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나한테 반하게 하겠어
뭐야 저 질문은? 지금 나더러 잘못했다고 하는 거야?
“좋게 말하려고 했어. 하지만 내가 말하는 태도만큼 듣는 사람 태도도 중요하잖아.”
떡돌이가 한숨을 내쉬면서 한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 어딘가를 두 손으로 콱 꼬집힌 기분이 들었다.
그게 불쾌해서 딱 잘라 쏘아붙이자, 떡돌이는 “그래. 그래.” 하고 체념 조로 말하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알았다. 그만 자거라.”
하지만 그 태도에 나는 더욱 기분이 상해서, 이불을 확 한 손으로 밀어버리고 상체를 일으키면서 말을 우르르 쏘아붙였다.
“꼬아 들으려고 맘만 먹음 내가 칭찬을 해도 비꼬는 거로 들려. 내가 착하게 굴면 가식적이라 하고, 도움을 주면 꿍꿍이가 뭐냐고 물어.”
“무슨 소리냐.”
“온 귀인이 내게 있지도 않은 아이 얘기 한 건 배려고, 내가 있는 아이 잘 챙기라 한 건 말조심해야 할 일이야?”
“…….”
“그러면 내가 뭐라 말했어야 하는데? 고맙다고? 내가 고맙다고 하면 사람들이 내 욕 안 했을 거 같아? 천만에. 천 귀인은 비꼬는 말도 못 알아먹는 바보라 했을 거야. 난 바보가 아니야! 공부를 안 했을 뿐이야!”
황제는 입을 벌리고 나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곤혹스러워하며 중얼거렸다.
“짐은 널 바보라고 한 적 없는데.”
“누가 뭐라든 신경 안 쓰면 되지 않냐고? 맞아, 신경 안 쓰면 돼. 근데 왜 나만 신경을 안 써야 하는데? 온 귀인도 내 말에 신경 안 쓸 수 있고, 사람들도 내 말에 신경 안 쓸 수 있고, 너도 내 말에 신경 안 쓸 수 있었잖아!”
내가 바락바락 외치는 말속에는 이번 일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천년비로 지내면서 겪은 일들이 모조리 뭉쳐져 있었다.
말을 뱉으면서도 그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열기가 가시지 않아 이마가 뜨끈해졌다.
그래도 더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씩씩거리며 분기를 조절하고 있으려니, 황제는 한숨을 내쉬고서 내가 던진 이불을 도로 끌어와 무릎에 덮어주었다.
“너는 적이 많으니 조심해서 말하란 것뿐이다. 네가 고맙다고 하면 누군가는 널 비웃겠지만, 누군가는 ‘온 귀인이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린다’고 할 테니까. 하지만 거기서 네가 온 귀인이 회임한 아이를 노리는 것처럼 말해버리면 전부 네 탓이 되어 버리지 않느냐.”
나는 그가 덮어준 이불을 도로 퍽 걷어찼다.
“사방이 다 온 귀인 친구들 뿐인데. 누가 그 상황에서 굳이 내 말을 좋게 해석하고 온 귀인을 나쁘게 생각한다고?”
“소여야.”
황제는 날 달래려는 모양인지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지만, 그건 내 이름이 아닌 고로 그리 효과가 없었다.
“내 편이라 생각한 폐하도 온 귀인 편인데. 그 상황에서 내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내 잠재적 아군을 생각해서 온 귀인 말에 당하기만 해야 해?”
“……소여야.”
“난 폐하를 위해서 주먹을 안 썼어! 이 주먹을 봉인했다고! 봉! 인!”
나는 진지하게 말하며 주먹 쥔 손을 내밀었는데.
황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다가, 갑자기 혼자 입술을 악물더니 턱에 힘을 주고 고개를 내렸다.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참는 표정이었다. 나름대로 심각한 척 하지만 어깨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그걸 보자 분노가 더욱 머리 끝까지 뻗쳤다.
이에 주먹을 내리고서 그를 가만히 쳐다보자, 황제는 웃은 적이 없던 척 진중한 표정을 짓더니 달래듯 말하는 게 아닌가.
“궁중에서 주먹다짐을 하지 말란 건 날 위한 게 아니라 널 위한 거다, 소여야. 법이 왜 있다 생각하는 게냐.”
“그 말은 법의 혜택을 받는 사람 앞에서나 해.”
“그게 너이잖느냐.”
“나는…… 그렇지!”
