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말다툼
정행부 지행청의 3품 관리 ‘등룡’에 오른 청년은 나이는 젊지만 가문이 좋고 학식이 높은 데다 청렴하기까지 해 뭇 사람들의 평가가 좋은 신입이었다.
등룡이 황제의 부름을 받았을 때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언젠간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용은 몸을 웅크리고 있어도 티가 나는 법 아닌가.”
“자네는 크게 쓰일 걸세.”
친구며 스승들이 모두 그에게 좋은 말을 해주었고, 등룡에 오른 청년은 신입다운 패기와 꿈을 안고서 황제와 독대했다.
대체 어떤 명령을 하시려고 나를 따로 부르신 걸까…… 조금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신 등룡 운월,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가까이에서 황제를 마주했을 때는 어찌나 심장이 떨리던지, 목소리가 자꾸 떨려서 감당이 안 될 지경이었다.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가까이 오라.”
그는 흥분해서 귀까지 벌게졌으나,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고 조심스레 황제의 책상 근처로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하지만 황제가 내린 명령은, 그가 상상한 것과는 조금 방향이 달랐다.
“귀인 천 씨가, 짐이 너무 총애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공격을 받는 모양이더군. 후궁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천 귀인이 힘써 해결할 일이겠으나, 후궁들과 결탁한 관리들이 밖에서 천 귀인에게 음해와 모함을 계속해대니 그 아이가 많이 힘들어한다.”
뜬금없는 후궁 이야기에 운월은 ‘근데 그게 왜요?’라고 물을 뻔했으나, 우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하지만 천 귀인은 정치나 권력에 관심이 없어 자신을 보호하질 못하고 있지. 그렇다고 외척 세력을 붙여 주자니, 그것도 곤란해.”
“예…….”
운월은 아직도 황제의 의도를 짐작지 못했다.
다른 관리들에게 너무 대놓고 후궁들과의 결탁을 내보이지 말게 하란 말씀이신가? 관리들을 진정시키란 뜻이실까? 그의 상상력은 이 정도가 끝이었다.
“그러니 경이 관리들 사이에서 천 귀인과 관련해 나오는 이간질과 공작들을 밖에서 막으라.”
황제는 운월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염려가 되는지, 결국 대놓고 명령을 내려주었다.
‘네가 천 귀인의 세력이 되어라’고.
운월은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렸으나, 면사 아래로 드러난 굳은 입매를 보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하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게 황제의 명령이라면 따라야지 어쩌겠는가.
그러나 황제의 요구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게 황명이란 건 비밀로 하라.”
그 뒤에는 더 어려운 요구가 붙어 있어서, 그는 더욱 당혹스러워졌다.
황제의 명령대로 황명임을 감추고 천 귀인을 챙기게 된다면, 그는 멍청하기로 유명한 후궁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단 이유만으로 지지해주는 관리가 될 것이다.
이런 행동은 보통 야망을 가지고 권력을 높이려는 이들이 하지, 그처럼 청렴하고 고고하단 칭송을 받는 관리가 하진 않았다.
만약 그가 멍청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천 귀인을 지지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대놓고 비웃어댈 것이었다.
청렴하다는 관리도 결국 돈과 권력만을 노린다고.
그러다 보니 운월은 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순간 막막해졌다.
“대답은?”
하지만 황제가 재차 질문을 던지자 그는 깨달았다. 해야 할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단 걸.
“예, 폐하. 영광이옵니다.”
그러나 경험의 미숙함에서 드러난 굳은 표정은 가려지지 않았다.
월요 황제는 이 모습을 뚫어져라 보다가, 조금 미안하긴 했는지 조건을 붙여주었다.
* * *
“오늘, 네 세력이 되어준다면 평판을 좋게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관리를 불러 얘기해 보았다.”
오늘은 시침에 부르지 않는다는 떡돌이의 말에 따라 혼자 드러누운 채 떡을 먹고 있는데, 황제가 멋대로 내 처소에 찾아와서는 ‘누워서 떡 먹지 마’라고 잔소리를 한 다음 한 말이 이거다.
나는 구시렁거리면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그 관리랑 결탁하면 되는 거야?”
“이틀 뒤에 후궁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지?”
“그래?”
“…….”
