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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04화 (104/283)

##  104화. 평화로운 쪽과 평화를 잃은 쪽

시침을 들러 갔더니 떡돌이가 내게 따끈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주면서 ‘시름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맞다고, 있다고 했더니 그게 뭐냐고 물어서, 세력을 기르고 싶으니 추천해 줄 대신이 있냐고 물었다.

내가 못 할 질문을 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떡돌이는 내 질문에 입을 손가락 두 마디가 들어갈 정도로 벌리더니 재차 물었다.

“방금 뭐라고……?”

“세력을 키우고 싶어. 내 세력.”

이해를 잘 못 하는 눈치이기에 재차 설명해 주자, 떡돌이는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더니 한참을 생각하다가 또 같은 질문을 했다.

“역시 짐이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너 눈치가 없구나?”

“눈치가 있으니 재차 묻는 거다. 세상에 어느 후궁이 대신들과 결탁해 세력 기른단 얘길 황제에게 하는 게냐?”

“하면 안 돼? 이건 폐하 전문이잖아?”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떡돌이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천씨 가문 사람들은 야망을 가지고 뒤에서 온갖 짓을 다 하려 드는데. 적출 딸인 네가 이러고 있다니……. 네 가문에서 좋아하진 않을 거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이 날 버렸을까?”

시무룩해서 묻자 떡돌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기 이마를 짚더니, 아까보다 한결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거기서 그리 말하면 짐이 뭐가 되느냐. 그리고 총서서가 언제 널 버렸다고?”

“총서서가 누구야?”

“네 아버지!”

아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었던 거 같기도. 연비 애비라고만 기억하다보니 잠시 헷갈렸다.

“난 아버지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 그래서 헷갈렸어.”

어쨌든 딸이 아버지 품계를 모르는 건 이상한 것 같기에, 나는 적당히 둘러대고서 과일을 떡돌이의 입에 물려 주었다.

다행히 떡돌이는 크게 의아하진 않은 듯 순순히 떡을 받아먹었다.

“평소 네 언행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아니, 오히려 나를 좀 무시하는 것처럼 말하고는, 떡을 두어 개 더 먹으면서 문밖에 진 오 공공 그림자만 보다가, 수건을 꺼내 손을 닦은 뒤 말했다.

“누구와 손을 잡을지는 네가 자유롭게 고르거라. 네 마음대로.”

“내가 고르면 그 사람들이 나한테 와?”

“그럴 리가.”

“근데 나더러 고르래?”

“일단 골라서 짐에게 내일 말하거라. 짐이 보고 결탁한 후궁이 있는 자인가 없는 자인가 알려주마.”

* * *

“눈칫밥은 서출인 영빈 마마가 받고 자랐다던데. 천 귀인께서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전혀 그렇게 안 들립니다.”

다음날 천 귀인이 돌아간 후. 오원요는 월요 황제가 의복 입는 걸 도와주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월요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는 다 괜찮은데 말을 너무 이상하게 한다.”

그분이 다 괜찮으시다고요? 말만 이상하게 하시는 게 아닐 텐데요?

오원요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감히 황제가 총애하는 후궁을 이상하게 말할 수 없기에 “그럼요 그럼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가 월요가 ‘지금 내 아내가 말을 이상하게 한다는 거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오원요는 황급히 자기 입을 두어 번 두드리고서 사죄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귀인께서 말을 이상하게 하신단 뜻은 아니었습니다.”

“되었다.”

그나마 양심이 있는지 황제가 탓하지 않고 넘어가려 들자, 오원요는 안심해서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도 잘되지 않았습니까? 천 귀인께서는 최소한 몰래 일을 꾸미실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까요.”

“그렇지.”

“폐하께 참으로 솔직한 분이십니다. 우리나라는 풍습이나 관례상 후궁들이 대신들과 결탁하는 건 막기 어려우니까요.”

의복을 다 입은 월요는 마지막으로 얼굴을 가리는 면사를 착용한 다음,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며 말했다.