천소여는 그렇겠지. 하지만 천년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나는 주먹을 쥐고 씨근거리며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황제는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단 걸 알겠는지,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키더니, 내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서 말했다.
“흥분했다. 머리 좀 식히거라.”
말을 마친 그는 바람을 쐬겠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자기 방인데. 내 얼굴도 보기 싫단 건가?
화가 났지만 후궁의 몸인지라 멋대로 돌아가 버릴 수도 없었다.
나는 주먹을 쥐고 황급히 심호흡을 했다.
화 나. 화가 너무 많이 나. 아주 많이 나!
* * *
“폐하와 싸웠다고요?”
다음날. 나는 이 분노를 풀기 위해 연얼 군주가 찾아왔을 때 황제와 싸운 이야기를 하면서 씩씩거렸다.
물론 연얼 군주는 황제의 이복동생이니, 싸웠단 얘기를 들어도 황제 편을 들 거란 건 알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연얼 군주는 내 얘기를 듣자 활짝 웃으면서 좋아했다.
연얼 군주가 대놓고 황제를 싫어한단 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복 남매이니 어느 정도는 그의 편을 들 거라 생각했는데.
‘왜 저렇게 좋아하지?’
“되게 기뻐 보이네요.”
그게 너무 의외여서 묻자, 연얼 군주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기뻐요.”
“왜요?”
“내가 폐하를 싫어하니까요.”
“그래도 전엔 내가 폐하랑 잘 지내는 건 싫어하지 않았잖아요?”
아니, 오히려 좀 밀어주는 티를 내지 않았던가?
황당해서 쳐다보자, 연얼 군주는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대는 내 친구니까. 그대가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무슨 소리야? 황제랑 싸워서 기분이 나쁘다는데 ‘아파하지 않으면 좋겠다’면서 좋아하다니? 말이 안 되잖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멍하게 쳐다보아도, 연얼 군주는 다른 설명을 더 하는 대신 밝게 화제를 돌렸다.
* * *
평소와 좀 다른 행동을 한 연얼 군주는 평소보다 돌아가는 시간도 빨랐다.
그 바람에 갑자기 내 시간만 붕 떠버렸다.
수련을 하러 가자니 얼마 안 가 해가 질 것 같고.
청적에 가자니 황제를 마주칠까 봐 화가 나서 싫고. 이런 기분으로는 서책도 읽기가 싫으니.
‘그럼 개시시나 보러 갈까?’
하지만 개시시는 다른 후궁들 눈치를 보느라 내게 사적으로 말을 걸지도 못하잖아.
찾아갔는데 ‘돌아가줬으면’ 하는 눈치를 주면 어떡해?
결국 개시시에게 찾아갈 마음도 싹 사그라져서, 나는 밖으로 나가 평상에 드러누워 새파란 하늘만 쳐다보았다.
며칠 전만 해도 이 시간이면 아직 밝았는데.
이젠 해도 점점 짧아지고 있어서 파란 하늘 사이사이로 벌써 불그스름한 기운이 살짝 보였다,
그런데 하늘에 뜬 구름 개수를 아홉 개쯤 셌을 때쯤.
“소주, 소주.”
원웅이 사립문 안으로 들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얼른 다가와서 곱게 접은 서신을 내밀었다.
“개 답응께서 소주께 전하라 하신 서신이에요.”
뭐? 개시시가? 아니, 얼마나 먼 데 산다고.
“남들 눈치 보느라 서신으로 안부를 묻나봐.”
내가 중얼거리자 원웅은 “그런가봐요.” 하고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별로 내용이 궁금하진 않았지만, 나는 마지못해 방 안에 들어가 서신을 펼쳤다.
내용이야 뻔했다. 후궁들 눈치를 보느라 내게 말을 걸지 못하는 게 미안하다, 그래도 늘 신경 쓰고 있다, 뭐 이런 거 아니겠어?
‘아니네?’
“소주?”
내가 서신을 뚫어져라 보고만 있자, 같이 안으로 들어온 원웅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나는 원웅에게 시원한 마실걸 가져다 달라 부탁해 내보낸 다음, 얼른 상 앞으로 다가가 서신을 다시 살폈다.
이거 개원이. 개원이가 쓴 답서잖아?
* * *
보내주신 서신은 잘 받아 보았습니다, 귀인.
제 동생의 재능을 찾아주시기 위해 연무장을 백 바퀴 돌리시겠다니. 마음이 참으로 넓으시군요.