“들어본 거 같기도 해. 그런데 그게 왜?”
“그 자리에 참석해서 널 본 다음, 네 측근이 될지 말지를 결정하라 그랬다.”
뭐야?
“그럼 그 관리가 내 사람이 되기 싫다고 하면…….”
“안 되는 거지.”
단호하게 말한 떡돌이는 내가 누워서 먹던 말랑한 떡을 하나 집더니, 떡에 묻은 가루를 탈탈 멀면서 덧붙였다.
“너도 마찬가지다. 그 관리를 보고, 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 쪽에서도 거절해. 이런 관계는 싫은 사람끼리 억지로 붙여 봤자 역효과만 나니까.”
* * *
어두운 밤.
연얼 군주가 촛불도 켜지 않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자, 측근 부하들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초조하게 주위를 서성였다.
그들은 수상한 자와 연얼 군주가 만나는 걸 보았고, 연얼 군주가 수상한 자에게서 어떤 정보를 얻는지도 보았다.
연얼 군주가 어떤 마음인지 그들은 누구보다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 사실을 감히 다른 이에게 알릴 수조차 없다는 게 얼마나 애가 탄 지도.
“전하.”
이 각여 분이 더 지났을 때, 그래도 한 부하가 참지 못하고 연얼 군주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자가 건넨 서신을 다 믿으십니까?”
다른 부하도 얼른 때를 맞추어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앞뒤가 맞긴 했으나, 서신이 거짓일지도 모릅니다.”
부하들이 걱정스럽게 자신을 불러대자, 연얼 군주는 씁쓸하게 웃고서 서신을 접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 거짓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가능성만으로도…….”
화가 난다. 그리고 그 화를 누르고 있기가 어려웠다.
당장 황제를 찾아가 ‘정말로 내 오라버니를 죽였냐’고 묻고 싶은 만큼.
그래도 연얼 군주가 조금이나마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자, 또 다른 부하는 얼른 연얼 군주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필체는 분명 군왕 전하의 필체가 맞습니다. 하지만 필체는 흉내 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연얼 군주는 대답 대신 질문했다.
“전문가는?”
필체를 흉내 내는 것도, 다른 사람이 흉내 낸 필체를 분석해 내는 것도 최고라고 하는 사기꾼 출신 전문가에 관해 묻는 거였다.
연얼 군주가 수상한 자에게 서신을 받자마자 한 행동도 그 전문가란 자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사나흘은 지나야 도착할 겁니다.”
부하의 대답에 연얼 군주는 “그래.”하고 쓸쓸히 중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방 안은 어두운데. 눈꺼풀 안에서는 부싯돌 같은 빛이 번쩍였다.
“아니길 바라자. 아니길.”
* * *
떡돌이가 예고한 것처럼 후궁들이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후궁들만 모인다더니. 막상 모이고 나니 황후와 떡돌이까지 모인, 제법 성대한 정찬이었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근처에 악사들도 한 무리를 불렀다. 우리가 식사하는 내내 음악을 연주하도록.
“이 정도면 연회 아닐까?”
“제 생각에도 그래요, 소주. 하지만 황후 마마께서 주관하신 거니까 그 말씀은 안 하시는 게 낫겠어요.”
원웅과 내가 소곤거리는 동안에도 악사들은 계속 음악을 연주했고, 태감과 궁녀들은 바쁘게 후궁들과 황후, 황제 사이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빈 접시에 덜어주었다.
다른 후궁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재밌게 놀았지만, 나는 딱히 얘기를 나누며 놀 사람도 없어서 식사에만 열중했다.
그나마 친한 게 개시시인데, 개시시는 다른 후궁들에게 붙잡혀 맞은편에 앉아 있으니 뭐. 부를 수도 없고.
“온 귀인께서는 이제 슬슬 입덧이 심할 시기가 아닌가요?”
“그러게요. 배는 아프지 않나요?”
“태동도 있나요, 귀인?”
“내 언니가 회임하는 걸 본 적이 있어 아는데, 아직 태동이 올 시기는 아닐걸.”
그중에서도 후궁들에게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건 온 귀인이었다.
혼자서 식사하는 나와 달리, 온 귀인은 사방에서 말을 걸어오는 통에 제대로 뭘 먹지도 못할 지경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한 번씩 사람들의 시선이 황후에게 몰려갔다.
