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네 죄를 사하노라
비원은 자기 머리를 부여잡고서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안 그러면 내가 정말로 자기 머리통을 똑 뗄까 봐 염려된단 듯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대체 어쩌잔 거야?”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기는요! 선택지라고 준 건 머리통 떼잔 것밖에 없잖아요!”
다른 건 생각이 안 난다고, 너도 생각이 안 나서 이러는 거 아니냐고 항의하려는데 다시 한번 밖에서 “천 귀인!”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비원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나도 좀 곤란해졌다.
한밤중에 한림원 학사를 침실에 들였단 게 알려지면, 다들 ‘천 귀인이 무식해서 똑똑한 사람을 가까이한다’고 수군거릴 텐데. 별로 듣고 싶은 소리가 아닌걸!
“귀인, 들어가겠습니다!”
밖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비원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말했다.
“잠깐만 시선을 끌어줘요. 문에서. 그러면 제가 창문으로 도망가겠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대답할 틈도 없이 황급히 경공을 펼쳐 그 앞으로 뛰어가 문을 쾅 닫았다.
“내 손!”
너무 빠르게 닫는 바람에 문을 열던 사람의 손이 끼인 것 같았지만, 내 손이 아니기에 괜찮았다.
힐긋 뒤를 돌아보니 비원은 창문을 연 다음 약간 떨어진 곳의 병풍 뒤에 쪼그려 바깥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밖에 사람들이 있는 터라 바로 나가진 못하고, 내가 시선을 끌어주길 기다리는 눈치.
“귀인!”
하지만 다시 밖에서 버럭 호통 소리가 들려오며 누군가 힘을 주어 문을 떠밀었기에, 나는 비원을 보길 멈추고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문이 열리며 우락부락하게 생긴 무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을 좀 살피겠습니다!”
게다가 이 무관. 아무래도 아까 ‘내 손!’하고 고함 지른 무관인가 보다.
얼굴이 시뻘게진 그는 몹시 화가 난 눈치였는데, 온몸으로 ‘네가 수상한 자를 숨기고 있지?’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맞는 말이어서 당당하게 내부를 보여주기 힘들다.
나는 “마음대로 봐라!”라고 하는 대신 손을 뻗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감히 황제가 총애하는 후궁을 밀치긴 어려운지, 무관은 얼굴이 익은 당근처럼 변했으나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항의했다.
“비켜주십시오 귀인. 떳떳하다면 말이지요.”
“뭐가 말인가.”
“이쪽으로 수상한 자가 숨어들어오는 걸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아닌데.”
“제 눈으로 보았다니까요!”
“난 못 봤네.”
“제가 보았다고요!”
“자네는 내가 아니잖는가.”
“귀인!”
“응. 듣고 있어.”
안으로 못 들어가게 했더니 무관의 얼굴이 이젠 썩은 당근처럼 변했다.
하지만 아직 비원이 이 안에 있어. 느껴진다. 병풍 뒤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토끼 한 마리가.
젠장.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저 무관이 여기에 못 들어오게 하는 건 힘든 일이 아니야.
그냥 막고 서서 아무 말이나 하면 되니까. 저 무관은 어쨌든 날 밀치고 들어오진 못하잖아?
하지만 여기서 계속 막아서고 있으면 누가 봐도 수상하다고. ‘난 수상해요. 나부터 수사해요.’랑 다른 말이 뭐야?
그러면 저 무관은 나중엔 자기보다 직급 높은 사람을 데려오겠지.
그때쯤 되면 나는 진위를 떠나 진짜 수상한 사람이 되어 있을 테고.
게다가 저 무관만 가로막는다고 해서 비원이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원은 ‘시간을 끌어줘요’가 아니라 ‘시선을 끌어줘요.’라고 했다.
이 문 앞에 선 무관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여기로 잡아야 하는 거다.
그래야 비원이 달아날 수 있으니.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전에 안비가 나한테 차에 뭘 타서 준 적이 있지. 그때처럼 피를 쏟으면?’
……아니야. 안 된다. 그땐 안비에게 뭘 건네받고서 피를 뿜었으니 다들 안비 탓을 했지.
심지어 안비 스스로도 내가 일부러 피를 쏟은 건 모르잖아.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피를 또 쏟으면 마음먹은 대로 토혈할 수 있단 게 알려질지도 몰라.
