓으며 온 귀인의 궁녀들에게 지시했다.
“오늘은 교대로 불침번을 서지 않고 다 같이 온 귀인의 곁에 있어 주어라.”
온 귀인은 시무룩해서 황제를 서글프게 보았으나, 황제는 이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 * *
밖으로 나간 황제가 가마에 올라 이동하는 사이.
오원요는 말없이 곁을 따르다가, 주위에 황제의 측근들만 남고 지나다니는 이들이 없자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폐하. 천 귀인께 사람을 보내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사람을 보내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황제가 돌아보자, 오원요는 황제의 측근 태감인 자신이 이런 일에 나서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과할 정도로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을 만들며 대답했다.
“늘 일이 있을 땐 태감을 보내어 먼저 잠들라 전하셨지 않습니까. 오늘도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 말에 황제는 잠시 고개를 돌려 동영궁이 있는 방향을 보았고, 황제의 태감들은 눈치껏 가마를 멈추었다.
“…….”
황제가 말없이 그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오원요가 다시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면사로 가린 얼굴에서 드러난 곳이라곤 입뿐이었으나, 오원요는 그 상태로도 황제의 분위기를 읽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어두운 듯하던 황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어딘가 맺힌 게 있는 목소리였다.
“반숙이가 날 기다릴 리가 있겠느냐. 보나 마나 베개 끌어안고 침상이 넓다고 신나서 자려 들겠지.”
“물론…… 그러실 수도 있지만 기다리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천 귀인은 언제 계란이에서 반숙이가 되신 건지. 오원요가 승언을 쳐다보았고 승언은 자기도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두 측근은 다시 황제를 살폈다.
얼마 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황제가 손가락으로 동영궁을 가리켰다.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