“세력이 없으면 보호가 안 되긴 하지. 어쩌면 내가 지켜보면서 쳐낼 건 쳐내고, 천 귀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부분만 쓰게 해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오원요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승언이 쪽을 힐긋 쳐다보며 웃었다.

“제 생각에 귀인께선 아마 제일 세력이 큰 사람들을 순서대로 적어오실 듯합니다.”

단순하시니까요. 오원요는 뒷말을 생략했으나, 승언은 다 알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월요 황제 역시 오원요가 생략한 뒷말을 이해했으나 차마 부정하진 못했다.

* * *

“자.”

그리고 그날 밤. 시침을 들러 온 천 귀인은 거들먹거리면서 자신이 가져온 두루마리를 황제에게 내밀었다.

“여기저기서 듣고 세심하게 골랐지.”

꽤 자신만만하게 명단을 내미는 걸 보니, 그들이 짐작한 대로 명망 있는 대신들 이름을 적어 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대신들은 이미 결탁한 후궁이 있을 텐데.

월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천 귀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명단을 보는 시늉은 했다.

그러나 명단 첫 줄을 보자마자 월요는 자신이 뭘 잘못 보았단 생각에 아래쪽을 서둘러 보았다.

하지만 아래쪽을 보아도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이 명단은…….

‘굉장하군. 간신만 골라잡으셨는데?’

‘이렇게 고르기도 힘들 거 같은데.’

‘간신 수집가 수준이잖아?’

어깨 너머로 명단을 본 오원요와 승언 역시 입을 벌리고 속으로 탄식했다.

월요 황제는 명단을 덮고서 천 귀인을 쳐다보았다.

* * *

원웅과 부성, 귀자, 비원에게까지 정보를 수집해서 세심하게 고른 명단인데.

내가 너무 눈에 띄는 사람들만 골랐나? 이름을 보여주자 떡돌이의 표정이 떡돌이에서 황제로 변했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

그 표정이 너무 노골적이라 슬쩍 물어보자, 황제는 손가락으로 내가 건넨 명단의 한 가운데 있는 인물을 짚었다.

“이자. 평판이 아주 안 좋은 거 아느냐, 계란아?”

“응.”

“그럼 이자는?”

이번에 황제가 짚은 건 명단의 첫 번째에 올라온 사람이었다.

“당연히 알지. 설마 내가 그것도 모르고 명단에 적었겠어?”

날 무시하는 그 태도가 좀 어이가 없어서 대답하자, 황제는 이마를 짚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내게 물었다.

“권력이 강하고 평판이 낮다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왜 이렇게 죄다 평판이 낮은 자들만 골라잡은 거지? 여기서 권력이 강한 사람은 딱 하나뿐인데. 이자도 평판이 너무 낮아서 후궁들이 아무도 결탁하려 하지 않은 자다.”

“그렇다더라고.”

“그런데 왜 이런 자들만 적은 거냐. 이중 몇몇은 너희 가문과도 사이가 나빠.”

“오해를 산 걸지도 모르잖아. 오해를 사서 외로워하고 있을지도 몰라.”

“!”

“직접 보기 전엔 판단을 안 하려고. 오해를 산 거라면 내가 챙겨주고 싶기도 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면 좋잖아?”

내가 그랬듯이.

와, 나 진짜 배려심이 대단한데? 무림 악적이 이 정도면 정말로 어마어마한 배려심이다.

스스로 한 말에 감동을 받아서 나는 떡돌이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떡돌이는 감동을 받기는커녕, 있던 감동까지 다 새어나가 메말라버린 표정이었다.

그런 얼굴로 떡돌이는 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건넨 명단을 도로 건네며 단호하게 말했다.

“짐이 골라주마. 생각해보니 그게 낫겠다.”

* * *

그 시각.

연얼 군주는 결국 고민 끝에 오라버니를 죽인 범인을 안다는 자를 만나러 약속 장소로 나갔다.

물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기에 혼자 이동하는 건 아니었다.