그걸 알진 못하더라도 스스로 이상한 걸 마셨다고 여기겠지. 지금은 내가 너무 궁지에 몰린 상황이니까.
그렇다면……!
“이건 내가 떳떳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닐세. 난데없이 자는데 찾아와서 방 안에 들여보내 달라니. 누구라도 싫을 문제 아닌가. 내가 자네 자는데 갑자기 찾아오면 무슨 기분이겠는가? 물론 뒤에는 폐하를 대동하고.”
나는 일부러 떡돌이 이름까지 꺼내면서 말을 쏘아붙이는 동시에, 넓은 소맷자락 안쪽에 숨겨둔 아주 작은 비수를 일부러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비수가 땅에 부딪혀 ‘탕’ 하는 소리를 내기 전. 그걸 무관의 다리 사이로 내공을 실어 빠르게 걷어찼다. 목표물은…….
“악!”
누군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무관과 함께 온 병사 하나.
뒤에 선 병사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발을 부여잡자, 무관은 나를 험악하게 노려보길 멈추고 휙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냐!”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 병사에게 달려가는 게 보였다.
그 사이, 병풍 뒤에 숨은 토끼는 창문을 향해 빠르게 뛰어들었다.
“누군가 비수를 던졌습니다!”
무관은 도끼눈을 뜨고 부하에게 달려가며 화를 냈다.
“감히 누가!”
“상처 난 방향으로 치면 문장님 계신 방향에서…….”
“뭐야?”
“교묘하게 휘어서 던진 게 분명합니다. 문장님을 놀리기 위해서요!”
비수가 발목에 꽂힌 병사가 끙끙대는 사이. 무관은 다시 내게로 다가와서는 한 대 칠 기세로 씩씩거렸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정말로 상사까지 죄다 불러와 일을 키울 기세라, 이제 걸리는 게 없어진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섰다.
“안 보여주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군. 이렇게 됐으니 다리 다친 병사를 봐서라도 방을 보게 해주지.”
무관은 고맙단 말을 생략하고서 내 침실을 멋대로 돌아다녔다.
침상 아래를 보고, 두세 살 아기 정도가 가까스로 들어갈 만한 공간을 살피고, 옷장 문을 열었다.
“거기 옷 건드리지 마세요! 다 정리한 거예요!”
“탕 탕 소리 내면서 닫지 마세요, 폐하께서 주신 거예요!”
원웅과 부성은 그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화를 냈지만, 공무를 수행하러 온 화난 관리를 돌려보내긴 어려운 일이었다.
귀자는…… 떡돌이한테 가는 건가. 슬쩍 뒤로 빠져서 다른 곳에 가네.
어쨌든 비원이 사라진 방 안을 아무리 뒤져 봐야 무기가 나올 일은 없었다.
결국, 무관은 서랍장 뒤지기를 멈추고서 나를 노려보다 마지막이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불 안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연극을 너무 많이 봤나 봐. 이 와중에 이불 안을 보고 싶다니.”
“그게 무슨…….”
“저 이불을 들치면 안에 벌거벗은 수상한 남자가 있을 거란 기대라도 하는가?”
“!”
내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고서 노골적으로 쏘아보자 무관도 이건 조금 눈치가 보이는 듯했다.
“뒤져. 뒤져.”
그러다 내가 손을 휘휘 저으며 빈정거리는 말투로 허락하자, 무관은 고개를 꾸벅하고서 이불을 확 들쳤다.
당연하겠지만 안에 있는 건 내가 끌어안고 뒹구는 베개뿐이었다.
“…….”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온 건지, 무관은 이불을 내려놓고 내게 다시 꾸벅 인사했다.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귀인.”
“폐하껜 다 말할 거라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그는 표정을 움찔했지만 무서워하지 않고 되레 당당하게 나왔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폐하께선 해야 할 일을 한 관리에게 벌을 줄 군주가 아니시고요.”
“그럼 부담 가지지 않고 말하겠네.”
“폐하께서 제가 할 일을 했단 이유만으로 절 벌하신다면, 누가 폐하의 총기를 어둡게 하고 있는지 모든 궁인이 알게 되겠지요.”
이게 무관이야 너구리야?
황제가 내 말을 듣고 자기를 벌한다면 내가 황제를 손에 넣고 휘두르는 후궁이 되는 거라 말하는 거 맞지, 지금?
