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어쨌든 은인이 되었다
천년비가 황제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방 안을 도망 다니는 사이.
천 귀인의 처소에서 물러난 병사들은 같은 동영궁을 쓰는 규빈의 처소로 찾아갔고, 달아난 비원은 그림자로 추정되는 다리 다친 태감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발에 돌로 얻어맞은 상처가 있는 것부터, 정확히 천 귀인이 말한 범인과 행색이 일치했다.
그러나 태감은 비원이 촉비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치를 떨면서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촉비 마마의 물건이라면 이미 마마께 다 돌려드렸소!”
“돌려줬다고?”
“그러니 난 이 일과 관련 없소. 이 일에선 손을 뗀 거요. 날 귀찮게 하지 마시오.”
딱 잘라 말하는 태감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 * *
“그래서 결론이 뭐야?”
“제가 몰래 떨어드리고 왔던 촉비의 물건도 사라졌고. 촉비 물건을 훔쳐 갔던 태감은 갑자기 촉비에게서 손을 떼겠다며 무서워하는 모양이고. 귀인께서는 폐하께 촉비의 필첩에 대해 말을 올렸는데, 폐하가 그 일을 묻었다 했지요?”
“어.”
“그럼 제 생각엔 이렇습니다.”
“?”
“촉비가 그림자와 결탁한 거요. 어쩌면 황제가 알면서 눈감아준 걸지도 모릅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와서는 하는 말이 이게 뭐래?
내가 젓가락을 물고서 쳐다보자, 비원은 계속 먹으라고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쩌며 아예 모든 게 황제의 계산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일 수도 있겠지요.”
비원은 나더러 다시 음식을 먹으라 했지만,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밥알이 목구멍에 넘어갈 리가 없다.
아니, 넘어가긴 하는데 맛이 느껴질 리가 없다.
뭐야. 그러면 떡돌이…… 나한테 운월을 주선했듯 촉비에게도 그림자를 주선해 준 건가?
이미 전적이 있으니 가능하긴 한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뭐 어쩌겠습니까. 촉비가 그림자와 손잡은 게 폐하가 눈감아 준 일이라면 이걸로 촉비를 무너뜨릴 순 없는 거지요.”
“촉비가 안 무너지면 큰일 나는 거 아냐? 그 사람이 널 공격할 거라며.”
“그렇지요.”
비원은 하나도 걱정이 안 된단 얼굴로 몹시 걱정되는 척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이해가 가지 않아서, 나는 일단 먹던 걸 마저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다음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왜 이렇게 어렵게 가? 촉비가 널 공격할까 봐 무서우면 너 잘하는 저주 해. 너 그거 특기잖아.”
하지만 비원은 자기 특기가 마음에 안 드나.
내 생각엔 나름대로 희소성 있는 특기 같은데, 그 말을 듣자마자 질색했다.
“그게 왜 내 특깁니까? 난 저주 같은 거 할 줄 모릅니다.”
“잘하던데.”
“아니라니까요?”
“……뭐 그러면 그렇다 치고. 그럼 협박해.”
“협박이라니요?”
“촉비 방에 길쭉한 병이 하나는 있을 거 아냐. 그거 목을 부러뜨린 다음 옆에 쪽지를 남겨 놔. 나를 노린다면 다음엔 병 모가지가 아니라 네 모가지가 부러진다. 이러면 돼.”
하지만 비원은 내 말을 듣자마자 펄쩍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그걸 오히려 자기가 협박받는단 증거로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면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닐 수도 있고. 어쨌든…….
“넌 생각만 하다 아무것도 못 하겠다.”
“생각 없이 살다가 아무것도 못 하게 된 분이 제 앞에 있는 분 아닙니까.”
“날 동경한다며?”
“제 환상이요? 박살난 지 오랩니다. 조각이나마 끌어안고 있어 보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요.”
치를 떤 비원은 다시 손을 마구 허공에 대고 털었다.
“귀인 말을 듣고 있다 보면 휩쓸리게 됩니다. 휩쓸려서 정말 뒷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일을 벌일까 무서워요.”
