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너는 눈만 예뻐
아니, 이 인간이 미쳤나. 난데없이 찾아와서 그림자 열 명을 처리할 수 있냐니?
전에 승언이와 잠시 싸운 적이 있긴 했다. 승언이는 그게 나인 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때, 우리는 둘 다 전력을 다하진 않았지만, 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황제의 그림자’가 제일 말 잘 듣는 무인에게 주는 자리가 아니란 걸.
그런데 뭐?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연약한 몸을 가진 나한테 뭐? 그림자 열 명을 처리할 수 있냐고?
“니가 해봐라 니가.”
“약한 소리를 쉽게 하시는군요.”
“이 몸은 무공을 익힌 지 일 년도 안 된 새싹이야. 무리한 요구하지 마. 모가지 똑 따버리는 수가 있어.”
“……말이 앞뒤가 안 맞단 생각은 안 하십니까.”
“뭐가.”
그림자를 상대하는 건 무리고 제 모가지 따는 건 쉽습니까?”
무슨 소리야.
“그림자는 목이 열 개고 너는 하나잖아.”
공부는 잘하는데 숫자에 약하구나? 내가 혀를 차자, 비원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다리가 아픈지 근처 풀밭에 쪼그리고 앉았다.
좀 무거운 분위기. 아주 심각하진 않지만.
딱 보아하니 무언가 고민이 있는 얼굴이었다. 일단 장난삼아서 그림자 상대해달란 부탁을 한 건 아닌 거 같고.
나는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사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묻기는 해 줘야겠지.
내 질문에 비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대답했다.
“전에 촉비가 수상한 짓 하던 거요. 기억나십니까?”
기억나지. 나랑 비원이 싸워대는 곳에 뜬금없이 촉비가 태감을 끌고 와서 막 때렸지.
“어.”
“귀인께서 절 떠미는 바람에 촉비가 제 얼굴을 본 것도 기억나십니까?”
“하하. 그럼! 너 놀란 얼굴, 진짜 웃겼어.”
“…….”
“기억나. 그게 왜?”
“그런 장면을 들켰으니 분명 제게 공격을 해 올 거 아닙니까. 촉비를 처리해달란 의뢰도 받았겠다, 제가 먼저 촉비를 공격하려 합니다.”
“그래? 근데 그거랑 그림자가 무슨 상관이야?”
그냥 듣기엔 별 상관없어 보이는데.
“얼핏 보면 없죠. 저도 없는 줄 알았죠. 그런데 촉비를 쳐내기 위해 뒷조사를 해보니 그림자가 나왔습니다.”
“무슨 소리야?”
“촉비가 황제의 그림자 중 누군가와 결탁했단 거죠.”
뭐?
“그래도 돼?”
그러면 나도 승언이! 승언이랑 손잡을 수 있나?
비원은 나를 개똥처럼 쳐다보며 혀를 찼다.
“될 거 같습니까? 당연히 안 되는 겁니다. 안 되는 걸 했으니 자기들 관계를 더욱 깊게 감추는 걸 테고요.”
허어. 이렇게 놀라울 수가 있나. 입이 쩍 벌어진다.
“저도 그림자들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진 모르지만…….”
비원은 나뭇가지 하나를 집더니 흙바닥에 그걸로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촉비와 손을 잡은, 어쩌면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지도 모를 그림자가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옆에 다른 동그라미 하나를 더 그려 넣었다.
“그런데 그림자들도 패거리가 있는 것 같더군요. 여기. 이쪽을 촉비 패거리라 하면, 이쪽에. 반대 패거리도 있습니다.”
“잘 이해가 안 가.”
“촉비와 가까운 그림자는 촉비를 위해 이것저것 도와주지만, 그 그림자와 사이가 나쁜 그림자들은 촉비를 방해한단 거죠.”
“어떤 식으로?”
“촉비가 황제의 그림자와 연루되었단 증거를 잡아내려 노력하는 것 같았습니다.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요.”
승언이는 어느 쪽이려나.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떡돌이는 이걸 알고 있나? 똑똑한 척하더니…… 우리 떡돌이, 뇌가 부실하구나.
“근데 왜 나한테 열 명을 상대할 수 있냐고 물은 거야?”
“촉비와 손잡은 그림자가 누구인가 확인하러 갔다가 열 명에게 쫓겼거든요.”