“황후 마마 덕분에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계절을 시원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온 귀인이 바로 회임한 건 황후 마마가 덕을 쌓아서인 것 같아요.”
그러고는 황후에 대한 칭송이 또 한 다발. 이후 다시 온 귀인 이야기를 하며 칭찬 한 다발. 이렇게 반복. 반복.
물론 후궁들이 한 번씩 떡돌이에게는 말을 걸었지만, 떡돌이가 연거푸 세 번 ‘생각할 게 있다’면서 대답을 거절하자 다들 자연히 황제에게도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청렴한 관리를 준비해 뒀다더니. 그 관리는 대체 어딨단 거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슬슬 배도 불러왔고, 눈치껏 자리를 떠날 수 없나, 지루한 생각이 들 즈음이었다.
내내 칭찬만 받더니 온 귀인도 좀 지루해졌는지, 갑자기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 폐하는 딸이 좋으십니까, 아들이 좋으십니까?”
“짐은 그 아이가 딸이었으면 좋겠군.”
“그러면 저도 딸이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폐하.”
별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른 후궁들과 달리 황제에게서 ‘바쁘다’ 외 다른 대답을 들은 온 귀인은 만족스레 웃으면서 차를 마셨다.
거기서 끝내면 좋았을 텐데.
“아들은 천 귀인께서 낳아 주시겠지요.”
온 귀인은 이번에는 뜬금없이 내 이름을 끄집어냈다.
튀긴 교자를 먹으면서 쳐다보자, 온 귀인은 천소여를 따라 한 슬픈 눈썹을 평소보다 더 내리면서 온순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형제자매가 가깝게 크려면 나이가 비슷한 게 좋으니까요.”
여기에서 그만뒀어도 괜찮았을 텐데. 온 귀인은 기어코 가만히 있던 내게까지 이상한 말을 했다.
“염려 말아요, 천 귀인. 귀인은 폐하께서 가장 총애하시니 곧 아이가 생길 거예요.”
그러고는 자기 두 손을 꼭 맞잡고서 이렇게 말하지 뭔가.
“저도 천 귀인이 빨리 아이를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해줄게요.”
나는 누가 내 욕을 하는 건 잘 알아듣는 편인지라, 온 귀인이 내게 좋은 의도로 저 말을 한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온 귀인의 거만한 말뜻을 알아들었다고 해서, 내가 그녀를 찾아가 턱을 주먹으로 날리면 안 되는 일이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지.
나도 몇 개월간 후궁 몸으로 지냈더니, 후궁들이 싸울 때 주먹을 주고받지 않는단 걸 빠삭하게 안다.
나는 온 귀인이 나를 놀리고 있단 걸 깨닫자마자 얼른 그녀에게 말로 돌려주었다.
“기도해준다니 고마워요. 하지만 온 귀인, 내 생각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기도하기보단, 온 귀인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인데요.”
* * *
식사를 마칠 때까지 떡돌이가 말해주었던 그 관리는 찾아오지 않았고, 다행히 온 귀인이 내게 시비를 걸다가 조용해진 후 더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시침을 들러 갔을 때 떡돌이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
“네가 소개해 준 관리는 안 나왔나 봐.”
떡돌이도 현장에 있었으니 다 봤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런데 의외로 떡돌이는 바로 대답했다.
“너는 자기가 모시기에 그릇이 너무 크다며 거절하더라.”
“날 그렇게 좋게 봤대?”
내가 신이 나서 물었으나 떡돌이는 이번에도 딱딱하게 대답했다.
“돌려서 거절한 거다.”
“알았어.”
나는 중얼거리고서 침상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 이불을 덮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그의 잔소리는 끝났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떡돌이는 더 잔소리를 하거나, 떡을 주거나,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세력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잠시 조용히 내 옆모습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오늘 발언은 내가 듣기에도 오해를 살 만한 말이었다, 계란아.”
“내가 왜?”
“짐은 네가 나쁜 의도 없이 말해대는 걸 잘 알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니 좀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 말해도 듣는 사람이 꼬아 들으면 뭘 어떻게 하겠어.”
“좋게 말해보려는 노력은 해 보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