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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10화 (110/283)

##  110화. 왜 여기로 오는데!

눈을 만져보라기에 안구가 금강불괴인 줄 알았더니. 떡돌이는 자기 눈을 감싸 쥐고서 괴로워서 몸을 떨었다.

“귀인! 눈을 찌르면 어떡합니까!”

오 공공은 내가 떡돌이 눈알을 빼서 콕 찌른 다음 도로 집어 넣기라도 한 양 호통을 치고서, 떡돌이 앞으로 다가가 ‘후 후’ 눈을 불어주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떡돌이는 한참 만에야 자기 눈을 감싸 쥐고 이를 갈며 물었다.

“할 말 없느냐.”

“네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까 화가 좀 풀렸어.”

“다른 말!”

“눈이 약한가 봐?”

“다른 말.”

“운월이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고자질했어?”

승언이 대야에 물을 받고 거기에 수건 몇 장을 겹쳐 넣은 다음 곁으로 다가왔다.

따뜻한 물인지 차가운 물인진 모르겠으나, 승언은 수건을 물에 담근 다음 물기를 꼭 짜고서 떡돌이의 눈에 얹어주었다.

황제는 눈 위에 물수건을 얹은 채로도 이를 갈았다.

“이럴 땐 아프냐고 묻고 미안하다고 해라.”

“아파?”

“안 아프겠느냐?”

“유감인걸.”

떡돌이가 다시 이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승언이는 떡돌이 눈에 얹은 수건을 조심스레 누르면서, 내게 입 모양으로 ‘송구하다고 하세요’라고 말을 전해주었다.

“송구해 떡돌아. 진심으로 송구해.”

사과를 원하는 모양이기에 결국 사과를 해주자, 떡돌이는 한숨을 내쉬고서 눈에 올렸던 수건을 내렸다.

“와. 눈이 빨개졌어, 떡돌아.”

내가 손거울을 가져와 얼굴을 비춰주자 죽는소리를 내며 다시 수건을 올렸지만.

어쨌든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가 운월과 짝짜꿍을 한 데 대한 화난 기분이 좀 풀렸다.

온 귀인과 내가 말다툼을 했는데 나한테 조심해서 말하라고 한 데 대해서도 화가 조금 풀렸다.

나는 아무 때나 화를 푸는 소인배는 아니지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대인이니까.

* * *

다음날.

‘양의억액의효과정’이라는 이름 길고 괴상한 후궁 전용 서책을 건성으로 읽고 있을 때였다.

아직도 삼분의 일이나 더 읽어야 하는구나…… 갑갑해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흑합 장군이 찾아와 전에 내가 맡긴 물건을 건네주었다.

“귀인께서 부탁하신 자수입니다.”

와. 맡겨 놓고 잊고 있었는데. 정말로 완성했구나.

“고마워요.”

나는 감탄해서 그가 맡긴 물건을 건네받았다.

맡기긴 해도 잘해낼 거란 기대를 하고 준 건 아닌데.

의외로 그의 자수 실력은 뛰어난 편인지, 글씨가 한 자 한 자 모두 반듯했다.

“하기 귀찮고 짜증 나고 막 그랬죠?”

장군이 자수를 잘 놓는 게 신기해 물었지만, 그는 태연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귀인께 도움이 되었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떡돌이랑은 역시 배포부터 다르구나.

그 다정한 목소리와 마음 씀씀이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와서, 나는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워주었다.

“장군은 손가락이 참 야무지네요. 최고.”

“?”

이제 안비에게 이걸 돌려주고 와야지.

* * *

“마마께서 안 계시다고?”

안비가 있었더라면 또 뭔 시비를 걸었을지 모르겠으나, 이번에는 안비가 없었다.

“네. 마마께서는 규빈 마마와 산책하러 가셨습니다.”

“그래.”

잘됐다 싶어서 나는 얼른 흑합 장군이 대신해준 자수를 안비의 상궁인 강문에게 대신 주었다.

“이거. 마마께서 해달라 애원하셨던 자수. 전해라.”