아하. 구체적인 숫자가 거기에서 나왔구나.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니, 비원이 재차 물었다.
“정말로 상대 안 됩니까?”
“원래 몸이라면 가능한데. 지금은 안 돼.”
지금도 무공을 열심히 익히고는 있지만 그래도 원래 몸 상태에 비한다면 숭어와 송사리알만큼이나 차이가 나는걸.
내 한 몸이라면 어찌어찌 잘 건사하겠지만, 일 대 십으로 싸우는 건 곤란하다.
“안타깝네요. 귀인께서 도와주신다면 일이 수월했을 텐데.”
“촉비랑 손잡은 그림자를 알아내서 어떻게 하려고?”
“당연히 끊어낼 겁니다. 측근 세력이 잘려 나가면 촉비는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드니 제게 해코지하진 못하겠죠.”
“아하.”
순한 맛이네.
“이 과정에서 촉비가 폐비 되거나 냉궁에 가면 더 좋겠지만요.”
싱거운 맛이야. 비원이는 꿈이 참 소박하구나?
“하지만 그림자들에 대해선 꽁꽁 감춰져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폐하의 최측근 몇몇을 제외하곤 거의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요. 이런 상황이다 보니, 개중 촉비 측근 한 명만 구분해내는 게 어렵습니다.”
말을 마친 비원이 다시 한번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내가 이쯤에서 말을 바꿔서 ‘까짓 열 명! 내가 상대해주마!’라고 기대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기에, 나는 같이 눈만 쳐다볼 뿐 말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비원의 표정이 점점 실망감으로 물들어가는 찰나. 예전에 내가 촉비와 얽힌 일이 떠올랐다.
그래. 그걸 얘기해주면 되겠다. 비원 이놈은 좀 짜증 나지만…… 그래도 타천천이 날 구해주긴 했으니까.
어설프게 구하는 바람에 난데없이 후궁이 되긴 했지만, 후궁 생활도 뭐. 나쁘진 않으니.
“열 명을 상대하진 못해. 대신 정보 하나 줄게.”
“정보라니요?”
“전에 어떤 태감이 촉비한테서 보따리를 훔쳐서 달아나는 걸 봤어.”
“태감이요?”
“어. 내가 내공 실은 돌을 차서 태감 발에 맞췄지. 그때 태감이 그 보따리에서 필첩을 하나 떨어뜨렸는데, 안에 태감이랑 궁녀들이 죽은 위치가 쓰여 있었어.”
내가 주는 정보가 못 미더운지 마땅찮은 표정으로 듣고 있던 비원의 눈이 맞부딪친 쇠붙이처럼 빛났다.
“필첩…….”
“그게 진짜 태감인지, 아니면 태감으로 위장한 그림자였는진 모르겠어. 당시엔 태감이라 생각했는데. 네 말 들어보니, 촉비 반대파 그림자가 태감으로 위장한 걸 수도 있는 거 같아서.”
이 정도면 정보가 됐을까? 내가 또랑또랑하고 영민한 눈으로 쳐다보자, 비원은 혼자 ‘필첩. 필첩’ 하고 중얼거리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정보를 받았습니다. 다리 다친 태감을 찾아보면 되겠군요.”
“그 사람이 그림자이더라도 촉비의 적이 아닐 텐데. 그래도 괜찮아?”
“촉비의 아군을 찾기 어렵다면 촉비의 적을 찾아내야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린 비원은 몸을 일으키고서 옷자락 끝에 묻은 풀잎을 탁탁 털더니, 내게 웃으면서 인사를 올렸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귀인.”
* * *
‘어…… 그런데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네. 전에 촉비 필첩 얘기. 내가 떡돌이한테 하지 않았던가?’
비원과 헤어진 후. 내 처소로 돌아오고 있자니 문득 이 생각이 났다.
당시에 내가 태감 발에 상처 입혔단 이야기는 까먹어서 떡돌이에게 들려주지 못했다.
이후에 생각이 났지만, 내공을 넣어서 부상 입혔단 말을 할 수도 없어서 그냥 넘어갔지.
하지만 필첩 얘긴 확실하게 전달했는데. 왜 떡돌이는 아무 얘기가 없을까?
‘걔도 까먹었나?’
이틀 전이었더라면 떡돌이는 이런 거 안 까먹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떡돌이 밑의 그림자가 촉비와 결탁했을지도 모른단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영 믿음이 안 가네. 까먹은 건지도 모르겠어.
