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충성심은 얻지 못하였으나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고? 자신 없다고 갔다며.”
내가 떨떠름하게 되묻자, 떡돌이는 별것 아니란 투로 대답했다.
“가문에서 설득했겠지.”
“왜 그렇게 생각해?”
“운월 그자는 부모 말을 잘 듣거든.”
운월?
“아. 나한테 소개해 주려는 관리 이름이 운월?”
그날 식사 자리엔 내 눈엔 관리로 보이는 이가 없었는데. 이름까지 있는 걸 보니, 떡돌이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은 확실히 아니었나 보다.
“등룡직에 있는 신입이지. 하지만 높게 올라갈 거다. 이번처럼 짐의 말에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떡돌이는 내 말에 입꼬리를 교활하게 올리며 웃었다.
“굉장해. 떡돌이 너 좀 폭군 같아.”
그 모습이 참 못되어 보여서 감탄하자, 떡돌이는 기분 나쁜 내색도 없이 어깨를 으쓱하고서 물었다.
“만나볼 건가?”
“만나서 뭐 하라고.”
“그자의 안목이 잘못됐단 걸 보여주고 와.”
* * *
아니, 내 세력이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뭘 안목이 잘못됐단 걸 보여주기까지 해야 하나. 그냥 평생 그러고 살라 하면 되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일단 황제가 미리 준비해 준 의자로 가 앉기는 했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정자에 딸린 긴 의자인데, 주위에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정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왜 굳이 이런 장소를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이 사이에 있으면 나도 평화로워 보일 것 같았나?
“…….”
하지만 약속을 잡았다는 떡돌이의 확언과 달리, 아무리 기다려도 운월인지 뭔지 하는 관리는 오지 않았다.
결국 기다림에 지쳐서 손을 뻗어 대롱대롱 내려온 꽃잎을 툭툭 건드려 보기를 잠시.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자니 단정하면서도 빠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낯익은 사람이 체통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최대한 속력을 내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이미 체통은 사라져 없었지만,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하여간 그런 방식으로 다가온 남자는 내게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그제야 멈추어 서서 딱딱하게 인사를 올렸다.
“신 등룡 운월, 천 귀인께 인사 올립니다. 회의가 늦어져 귀인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그런데 웬걸. 인사를 올리는 남자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대를 본 적이 있소.”
“저를요?”
“며칠 전엔 악공 아니었소?”
내가 자기를 못 알아볼 줄 알았나. 운월은 흠칫하더니 순순히 수긍했다.
“알아보시는군요.”
몰라볼 리가.
“혼자 음이 다 틀리기에. 아, 저 악공은 뭔 수로 궁중 악사가 된 거지? 막 이런 생각을 했거든.”
“!”
“악공이 아니라 그랬나 보군. 이제 이해가 가.”
그보다 나 참 대단한데? 악공으로 변장한 관리를 한눈에 알아봤다니. 역시 내 안목은 참으로 빼어나다.
역시 무림 고수라면 나 정도 안목은 되어줘야지.
“……일전엔 결례하였습니다.”
“괜찮소. 난 먹느라 음악엔 안 열중했거든.”
“…….”
내가 무림 고수다운 넓은 아량까지 베풀어주자, 운월은 놀라서 움찔하더니 곧 한숨을 내쉬고서 말을 돌렸다.
“폐하께서 제게 천 귀인을 지켜달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전 제 힘이 나쁜 데 쓰이지 않길 바랍니다. 그래서 결례를 무릅쓰고 악공들 사이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게 죄송하다 청하는 겁니다. 제 연주가 아니라요.”
쑥스러운지 말미에 자기 연주 실력을 두둔하는 말을 붙이긴 했지만.
나는 상대가 원하지 않는 화제를 꺼내지 않는 배려심을 갖추고 있기에, 굳이 연주 이야기를 다시 하는 대신 되물었다.
“폐하께 들었소. 그대는 나와 한배를 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지금은 마음을 바꾸었소?”
“바꿔야 할지 다시 생각하기 위해 왔습니다. 사람은 화가 나면 험한 소리를 누구나 다 하는 법인데. 제가 귀인을 너무 함부로 판단한 건 아닐까 싶어서요.”
“그걸 이제서야 알다니 좀 늦되군.”
“…….”