그 순간.
“짐의 후궁이 짐의 총기를 어지럽히는진 모르겠으나, 네가 짐의 후궁의 입을 막으려 드는 건 알겠구나.”
옆쪽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무관도 놀라서 창문 쪽을 보았다. 창문 뒤에 면사를 단 고급스러운 백립으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 서 있었다.
시선을 받자 백립을 벗는데, 드러난 사람은 한 겹 더 얼굴을 가린 황제였다.
무관은 눈이 커다래졌고 나도 좀 놀랐다. 아니, 쟤는 언제 온 거야?
게다가 우리야 방 안에 있는데다 주위에 원체 사람이 많아서 몰랐다 쳐도.
황제 주위에 선 사람들은 왜 같이 놀라고 있어? 옆에 있으면서 자기들도 몰랐던 거야?
놀라 서 있자니, 창밖 사람들 틈에 귀자가 보인다.
아까 무관이 내 방에 들어올 때 슬그머니 뒤로 빠지더니. 떡돌이 불러오려 그랬구나!
그토록 서러워하던 원웅과 부성은 황제가 나타나자 사막에서 물줄기를 발견한 여행자들처럼 기뻐했다.
무관은 뒤늦게 무릎을 꿇었다.
“폐하. 오해이십니다.”
“짐의 후궁이 하는 말을 듣고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짐의 일이다. 짐의 신하인 네가, 내 아내가 남편인 짐에게 하려는 말을 막는 건 월권이다.”
“폐하, 신은…….”
“천 귀인의 입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면 짐이 귀인을 달랬을 터인데. 귀인의 입을 막으려 들다니 그게 괘씸하다.”
무관의 어깨가 떨렸으나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떡돌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엔 채신머리없이 굴다가 내게 허벅지를 찰싹찰싹 맞는 떡돌이는 없었다.
우리 떡돌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러는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해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황제가 내게 눈짓을 한다.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못 알아듣겠어’란 신호로 고개를 젓자, 그가 이번에는 아주 빠르게 머리를 움직였다.
어, 근데 진짜 못 알아듣겠어.
결국 덩달아 고개를 젓다가 보니, 뭐야.
다들 입을 벌리고 나와 떡돌이가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는 걸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던데, 부부면서 말도 안 통한다고 여기나, 생각하는 순간.
“어쩔 수 없지.”
황제가 차갑게 말하더니 무관을 향해 지시했다.
“짐의 후궁이 자네를 탓하지 말라고 자꾸 고개를 젓는군. 이번에만 그 무례함을 눈감아 줄 테니, 천 귀인에게 사죄와 감사를 하고 앞으론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어?
아니, 아닌데?
난 용서하라고 고개 저은 거 아닌데,
아니, 떡돌이 쟤는 왜 남의 고갯짓을 멋대로 해석해서 판단하는 거야?
나는 황당해서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그보다 한발 먼저 무관이 벌떡 일어서다가 ‘쾅’ 소리가 나도록 날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귀인! 미신이 귀인의 넓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례를 저질렀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얼얼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는 무관에게는 이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기색도 없었다.
정말로 내가 황제를 설득해 자기를 용서했다고 여기는 듯 오히려 감동 받은 목소리.
게다가 주위 병사들, 심지어 내 궁녀들까지도 나를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 표정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대인을 보는 듯하다.
‘난 자네 용서하라 한 적 없어’라고 말하면 소인배가 될 상황.
이렇게 되고 보니 실제로 비원이 내 방에 왔던 게 떠올라 조금 양심이 뜨끔거린다.
결국 나는 근엄한 척 뒷짐을 지고 장군의 머리를 짚으며 용서해주었다.
“네 죄를 사하노라.”
* * *
“네가 판관이냐? 그 상황에서 말을 그렇게 하면 어찌하느냐!”
“다들 감동 받아서 고개를 숙였잖아.”
“말은 바로 해야지. 웃음을 참으려 고개를 숙인 거다.”
“아니야.”
“평판을 바꿀 밥상을 차려줬는데 떠먹지도 못하다니. 넌 이제 계란이가 아니다. 반숙이다 반숙이.”
장군과 병사 무리가 돌아가고 둘만 남게 되자마자, 아내를 챙기던 남편은 사라지고 잔소리 떡귀신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