어휴, 덜렁이 같으니라고.
* * *
“떡돌이는 칠칠찮구나. 앞으론 떡돌이 말고 덜렁이라 부를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떡돌이가 ‘오늘 뭐 하고 지냈냐’고 묻기에, 오늘 하루의 내 소감을 들려주었더니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하루 그 생각을 하면서 보냈다고?”
“응.”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떡돌이는 잠시 자기 턱을 쓰다듬더니,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오원요를 쳐다보았다.
오원요는 내 눈치를 보더니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 보셔도 저도 해석이 안 됩니다, 폐하.”
뭐야. 내가 한 말을 해석하라고 오원요를 본 거야? 오원요는 또 떡돌이 그 눈빛을 바로 해석한 거고?
“이야. 둘이 사이좋네?”
“난 네 의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도무지 못 따라가겠는데.”
“눈빛으로 둘이 대화했잖아.”
떡돌이는 입을 다물고 다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턱을 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떡돌이는 눈동자가 예쁜데. 그런 자세를 취하자, 눈동자에 촛불 일렁이는 게 반사되어서 더욱 예뻐 보였다.
그 모습에 감탄하며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떡돌이는 턱을 괴었던 팔을 내리면서 나를 질책했다.
“그렇군. 우리는 눈으로 대화가 안 되는군. 하지만 이건 계란이 네 탓이다. 네가 신호를 못 받아서 그래.”
“네가 눈이 예뻐서 그래.”
“!”
“눈동자가 반짝반짝해서 그거 본다고 그런 거야.”
그러니 내가 네 눈빛을 못 읽은 건 네 탓이다, 라고 말하려고 보니 떡돌이 쟤는 왜 저렇게 흐뭇한 얼굴인지 모르겠다.
눈살을 찌푸리고서 맞은편에 앉자 그는 다시 턱을 괴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재차 물었다.
“짐의 눈이 좋으냐.”
맞다. 그는 눈이 예쁘다. 나는 떡돌이의 눈이 마음에 든다.
그는 덜렁이인 데다 이기적이고 뭔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지만, 눈동자는 아주 반짝거리는 보석처럼 고왔다.
“응. 눈만.”
하지만 순순히 예쁘다고 해주자니 어쩐지 기분이 상해서 나는 단호하게 조건을 걸었다.
“눈만 예뻐. 다른 덴 안 예뻐.”
사실은 입도 예쁘고 코도 예뻤지만, 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눈 예쁘면 됐지.”
안타깝게도 떡돌이는 이 정도 말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듯했지만.
그 좋아하는 꼴을 보자 다시 배알이 뒤틀렸으나, 나는 소인배가 아니기에 ‘눈 예쁘다’는 진실까지 철회하진 않았다.
그런데 다시 식사를 하려고 숟가락을 들고 있자니, 떡돌이가 자기 밥그릇을 들고 일어나 내 옆으로 와 앉는 게 아닌가.
왜 저러나 싶어 쳐다보자, 그가 탁자에 팔을 괴고 날 보더니 놀리는 투로 물었다.
“만져보겠느냐?”
“눈알을?”
“눈가까지만.”
갑자기 왜? 왜 이렇게 예쁜 짓을 하는 거지? 수상하다. 떡돌이 얘가 이럴 애가 아닌데.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는 무슨. 우리 계란이가 늘 짐과 내외하려 드니 다가가는 거지.”
“전에 내가 화내서 이래? 화 풀라고? 그런 거라면 난 고작 이런 거로 화 안 풀려, 폐하. 폐하 눈은 예쁘지만 난 예쁜 거 본다고 화 풀고 안 그러거든.”
나는 진지하게 말한 건데. 떡돌이는 내 말에 눈웃음을 짓더니 놀리는 투로 물었다.
“그래서야 딸 둘 아들 둘 낳겠느냐?”
“!”
운월이…… 이 입 가벼운 놈! 황제한테 죄다 고자질했구나!
나는 내 세력이 되겠단 놈이 처음으로 보인 행실에 충격을 받아 씩씩거리는데.
떡돌이는 딸 둘 아들 둘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지 흐뭇해하는 얼굴이다.
그 좋아하는 얼굴을 보자 더욱 기분이 상해서, 나는 소원대로 그의 눈을 콕 찔러주었다.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