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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03화 (103/283)

##  103화. 대놓고 묻지 마시오

문안에 갔는데, 내가 말을 걸어도 다들 대답을 하지 않는다.

개시시가 슬쩍슬쩍 내게 무언가 눈치를 주긴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그녀 역시도 내게 제대로 말을 걸지 못했다.

그나마 제대로 말 걸어 주는 게 연비 정도.

“주도는 우 귀인이 했지만 실행은 온 귀인이 하더라.”

“내 말을 씹는 거?”

“언니 도움이 필요하니?”

우아하게 턱을 들어 올린 연비가 놀림 반 조롱 반으로 묻는다.

하지만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긴 할 태세였다. 공짜로 도와주진 않을 눈치지만.

“어떻게 도와줄 건데?”

“방법은 많지. 어떻게 갚을지부터 골라두련.”

돈 빌려 달라니까 황제한테 빌리라던 사람 어디 안 가지.

구시렁거리고 있으려니 연비는 짧게 웃고서 먼저 걸어갔고, 영빈은 연비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면서 나를 쏘아보았다.

하여튼 그렇게 일방적으로 무시당하는 문안이 끝난 후. 간식을 먹고서 홀로 궁궐을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심궁 근처에 있는 춘로를 걸어가고 있는데, 뜻밖에도 아는 얼굴을 보았다.

‘비원. 그자다.’

우 귀인에게 수상쩍은 부탁을 받고, 그녀에게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묻어 달란 부탁을 하고, 내게 ‘천년비냐’라고 묻기도 했던 그자.

전에는 얘기를 깊게 나눌 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헤어졌지.

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되나? 지나가다가 나를 발견하는가 싶더니, 비원이 곧장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온 그는 내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더니, 평범한 관리가 평범한 후궁을 만난 것처럼 물었다.

“날씨가 너무 무덥지요. 산책하기 기꺼운 날씨는 아닌데.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날씨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눈으로 나를 샅샅이 살폈다. 그날 밤 싸운 일을 떠올리는 건 나만이 아닌 듯했다.

“괜찮다.”

어쨌든 묻기에 덤덤하게 대답하자, 그는 좀 불만스러운 눈으로 나를 다시 살피더니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잠시 저쪽으로 오시지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

비원이 따라오라면서 앞서간 곳은 당장 사용하진 않는 것 같지만, 완전히 버려진 것 같지도 않은 어느 건물 부근이었다.

그곳 기둥 뒤로 걸어간 그는 ‘혹시 누가 있진 않나?’ 싶어 유심히 살피는 내게 좀 한심스러워하는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웬만해서는 오는 이들이 없으니 안심하시지요. 당신이 진짜 천년비라면 사람의 기척이 있나 없나 직접 확인하는 것도 이상하지만요.”

그는 눈빛만 불만스러운 게 아니었다. 목소리도 불만스러웠고 하는 말도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두 눈에 아주 불만이 가득하신데?”

그 태도가 못마땅해서 나는 결국 대놓고 그의 태도를 지적했다.

“유감이지만 그대가 불만을 가진다고 해서 내 존재가 부정되지는 않아.”

비원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압니다.”

알면서 그래?

“그리고 지금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건 나 아닌가? 네가 불만을 늘어놓을 게 아니라?”

내 지적에 비원은 거만한 태도로 내 질문을 어림짐작했다.

“제가 어떻게 그쪽 영혼이 다른 사람 몸에 있단 걸 쉽게 받아들였나. 이게 궁금한 거겠지요.”

뭐라는 거야?

“관련이 있으니 쉽게 받아들이겠지. 그건 안 궁금해.”

“!”

“내가 궁금한 건 그거야. ‘진짜 천소여’ 영혼은? 어떻게 됐어?”

사실 비원을 만나면 무슨 질문을 할지 고민해 보았는데. 죄다 까먹었고, 지금 남은 질문은 딱 이거 하나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비원은 내 질문에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그 질문을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내 몸은 심장이 없더라?”

“!”

“그래서. 난 이 몸에서 살아도 상관없어. 근데, 그러려면 천소여 영혼 행방이 중요하잖아.”

천소여도 이 몸에서 살고 싶어 할 수 있고. 그러면 돌려줘야 하니까.

그런데 진짜 왜 저러는 걸까? 비원은 내 말에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정말로 당혹스럽습니다. 제가 상상한 성격과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어서.”

“뭘 기대했는데?”

“고고한 늑대요. 매정해서 남에게 정도 없는 늑대 말입니다.”

비원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뒷말을 이었다.

“그 몸이 마음에 드시면 그 몸을 사용하면 됩니다. 몸의 원주인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하지 않고요. 그게 제가 생각한 당신의 모습입니다.”

개소리, 라고 대답하려 했으나 웬걸. 말을 하는 그는 퍽 진지한 얼굴이었다.

개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그 태도에 나는 조금 감동했다.

“……처음이다.”

“뭐가 말입니까.”

“내가 상상보다 더 사회성이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

“전 칭찬한 게 아닌데요.”

“속뜻이 칭찬이잖아.”

“아니, 나는-.”

“고마워. 나 힘낼게.”

두 손을 주먹 모양으로 만들고서 웃자, 비원은 입술을 몇 번 뻐끔거리더니 자기 머리에 팔을 올렸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던 그는 결국 한숨만 내쉬고서 말을 돌렸다.