이렇게 넓은 마음을 지닌 분과 제가 그날은 어떻게 싸운 건지. 새삼 후회가 됩니다.
제 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귀인께선 글씨를 참 잘 쓰시는군요. 서체가 반듯하십니다.
글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지요. 서체를 보니 귀인의 마음도 반듯할 것 같습니다.
혹시 글을 어디서 배우셨는지요?
* * *
뭐야…… 개원이 이거, 개시시랑 사이가 안 좋나? 복수를 하기 위해 연무장에서 기합을 줄 거라 했는데 마음이 넓다니? 심지어 잘 부탁해?
혹시 반어법인가?
“…….”
어쩌면 황제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내가 시비를 걸었는데 개원이가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는 걸 보니까, 더이상 개시시를 데리고 화풀이를 할 마음도 안 드네.
허탈해. 적당히 아무렇게나 답장해야겠다 싶어서, 나는 종이를 꺼내 ‘아 예’ 하고 적었다.
하지만 막상 서신을 접고 있자니, 이건 아니다 싶어서 도로 펼쳐 서신을 찢어 버렸다.
그래. 이러면 안 되지. 난 개시시랑 친하게 지내서 이놈을 한 번 더 만나야 한다고.
내 무공 실력을 쌓은 다음 개시시가 이놈을 불러내게 해서 복수해야 해.
하지만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까, 개원이 이놈과도 편지가 끊기지 않게 해야 한다.
개시시에게 사촌을 불러달라 청했는데, 개시시가 남들 눈치 보인다고 거절하면 어떡해? 개시시는 남들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던데.
게다가…… 어쩌면 그가 나를 홀린 다음 죽여 버린 것처럼, 나도 그를 홀린 다음 죽이는 것도 좋을지도 몰라.
그러면 내가 받은 충격. 연인에게 배신당한 충격과 고통을 그대로 돌려줄 수 있으니 말이다.
아아. 생각해보니 괜찮겠어.
개원이 그놈이 ‘천소여’에게 빠지게 한 다음, 나한테 빠져서 흐느적거리고 있을 때 정체를 밝히고 복수하는 거야.
나다! 네가 죽인 천년비다! 이렇게. 아주 놀라 뒤집어지겠지. 흥.
그런데 유혹은 어떻게 하더라?
“…….”
뭐. 별거 안 해도 되긴 할 거야.
개원이 그놈, 전에 나랑 싸우고 헤어졌는데도 지금 편지로 ‘서체가 예쁘네요’ 이딴 말이나 하고 있잖아.
서체가 예쁘단 건 핑계고 사실은 내가 예쁘단 거지. 개원이 취향은 천소여 얼굴인 게 분명해.
그래. 대충 개원이에게 뭐라고 답서를 쓸지 생각 났다.
개원이는 ‘천소여’한테 첫눈에 반한 눈치이니, 이 사실을 알고 있단 걸 보여주자.
‘천소여’는 후궁이니까 이쪽에서도 적당히 틈을 보여주지 않으면, 개원이는 바로 포기하고 마음을 접을 거다.
사실 이제 맞는 거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거든.
* * *
내 서체까지 예뻐 보이는 걸 보니 나한테 반하셨나 보네요.
곤란해요. 저는 후궁이거든요.
하지만 매몰차게 거절하면 소협의 마음에 빵구가 날 테니, 거절의 말은 하지 않겠어요.
어쩌면 소협은 금지된 사랑에 더 흥분하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런. 소협은 정파 영웅이라 들었는데, 그런 걸 좋아하시다니.
하긴. 사람이 다 장점만 있을 수는 없죠.
나도 단점이 있어요. 소협 같은 사람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단점이요.
내 어디가 그렇게 좋던가요?
* * *
“?”
개원은 천 귀인에게 받은 답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키고서 서랍장을 열었다.
자신이 천 귀인에게 뭐라고 편지를 보냈던가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보낸 서신이 여기에 있을 리는 없기에, 그는 결국 서랍장 문을 닫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개원의 미간 사이가 구겨졌다.
그는 천 귀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그녀를 통해 어느 후궁의 몸 안에 천년비의 영혼이 들어 있나 살피려 했다.
물론 그 전에, 천년비와 서체가 비슷한 천 귀인을 가장 먼저 떠보려 했다.
천 귀인 몸 안에 천년비의 영혼이 들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서체 얘길 한 건 기억이 나는데…….
‘내가 혹시 졸다가 이상한 말을 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