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당과 사줘
개원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오해를 풀어야 하나? 당신이 무언가 잘못 이해한 것 같다고, 절대로 그런 마음이 없다고?
개원은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며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진실을 밝히는 방법에 관해 생각했다.
‘안 된다.’
그러나 먹물 농도가 짙어지기 전. 개원은 먹을 내려놓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기분이 안 상할 리가.’
여기서 아니라고 해 버리면 상대는 민망해할 거다. 그걸로 화를 내진 않겠지만, 오가는 서신은 끊어질지도 몰랐다.
개원은 천년비의 영혼이 누구의 몸 안에 있는지를 찾아야 했다. 절대로 서신이 끊어져선 안 되었다. 그전까지는.
게다가…….
‘천 귀인은 천년비와 서체가 비슷하다.’
천년비가 천 귀인일 가능성도 꽤 컸다.
만약 첫 만남 때 천 귀인이 천년비를 욕하지 않았다면, 그는 서체가 비슷하단 사실을 깨닫자마자 천 귀인이 천년비일 거라고 확신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천 귀인은 분명 천년비에 대해 나쁘게 말했다. 절대로 자신에 대해 나쁘게 말할 사람이 아닌데.
그가 기억하기로 천년비가 자기 자신의 단점을 인정한 건 오로지 단 하나.
학식이 짧다는 것인데, 그녀는 학식이 짧다는 걸 마지못해 인정할 때도 ‘난 머리가 나쁜 건 아니야’라고 늘 덧붙였다.
‘조심해서 접근해야 한다.’
후궁의 몸에 들어간 무림 악적의 영혼을 찾아내는 건 단순히 “실례합니다. 그쪽 영혼이 최근에 바뀌었습니까?”라고 물어보아서 될 일이 아니었다.
두세 번의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추적. 신중해야 한다.
개원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빈 종이를 펼치고 심호흡을 했다.
‘미안하다, 천년비. 하지만 널 찾기 위해서라면…….’
* * *
귀인께
귀인은 예리하시군요. 눈썰미가 참으로 좋으십니다.
감히 이 마음이 귀인께 닿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니까요.
그저 저는 귀인의 먹물 향이나마 맡을 수 있다는 데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길을 걸어가는데 당과를 팔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당과와 달리 안에 숙수가 직접 제조한 약제를 발라 더욱 맛있다는군요.
먹어보진 않았고, 주인 말에 따르자면 그랬습니다.
제가 귀인께 이 당과를 사드릴 날이 올까요?
-귀인을 그리워하는 개 아무개 올림
* * *
개 소협에게
아 당과 사서 보내세요. 개 답응한테 주는 거라 하고서 보내면 되잖아요.
-입에 발린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
* * *
“이 새끼가 뭐가 어째?”
내가 붓을 내려놓고서 씩씩거리고 있자니 원웅이 과일을 담은 그릇을 들고 오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소주?”
왜 그러냐고? 내 전 애인이란 작자가 딱 한 번 본 여자한테 반해가지고서는 먹물이 어쩌고저쩌고하니 그러지!
뭐? 먹물 향만 맡아도 좋아? 내가 편지를 보내면 편지에 코라도 박고 킁킁댄단 거냐?
이 빌어먹을 자식. 나한텐 독을 먹여 놓고서는 천 귀인이 보낸 편지에는 코 박고 죽어도 좋냐?
에라이 못된 놈. 당과로 이마를 딱 때려버리고 싶네.
“소주?”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원웅에게 할 수 없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서신을 잘 접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세상엔 처진 눈썹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아서.”
“네?”
대답 대신 나는 원웅이 가져온 과일을 집어 입안에 넣고 와득와득 씹었다.
“?”
원웅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내가 더 묻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라 생각했는지 굳이 캐묻진 않았다.
대신 그릇을 상 위에 내려놓고 물러서더니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아, 소주. 제가 이거 가지러 갔다가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요.”
“뭔데? 또 내 흉이야?”
“아니에요. 아닌데…… 근데 이게 맞는 말인진 모르겠어요, 소주. 사람들이 너무 작게 얘기하고 있었거든요. 절 보자마자 소곤거리던 걸 멈췄고요.”
“역시 내 흉 같은데.”
원웅은 고개를 젓더니 허리를 숙여서 내 귀에 대고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아주 먼 곳에 지내는 종친이 자결했단 소문이었어요.”