주위에는 실력이 뛰어난 호위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도 호위들이 그녀를 지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긴장을 감추긴 어려워서, 연얼 군주는 이동하는 내내 풍성한 소맷자락 안에서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만약 상대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거라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다. 오라버니의 죽음을 이용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그렇게 이동하고 있자니 마침내 약속한 장소가 나타났다.

인적이 아예 없는 공터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나무.

나무 주위로 몇 겹이나 되는 부적을 늘어놓아서, 척 보기에도 함부로 가서는 안 될 것 같은 곳이었다.

“내리시겠습니까?”

연얼 군주가 마차 창문을 열고 그 나무를 보고 있자니, 옆에서 따라온 호위가 물었다.

“우리 외 다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나도 여기서 기다리겠다.”

마차를 끌고 온 하인들이 마차가 떨어지지 않도록 잘 고정시키는 동안, 연얼 군주는 창문 주위를 살폈다.

감히 자신에게 오라버니의 목숨을 대가로 거래를 시도하려 한 이가 누구인지를 찾아야 했다.

그때.

“제 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주 전하.”

마차 위쪽. 마차 천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부근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얼 군주가 대답하기도 전에 주위를 살피던 호위들이 무기를 빼 들고서 위를 향해 경계태세를 취했다.

“되었다.”

연얼 군주는 손을 뻗어 그들에게 진정하란 신호를 보내고서 직접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손을 잡지도 않았다.

우두커니 선 군주는 나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커다란 나뭇가지 위.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쓴 사람이 검은 무복 차림으로 매달려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검은 무복 차림의 사람은 나무에서 툭 내려오더니 연얼 군주를 향해 제법 예의 바른 인사를 올렸다.

“평소 흠모하던 분을 이렇게 만나 뵈니 참으로 기쁩니다, 군주 전하.”

괴상한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린 상대는 분위기가 무거웠다.

그런데 가면만 달빛을 받아 반질반질 빛이 나니 어딘가 소름 돋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수상쩍은 분위기는 연얼 군주에게 어떤 두려움도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연얼 군주는 이 수상한 자를 보자 더욱 날카로운 표정으로 변하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거만하게 지시했다.

“내 오라버니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안다고.”

오만한 태도였으나 수상한 자는 조금도 기분 나쁜 내색 없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지요. 제가 설마 모르는 일로 군주 전하께 뵙고 싶다 하진 않았겠지요.”

연얼 군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도 자신의 오라비가 좋은 성정이 아니란 건 알았다.

그는 누이동생에게는 친절했으나, 사람을 대할 때 좋고 싫은 게 뚜렷해 친구가 많은 만큼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에게 오라비는 단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 오누이만 남게 된 후. 두 사람은 서로를 평생 지켜주기로 두 손을 잡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이제 지킬 수 없게 되었으나, 복수만큼은 꼭 해주어야 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를 죽인 그자. 그게 누구든 내가 반드시 죽이겠어.’

“그게 누구지?”

흥분을 감추며 연얼 군주는 차갑게 물었다.

“단순히 누구라고 말만 해서도 안 된다.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믿을 수 없으니까. 진실이란 증거를 같이 대.”

“물론입니다.”

“거짓을 말할 경우…….”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데려온 수많은 호위들이 동시에 검을 빼내어 수상한 자를 향해 겨누었다.

“넌 죽는다.”

위험한 협박을 받았는데도 수상한 자는 오히려 어깨를 떨며 웃을 뿐. 조금도 겁이 난 기색이 아니었다.

“마음대로 하시지요.”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수상한 자는 곧 품 안에서 작은 서신을 꺼내어 연얼 군주에게 내밀었다.

“이걸 보시면 누가 범인인지 아실 겁니다.”

“무엇이지?”

“군왕 전하께서 암살당하기 전날 저희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수상한 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호위들이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이미 그자는 모습을 감춘 후였다.

연얼 군주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자가 건넨 서신을 펼쳤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황제가…… 오라버니를 죽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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