“어쨌든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었다니 환영이오. 내가 말싸움엔 좀 약하거든. 공 같은 인재가 필요하오.”
“왜요. 잘하시는 거 같던데요.”
“내가 없는 데서 하는 것까진 알 수 없잖소.”
그런데 뭐야. 방긋방긋 웃으면서 내 아군이 될 운월을 미소로 환영해주고 있는데, 날 보는 이놈의 표정이 그리 탐탁지가 않았다.
“지금 속으로 내 욕했소?”
그게 이상해서 묻자, 운월의 눈동자가 금세 흔들린다. 욕한 거 맞나보다.
“욕했구나. 나 이런 거 잘 아오.”
웃으면서 재차 자랑하자, 운월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빠르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화제를 돌렸다.
“몇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확인이라니?”
“귀인께선 장차 목표가 무엇이십니까?”
“아들 둘 딸 둘?”
진짜 목표는 복수이지만, 복수가 목표란 말을 하면 안 되니까, 야욕 없는 후궁처럼 대답한 건데…… 뭐야, 저 표정은.
운월 저자는 왜 자꾸 주기적으로 눈으로 날 욕하지?
내가 덩달아 빤히 쳐다보자, 운월은 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걸 여쭌 건 아닙니다만…… 참고하겠습니다.”
“그럼 뭘 묻는 건가?”
“어떤 품계까지 올라가고 싶으신지, 높은 품계에 올라가시면 뭘 하실 건지 등입니다.”
떡돌이 이놈은 내 측근이 될 사람을 보낸 거야, 면접관을 보낸 거야?
“녹봉이 많은 품계가 좋네. 사람들이 내게 시비를 안 걸면 좋겠어. 높은 품계가 되면 시비를 덜 걸겠지. 난 잘 먹고 잘사는 게 목표라네. 평화롭게 지내고 싶어.”
하지만 이왕 약속을 잡고 만나기까지 한지라 다시 한번 인내심을 가지고 말해주자, 이번에는 운월이 좀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관리라면 아주 머리가 좋을 텐데. 겉으로 보기에는 나와 비슷해 보일 정도로 멍한 표정이었다.
눈으로 욕하고 있지도 않아.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는 표정이라, 나는 운월의 얼굴 앞에 손을 휘저으며 물었다.
“덜 됐나? 더 해야 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더 하라고?”
“폐하의 명을 받들어, 제가 잠시 귀인의 도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어? 조금 전까지 엄청 튕겼잖아? 갑자기 왜?
* * *
“아버지 말씀이 맞았습니다. 실제로 본 천 귀인. 생각보단 더 괜찮은 사람 같았습니다. 폐하께 외부에서 천 귀인을 도우리란 말씀을 올렸습니다.”
운월이 차를 내려놓으면서 말하자, 그의 부친은 맞은편에서 과일을 깎다가 과도를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그러냐?”
질문하는 부친의 표정에는 ‘네가 정말로 천 귀인을 도우려 할 줄은 몰랐다’는 기색이 확연했다.
그걸 눈치챈 운월이 황당해 부친을 보자 부친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어떠시더냐? 실제로 보니 의외로 영리하시든? 하긴. 그러니 네가 마음을 바꾼 거겠지. 넌 영민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느냐.”
“아뇨. 소문보다 좀 더 맹하십니다.”
애써 아들을 이해해 보려던 부친은 한 번 더 당황해서 재차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느냐? 물론 내가 권하긴 했지마는…….”
“맹하셔서요.”
“?”
“그래서 오히려 나쁜 생각을 안 하시는 거 같아서요.”
“본인이 나쁜 생각을 안 하더라도, 나쁜 생각을 하는 타인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을 텐데.”
“그래서요.”
“?”
“천 귀인은 맹한데 총애를 가장 많이 받으시지요. 사람들이 못된 생각을 품고 달라붙어 이용하는 걸 보느니, 제가 미리 옆에 붙어서 간신들을 잘 차단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의 덤덤한 대답에, 부친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있었으나 곧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애매한 동기구나. 하지만 그게 네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것도 좋지.”
운월은 자기가 내린 결정이면서도 스스로의 선택이 못마땅하단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부친은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다 물었다.
“폐하께선 뭐라 하시든?”
* * *
“짐의 손을 거쳐 붙인 이이니, 천 귀인을 이상한 쪽으로 이끌진 않겠지.”