* * *
“어떤 인재는 생전에 고생하다가 죽고 나서 빛을 보지. 청렴한 이름을 남기고, 행적이 재평가되면서 사람들이 칭송할 거다.”
“…….”
“반면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으며 잘 먹고 잘살다가, 죽은 뒤에 좋지 않게 재평가가 이루어져 명성이 져버리기도 한단다.”
등룡 운월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어 찻잔을 두 손에 움켜쥔 채 예의 바르게 상대의 입만 쳐다보았다.
곧 그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오더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비가 볼 땐 월아. 너는 전자로구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정하거나 쓸쓸했더라면 운월은 부친이 자신을 칭찬하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전자로구나’ 하고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좀 갑갑해 하는 기색이 보였다.
“아버님? 소자는 아버님의 뜻을 알기 어렵습니다.”
결국 운월이 솔직하게 털어놓자 운월의 부친은 담뱃대로 탁자를 탕 두드렸다.
“천 귀인과 손잡기를 거부했다고. 폐하가 직접 황명을 내리셨는데도?”
“……소자는 간신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운월의 부친이 담뱃대로 탁자를 한 번 더 두드렸다. 노한 기색이었으나 운월은 단호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잘 먹고 잘사는 간신이 되느니, 당장 빛을 못 보더라도 청렴하게 살겠습니다.”
꿈 많은 학자들이 본다면 칭송할 태도였으나 운월의 부친은 이번에도 담뱃대만 검처럼 휘둘렀다.
“청렴하다는 명성으로 빛을 보고 싶다고? 그것도 어느 정도 이름이 난 상태여야 가능하지. 너 같은 말단 관직은 아무리 청렴하게 살아 봐야 남들이 청렴하게 산 줄도 모를 거다.”
“!”
“지금이야 신입이니 청렴하다, 대단하다 높여 세워 주지. 시간이 지나면 네 직급은 높은 직급이 아니다. 하지만 넌 폐하께 단단히 거슬렸으니 이제 승진하지도 못하겠지.”
“!”
“간신이 되고 싶지 않다고? 간신은커녕 대신도 못 될 거다, 이놈아.”
아버지의 단호한 말에 운월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님은 소자가 궁궐 안에서 사고만 치는 멍청한 후궁의 뒷배를 타고 승진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누가 그런다더냐?”
“그렇게 들립니다.”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딱딱한 대답에 운월의 부친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 귀인은 아직 나라에 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천 귀인을 따르는 게 왜 간신이 되는 거라고 지레짐작을 하는 게냐.”
“그건…….”
“게다가 네 말을 들어보니, 너는 천 귀인과 온 귀인이 싸우는 걸 듣고 돌아왔을 뿐이다. 천 귀인은 후궁들과 사이가 나쁘니, 그들에게 날카로운 말밖에 할 수 없어. 싸울 땐 누구나 험한 소리를 뱉는 법이고.”
“!”
“네 어미도 나와 싸우면 ‘나가라 등신아, 꼴도 보기 싫다’고 말한다. 너는 고작 말 한마디를 가지고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있다고 보느냐?”
부친의 짜증스러운 호통에 운월은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의 말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반박할 말도 없었다.
* * *
비밀 장소에 도착해서 막 수련을 하려 할 때였다.
이곳에 오면 평소보다 집중해서 주위에 기척을 살피는데, 오늘도 그랬다. 수련을 하기 전에 사람이 없는지부터 확인한다.
옷을 갈아입기 전에도 확인하고, 갈아입은 후에도 확인하고.
그런데 뭐야. 옷을 다 갈아입고 나니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지 않는가.
나는 수련용으로 감춰둔 의복을 숨기고, 다시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풀밭에 털썩 앉았다. 여기에 올 사람이야 뻔하지.
“계란아.”
그래, 저 인간.
떡돌이.
나는 풀밭에 앉은 채 떡돌이가 내 곁으로 다가오는 걸 지켜보았다.
떡돌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옆에 앉으면서 물었다.
“화는. 좀 풀렸느냐.”
며칠 전에 싸우고 헤어진 게 자기도 마음에 걸리긴 한 모양이지.
하지만 어쩌나? 나는 대범하지만 화는 쉽게 풀지 않는다. 대범한 사람이 화를 쉽게 풀 거라는 건 사람들의 착각이다.
내 생각엔 화를 쉽게 푸는 건 대범한 사람이 아니라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내 분노를 풀기 위해선 공물이 필요해. 난 막 함부로 화 풀고 그러는 사람 아냐.”