“그러면 되잖아?”
“예, 근데 보통 사람들은 후환이란 걸 생각하거든요.”
이쯤 되니 조언해주기 싫어졌다. 그래도 나는 나름 머리를 굴린다고 굴린 건데.
타천천은 내가 후궁이 되면 삶의 의욕이 없어질 걸 염려하기라도 했나? 왜 도와줄 사람이 아니라 도와야 할 사람을 보냈대?
그런데 뭐야. 딱따구리처럼 말하고서 돌아서던 비원이 막상 떠나진 않고서 괜히 머뭇거렸다.
뭐하나 싶어서 쳐다보자, 그는 주저하다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흠흠. 중간중간 열 받는소리를 섞긴 했지만. 그래도 이야기도 들어주고 의견도 모아줘서 고맙습니다.”
“병 모가지 하기로 한 거야?”
“아뇨, 의견을 받아들인단 뜻은 아닙니다. 그냥…… 귀인은 제가 생각한 고독한 늑대는 아니지만요.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은 분 같다고요.”
날 이상하게 보다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진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순순히 고맙다고 하자 괜히 갈비뼈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나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옛 성인 같은 표정으로 비원을 바라보았다.
“…….”
비원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감동 받았는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어때?”
“왜가리 같네요. 자세가요.”
“!”
“어쨌든 이번에 도움받은 건 나중에 꼭 갚을 테니 염려 마시지요.”
* * *
비원이 사라진 후, 혼자서 밥을 먹고 있으려니 원웅이 “소주!” 하고 밝게 부르면서 들어와 물었다.
“식사는 다 하셨어요?”
대답 대신 나는 아까 비원에게 보여준 자세를 한 다음 왜가리 같냐고 물어보았다.
원웅은 한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고서 감탄했다.
“소주는 재주가 많으시네요! 정말 닮았어요!”
“…….”
그러고도 모자라 엄지를 치켜세워 주기에 나는 자세를 푼 다음 입맛이 사라졌다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말을 하고 보니 이미 밥 한 공기를 다 비운 상태였지만, 점잖게 시선을 돌려 그 사실은 모른 척했다.
이후 원웅이 상을 치우자 나는 다시 방 안에 혼자 남아 가부좌를 틀었다.
아까는 비원과 티격태격하느라 황제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홀로 남게 되니 황제 생각이 나서…….
촉비에게 그림자를 이어준 게 황제라면, 그는 참 계산적인 사람이야.
계산적인 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머리가 똑똑한 거지.
하지만 계산적인 사람은 무림 악적인 나를 곁에 두지도 않겠지? 똑똑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게 좀 서글펐다.
“…….”
하긴. 생각해보니 뭐 어때. 떡돌이는 내가 무림 악적이었단 걸 모르잖아.
한 번 교묘하게 나를 떠보려 했지만 나는 그 함정을 바로 눈치채고 피했으니까.
그러면 됐지. 암! 떡돌이는 내가 무림에서 악명을 떨쳤단 사실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다.
아무리 계산적인 떡돌이라도 모르는 일을 가지고 판단을 내릴 순 없지.
‘좋아. 서글픈 마음이 좀 가신다!’
좋은 생각을 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나는 얼른 가부좌를 풀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개원이가 개시시를 통해서 당과를 보내주었지.
내 복수를 위해서는 아니꼬워도 이놈과 절대 연락이 끊어지면 안 되니, 얼른 고맙다고 답서를 써야겠다.
‘보자. 뭐라고 쓴다…….’
* * *
소협께.
당과를 보내줘서 고마워요. 맛있게 잘 먹었어요.
소협은 후궁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요, 후궁 생활을 하고 있으면 당과가 당길 때가 있거든요.
후궁이란 건 참 격식이 중요한 자리여서요, 당과가 먹고 싶다고 아무 때나 가져다 먹고 그럴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소협이 보내준 당과는요, 내가 방 안에서 궁녀들이랑만 살짝 나눠 먹었어요.