월요 황제가 상소문을 덮으면서 중얼거리는 말에 오원요는 곁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요.”
하지만 불안한 표정이었다.
월요는 뒷덜미를 스스로 주무르다가 측근 태감의 그 염려하는 표정을 눈치채고서 물었다.
“왜 그렇게 걱정스러운 얼굴이냐.”
“송구합니다, 폐하. 신은 자꾸 염려가 됩니다.”
“염려라니?”
“운 등룡은 좋은 신하이긴 하나, 천 귀인과 한배를 타려는 사람은 융통성이 필요하지 않을지요? 천 귀인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운 등룡이 과연 따라갈 수 있을지…….”
“그래서 운 등룡을 붙인 거다.”
“예?”
“고지식하니 천 귀인에게 휘말리지 않겠지.”
황제는 덤덤하게 말하고서 붓으로 빈 종이에 사각형의 테를 그렸다.
오원요는 저게 뭔가 싶어서 황제의 붓끝을 빤히 보았다.
평범한 사각형이었다. 빈방처럼 보이는 사각형의 공간.
황제는 붓을 벼루에 내려놓고서 그 방을 마음에 든단 얼굴로 보며 웃었다.
오원요는 황제가 그린 사각형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궁금해서,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귀를 열고 집중했다.
하지만 황제는 사각형을 보며 웃기만 할 뿐 이게 무엇이란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대신 충분히 사각형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붓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 현우 군왕에 대한 건? 알아보았고?”
현우 군왕은 국경 부근에서 지내는 월요 황제의 이복형제 중 하나였다.
최근에는 자결했단 소식이 전해져 궁인들을 충격에 빠뜨린 인물이기도 했다.
오원요는 그 말에 황제의 지척까지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보고했다.
“예. 폐하의 말씀처럼 살펴보니 자결이라 하기엔 수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살해된 걸지도 모릅니다.”
“그자들과 관련이 있는 거 같으냐.”
황제가 말하는 ‘그자’들은 수오부 군왕이 손을 잡았으리라 여겨지는 무림 세력이었다.
오원요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 부분은 모르겠습니다.”
대답을 하자마자 오원요는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럴 수밖에. 군왕과 손을 잡은 무림 세력을 조사하면서 나온 이름이 ‘사하비단’인데, 그 세력과 연루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인물은 또 ‘천년비’란 무림 악적이었다.
문제는 기몽 장군이 ‘천년비가 천 귀인의 입궁 전 가명일지도 모른다’고 보고한 일이 있단 점이었고, 최근까지도 황제가 그 일을 조사했단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이런 일이 터졌으니, 아무래도 황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측근 태감이 그가 볼 때도 천 귀인은 명실상부 이 궁궐 내에서 황제에게 가장 총애받는 후궁이었으니까.
하지만 월요 황제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태연히 상소문을 펼쳐 앞에 내려놓기만 했다.
“그렇군. 관련해서는 좀 더 생각해보자.”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도 태평해서, 오원요는 안심해서 곁을 물러났다.
“예, 폐하.”
* * *
나 스스로 만든 세력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신들이 내 욕을 할 때 뒤에서 날 감싸줄 세력을 얻게 되었다.
뒤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제대로 활동을 할지 말지는 나는 알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됐겠지, 싶어서 비밀 장소로 가 훈련을 한 다음 땀을 식힐 겸 잠시 산책을 하고 처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처소 지붕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 같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 수상한 인물이 손짓하는 게 아닌가.
‘나한테 오란 건가?’
너무 대놓고 오란 표시를 하니 적은 아닌 것 같고…….
누구지? 궁금해서 그쪽으로 가보자, 담벼락 뒤에 숨어 있던 인물이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귀인. 여깁니다.”
비원이었다.
“네가 여긴 왜 왔어?”
비록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지만, 황후를 지지해야 하니까 나랑 가깝게 지내진 못하겠다더니?
이상해서 쳐다보자, 비원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귀인. 혹시 무공을 어느 정도로 회복하셨습니까?”
“그건 왜?”
“급해서 그런데, 황제 그림자를 몇 명 상대할 수 있으실까요?”
그림자? 승언이 같은?
“왜? 몇 명을?”
“한 열 명 정도…….”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