“마마께서 명령하신 물건이니 직접 전달하셔야지요. 제게 맡기고 가버리시면 안 됩니다, 귀인.”

강문이 내게 시비를 걸려 하긴 했으나.

“자네는 손이 없나?”

논리적으로 물어주자 강문도 입을 다물어서,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이후 며칠 동안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안비도 이번에는 내 자수에 대해 더 시비를 걸지 않고 지나갔다.

여름이 다 지나갔기 때문인지, 내게 자꾸 자수를 해오라 요구하는 게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다 같이 나를 모른 척 무시하면서 지내는 중이라 불러서 자수를 가져오라 하기 싫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평소처럼 후궁 서책을 읽고, 무공 수련을 하고, 여기저기 산책을 다니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평생 이렇게 살면 좋을 텐데. 건드리는 사람 없이.”

“높은 곳까지 올라가셔야죠, 소주. 소주라면 빈이나 비 자리에는 충분히 오르실 수 있어요.”

“높은 곳에 오르는 건 좋지. 하지만 공격받고 싶진 않아.”

가장 특이한 일이라고는 개원이 개시시 편으로 당과를 보내온 일 정도라니. 얼마나 평화롭고 좋아?

하지만 채 일주일을 그렇게 지내기 전에 비원이 다시 날 찾아왔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날 불러낸 그는, 인적 드문 곳에 둘만 있게 되자 그동안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귀인의 조언을 받아 발에 부상 입은 태감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뭐가 잘 안 됐구나?”

“네. 다리 다친 태감 숫자가 생각보다 적지 않아서요. 태감 숫자가 너무 많다 보니, 크고 작은 부상 입은 태감의 수가 많았습니다.”

그는 내가 평화롭게 지내는 동안 열심히 뛰어다닌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굳이 왜 나한테 이런 걸 다 보고하지? 내가 도움을 주긴 했어도 그냥 타천천에게 고마운 마음에서 도왔을 뿐. 촉비와 비원의 싸움에 끼어들 마음은 없는데.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멍하니 보고 있자니, 비원이 한층 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부탁했다.

“귀인. 태감 숫자가 너무 많으니 그림자들을 조사해야겠습니다. 혹시 최근에 다리 다친 그림자가 있는지, 폐하께 여쭈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어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럼 잘됐네요!”

“떡, 아니 폐하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떡돌이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거 같은데.

내가 떨떠름하게 묻자, 비원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요.”

* * *

“승언이는 거의 매일 네 옆에 붙어 있잖아.”

같이 저녁 식사를 할 때. 나는 비원이 부탁한 대로 슬며시 운을 띄워 보았다.

떡돌이는 조기 살을 발라 내 밥그릇 위에 얹어주다가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게.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난 그냥 정보 하나만 던지고 이 일에서 손을 떼려 했는데, 내가 왜 돕고 있는 거래?

어쨌든 이번만 도와준다.

“그럼 승언이는 언제 쉬어?”

떡돌이는 의아해하는 눈치였으나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교대로 쉬지. 그림자가 승언이 하나겠느냐.”

“승언이가 일하다가 다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을 때까지 쉬겠지. 떡돌이 역할은 교대로 다른 그림자가 할 테고.”

“그림자 숫자가 많아?”

황제의 의심이 또다시 발동했다. 내가 재차 캐묻자 떡돌이는 대답을 해주다 말고서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내가 눈을 피하지 않고 같이 쳐다보자, 떡돌이는 의심스럽게 쳐다보길 멈추고서 내 밥그릇에 얹은 조기 살을 도로 회수해갔다.

“그건 또 왜 가져가!”

“먹는 데 관심이 없어 보이기에.”

“아니야. 도로 줘. 먹을 거야.”

* * *

다음날. 나는 비원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도와주는 건 여기까지야. 나는 네가 촉비한테 복수하는 데 관심이 없어. 그러니 나한테 도와달라 하지 마.”

“매정하시군요. 우리는 한편이라 생각했는데요.”

“내가 널 도운 건 타천천이 날 구했기 때문이야. 너는 네 상사가 날 도우라 했으니 날 도와야 하지만, 나는 널 도울 이유가 없어.”