사실 혼자 먹고 싶었지만 체통을 차리기 위해서는 그럴 수 없었어요. 생각해봐요. 윗사람이 혼자서 쪽쪽 당과를 빨아먹고 있으면 위엄이 없잖아요.
-추가-
다음에도 또 당과 보내주길 바랍니다.
소협이 내게 당과를 보내준다면 나는 소협에게 미소를 보내주겠어요.
소협은 못 보겠지만 나는 방금 허공을 향해 미소를 쐈답니다.
꿈에서 보세요.
-당과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아무개가
* * *
귀인께
귀인께서 보내주신 미소는 안타깝게도 수신하지 못하였습니다.
너무 화사해 햇살에 스며들었나 봅니다.
그 미소는 다음에 직접 절 보고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당과를 궁녀들과 함께 나누어 드셨다니, 귀인께서는 참으로 너그러우시군요.
당과는 인편으로 이 서신과 함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양을 넉넉히 하였으니 또 마음껏 드시길 바랍니다.
-당과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아무개를 떠올리며 행복한 소협이
* * *
소협.
당과 몇 개 넣으셨는지? 개수가 줄었소?
-당과를 받고 놀란 이무기가
* * *
귀인.
화나면 이무기고, 안 날 땐 아무개인 겁니까?
한꺼번에 많이 보내면 상할까 봐 마음만큼 많이 보내진 못하였지만, 그래도 넉넉히 보냈습니다.
열 개를 보냈는데…… 개수가 줄었을 리 없는데, 몇 개를 받으셨습니까?
-이무기에게 겁이 난 소협이
* * *
소협.
인편을 바꾸도록 하시오. 중간에 당과를 빼어 먹는 이가 있네.
내가 받은 건 두 개였습니다.
궁녀들 하나씩 주고 나는 냄새만 맡았어요.
-아직 이무기
* * *
귀인.
배가 고프실 텐데도 당과를 모두 궁녀들에게 주시다니.
귀인의 마음 씀씀이에 제 마음까지 달아집니다.
인편은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시시가 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시시도 당과를 좋아하거든요.
함부로 사람을 의심할 수 없으니 먼저 시시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시시는 제가 자기에게 보내는 거라 생각해 먹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귀인. 제가 후궁 생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그런데, 괜찮으시다면 서신을 보내주실 적에 후궁들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혹시 그곳에는 귀인만큼 특별한 후궁들이 많은지요?
-궁중 생활이 궁금한 무림인이
* * *
개원이가 수도에 와 있나 보네.
처음 서신을 보냈을 땐 답장 오는 속도가 느리더니, 점점 빨라지는 걸 보면 확실하다.
게다가 답서를 주고받는 빈도가 늘어나서인가.
개시시의 궁녀가 부성에게 이번 답서를 주면서, 앞으로는 서신을 전해주는 속도를 조금 느리게 하겠다고 했다.
개시시의 가문은 후궁들 중에선 한미한 편이고 개원이도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보니 다른 사람들만큼 눈치를 보진 않지만, 그래도 너무 자주 연락을 주고받다 보니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들은 눈치였다고.
그 말을 하면서 부성은 내 눈치를 이상하게 살폈는데, 내가 아무렇지 않게 “그러지 뭐.”라고 말하자 안심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나 싶어 쳐다보자, 부성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당과를 자주 먹진 못하게 됐네요.”
당과를 생각하는 얼굴이 아닌데?
‘혹시 너무 자주 연락을 주고받아서, 개원이 날 연모한단 걸 부성도 알게 된 건가?’
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확실히. 연락하는 횟수를 줄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복수를 위해서 연락을 계속 주고받아야 하지만, 복수하기 전에 오해부터 사면 안 되니 말이다.
그런데 적당히 대화를 마치고서 하품을 하고 침상에 엎어져 누워 있으려니,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럽게 달리는 소리가 났다.
뭔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얼마 가지 않아 원웅이 한 팔에 빈 바구니를 끼고 헐레벌떡 들어와 외쳤다.
“소주, 소주, 지금 난리 났어요. 온 귀인이요!”
“온 귀인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