“언제부터 산신령으로 취직했느냐?”
내가 흥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돌리자 떡돌이는 주섬주섬 챙겨온 뭔가를 내밀었다.
보나 마나 떡이겠지, 하고서 째려봤는데 떡이 아니었다.
“그게 뭐야.”
“무림인이 좋아하는 영약이라던데.”
“!”
떡돌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너무 놀라서 그만 벌떡 일어날 뻔했다.
하지만 나는 벌떡 일어나는 대신 떡돌이의 허벅지를 찰싹 내리쳤다.
“?”
내가 갑자기 자기 허벅지를 치자 떡돌이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숨을 고르기 위해 다시 그의 허벅지를 찰싹찰싹 내리쳤다.
“산신령님. 이거 혹시…… 공물이 마음에 든다는 신호입니까?”
떡돌이는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나는 대답할 정신도 없어서 잠시 그의 머리를 잡고 방향을 옆으로 돌렸다.
아니, 정말 놀랐어. 떡돌이가 나한테 왜 영약을 공물, 아니, 선물로 주는 거지? 떡돌이는 내가 무림인이란 걸 모르잖아?
영약. 받고 싶다. 받으면 좋지. 받으면 내공이 쑥 늘어날 테니까.
내 무공은 내공을 운용하는 효율성이 아주 높은 편이지만, 그래도 내공이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떡돌이의 의도를 알 수 없다 보니 좋은 마음보다는 의심스러운 마음이 더욱 컸다.
뭐야. 떡돌이…… 혹시 뭘 알고서 이러나?
놀란 마음이 화난 마음을 앞서서 나는 그의 머리통을 놓아주고 면사를 벗겼다.
그러고서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 보았지만 잘났단 생각만 들 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네가 좋아서 이러는 건지 싫어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떡돌이가 이 말을 하는 것도 나를 떠보려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묻는 건지조차 모르겠어!
젠장. 혹시 기몽 장군이 떡돌이한테 무슨 말을 했나? 내가 입궁하기 전에 천년비라는 무림인인 것 같다던 그 어처구니없는 추측 말이다.
그래. 했을 수도 있겠네. 기몽 장군은 나한테야 끈질긴 사냥개지만, 떡돌이한테는 좋은 부하일 테니.
하지만…….
“난 무림인이 아니니까 영약엔 관심 없어.”
여기선 이렇게 대답해야겠지. 달리 대답할 말이 없어.
여기서 내가 영약을 받고 좋아해 봐야 ‘나는 무림인’이란 신호밖에 더 되겠는가.
선택권 없이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서 떡돌이가 들고 있는 영약을 애써 무시했다.
“공물은 다른 거로 가져와.”
“계란아. 너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데.”
“폐하가 내 분노를 고작 영약만으로 풀려 하니까 그래. 나는 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
“어떤 정성 말이냐?”
“……당과 사줘.”
“당과?”
“안에 뭐 이상한 거 넣어가지고 맛이 유별난 당과를 판대. 그거 사줘.”
“이상한 걸 넣고 파는 걸 왜 굳이 먹으려 하는 건지…….”
떡돌이는 내 말에 당혹스러운 듯했으나, 내가 영약 쪽을 쳐다도 보지 않자 결국 주섬주섬 챙겨온 영약을 도로 집어넣었다.
아 아까워. 아 내 영약!
그걸 보자 속으로 비명이 흘러나왔으나, 나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그러면 짐이 당과를 사주마.”
말을 마친 떡돌이는 곧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참. 고작 당과에 화가 풀리다니. 귀엽구나.”
그럴 리가. 내가 당과 먹고 화가 풀릴 리가 없잖아.
하지만 여기서 스스로 화를 푼다 해놓고서는 화를 더 낼 수도 없는지라, 나는 식식거리면서 요구했다.
“이제 화 풀렸으니 가.”
“안 풀린 거 같은데.”
“다 풀렸어.”
“안 풀린 거 같아.”
“풀렸다니까?”
“주먹에서 힘이나 빼고 거짓말하지. 그리고 전에 짐이 소개해 주려던 그 청렴한 관리 말이다.”
“때릴 거야. 난 봉인을 해제했어. 폐하랑 싸웠으니까. 내가 보자마자 이마를 딱 때릴 거야.”
“……너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던데. 그렇게 나오니 짐이 중간에서 주선해주기 곤란하군.”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