비원은 내 말에 입을 떡 벌리고서 쳐다보았으나, 내가 ‘무슨 문제라도?’ 하고 되묻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감탄했다.

“아닙니다. 아주 논리적이게 이기적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점이?”

“난 도울 생각 없지만 너만 도와, 이거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 * *

떡돌이가 오 공공을 보내서 오늘은 일이 있으니 시침을 들지 않아도 좋다고, 먼저 편히 자란 말을 전해왔다.

‘이렇게 말해 놓고서 또 밤중에 밥 먹자고 찾아오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오 공공은 절대로 아니라며 손을 내젓고는 안심하라며 돌아갔다.

덕분에 나는 밤 산책도 하고 야식도 먹으면서 혼자 즐겁게 놀다가, 배가 부르고 눈꺼풀이 감길 즈음 침상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날씨는 더웠지만, 밤이 되면 가을 냄새가 실린 바람이 불어오기에, 창문을 열고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있으려니 그야말로 현실에 펼쳐진 낙원 같았다.

좋구먼. 좋아. 후궁들이랑 대신들이 나한테 시비만 안 걸면 참 지내기 좋은 환경인데 말야.

“?”

그런데 낙원에 웬 발소리가 이리 많아? 누가 내 낙원을 짓밟고 있는 거야?

나는 인상을 찡그리고서 상체만 일으켰다. 누워 있자니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서.

지나가는 발소리라면 그래도 무시하고 그냥 잤을 거다. 그런데 발소리들이 내 쪽으로 가까워지니 문제였다.

특히 개중 하나는 유달리 속도가 빨랐는데-.

“귀인.”

비원이네. 갑자기 창문 뒤에서 쑥 나타난 머리통에 놀란 척 이마를 딱 때리자, 그가 허둥지둥 창문을 넘어 들어오며 부탁했다.

“숨겨주십시오.”

“무슨 일이야?”

“부상 입은 그림자가 교대한다 하니, 분명 교대하는 장소나 그림자들이 따로 치료받는 곳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림자들을 추적해서 그 위치를 알아내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문 비원은 혹시 근처에 누가 있진 않은지 유심히 살피고는, 창문의 휘장을 내리며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어 말을 이었다.

“들킬 것 같기에 미리 준비해 간 촉비의 물건을 하나 떨어뜨렸습니다.”

저놈 저거 촉비를 쳐내는 데 아주 진심이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여길 와?”

“돌아오다가 병사들에게 걸려서요. 따돌리면서 뛰다 보니 숨을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병사들한테 걸렸는데 여길 왔다고?”

해명을 듣자 더욱 어이가 없다. 내가 되물으면서 언성을 조금 높이자, 비원은 ‘쉿. 쉿. 쉿.’ 하고 황급히 자기 입가에 손을 대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숨을 장소 없습니까? 잠깐만 숨겨주시면 바로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내 방에는 딱히 숨을 구석이 없었다. 황후나 연비의 방 정도쯤 되면 몰라. 내 방은 작진 않지만, 몸을 숨기기 애매하다고!

“귀인. 숨을 장소 없나요?”

비원이 더욱 초조하게 묻는데, 문밖에서 “천 귀인 계십니까?” 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젠 나까지 덩달아 조급해지고 말았다.

“누구세요?”

원웅이 밖으로 달려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황급히 제안했다.

“머리랑 몸을 분리해서 숨겨뒀다가 나중에 붙이자.”

몸 전체를 숨기긴 어렵지만, 머리를 분리하면 어떻게든 숨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내가 그의 머리통을 잡자마자 비원은 기겁해서 항의했다.

“그럼 제가 죽습니다!”

“타천천이 잘 살려 낸다며?”

“불완전하다니까요! 그래서 귀인도 이 꼴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

“안 돼요, 소주께선 주무신다니까요!”

원웅이 짜증 반 공포 반 섞인 목소리로 외치는가 싶더니, 그 우렁찬 목소리가 이젠 문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천 귀인 계십니까? 수상한 자를 찾아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안 되겠어.

“역시 나누자.”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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