“뭐 그거야 됐고. 어쨌든 혼령술에 관한 문제라면 단주님이 일임하고 있으니 단주님께 물어보십시오.”

“단주님?”

“사하비단 단주님. 타천천 님 말입니다.”

“걔가 이 일에 어떻게 얽혀 있는데?”

물론 내가 내 몸에서 깨어났을 때 타천천을 보긴 했지만.

“본인 말론 자기가 은인이래.”

그자가 내 몸을 가지고 있는 눈치이긴 했어. 내가 중얼거리자 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단주님께서 죽은 당신을 살려내려 했습니다. 부작용으로 이 꼴이 됐지만요.”

“날 살려내려 했다고? 타천천 그 변태가?”

“제 상사를 꼭 제 앞에서 변태라 불러야 할까요?”

비원은 재차 한숨을 내쉬고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때문이었다.

무슨 공놀이라도 하나. 사람들이 우르르 풀을 밟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자들이 이쪽으로 넘어올 눈치가 아니자, 비원은 아까보다 훨씬 작아진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튼 그 부분은 단주님께 물으시고. 단주님께서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그쪽을 지켜 달라고요.”

“타천천이 왜?”

“그것도 단주님께 물어보시고요. 여하튼 그래서 알아보니 그쪽, 폐하께 총애를 받는데 보호 세력이 하나도 없더군요?”

“보호 세력이 뭐야?”

“말 그대로요. 헛소문이나, 진실이긴 한데 악의를 섞은 진실이 떠돌아다닐 때 누군가 나서서 눌러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쪽은 그게 하나도 안 되고 있어요. 그래서 평판이 안 좋습니다.”

뭘 어떻게 알아보았기에 내가 궁궐에서도 인기가 없다는 결론을 내고 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비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후궁 중 가장 친하던 염 귀인이 죽은 지금 궁궐에서 나는 친구가 거의 없긴 했다.

그나마 개시시가 나와 가깝지만 소심한지 사람들 앞에선 내게 제대로 말도 못 걸고…….

“어쩐지. 그래서 다들 날 무시했구나.”

“후궁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습니까?”

“응. 문안 갔더니 다 날 무시하더라고.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부쩍 심해졌어.”

“!”

“난 조용히 지내는데도 왜 다들 날 싫어하나 했더니. 그대 말처럼 내 보호 세력이 없어서 그런가 봐.”

말을 마치자마자 담벼락 너머에서 웬 제기가 날아왔다. 놀 때 가지고 노는 그 놀이기구 제기 말이다. 발로 차는 거.

하여튼 그 제기가 내 뒤통수를 툭 때리고 발치에 떨어지기에, 나는 비원에게 하소연하길 잠시 멈추고 거기에 내공과 돌을 넣은 다음 날아온 방향으로 도로 던져주었다.

제기는 빠르게 날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벼락 너머에서 “으악! 대인!”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흐뭇하게 웃었으나, 내내 조용히 있던 비원은 내 팔을 잡고 어딘가로 황급히 끌어당겼다.

얼결에 따라가자, 그는 아까 자리에서 좀 거리를 벌리고 선 다음 식겁한 얼굴로 항의했다.

“어딜 봐서 조용히 지냈단 겁니까? 평소에도 늘 이럽니까?”

“난 조용히 지내. 근데 받은 건 그대로 돌려줘.”

“제기에 돌 넣었잖아요 돌! 그대로 주는 게 아니잖아요!”

“내공도 넣었는데!”

“밝게 자랑하지 마세요! 칭찬한 거 아닙니다!”

뭘 어쩌란 건지 모르겠다. 내가 멍하니 쳐다보자, 비원은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자기 머리를 짚더니 한숨을 연거푸 세 번 내쉬었다.

사람이 세 번 한숨을 연달아 내쉬는 건 부자연스러우니, 나 보라고 저런 게 분명했다.

거기에 기분이 상해 인상을 찡그리자, 비원은 이마에서 팔을 내리고서 중얼거렸다.

“그쪽은 궁궐에서 살아남기에 최악의 성격입니다. 폐하의 총애만으론 여기서 잘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그런 성격 가지고는.”

“그럼?”

“아까 내가 말한 보호 세력을 만드세요. 그쪽이 콩을 팥이라고 잘못 말해도 그런 적 없다고 우겨줄 수 있는 세력 말입니다.”

“타천천이 날 지키라 했다며. 그럼 그대가 날 도우면 되잖아.”

하지만 타천천에게 부탁도 받았다면서. 비원은 내 말을 듣자마자 단호하게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황후 마마를 지지하는 쪽이어서요. 간신히 그쪽에 줄을 대고 신뢰를 쌓았는데. 지금 그걸 무너뜨릴 순 없습니다.”

나는 황후와 직접적으로 적대한 적은 없지.

하지만 황후 가문 사람들은 천소여를 따라 한 후궁을 일부러 보냈고, 그 후궁은 회임을 해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면 황후도 간접적으로는 내 적이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비원 이놈은 자기가 황후의 편이라고?

“내 적이란 소리야?”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여기에서 내일 아침 해를 못 보게 만들어주지.

각오를 하고서 물었으나, 본인 미래에 다행스럽게도 비원은 바로 부정했다.

“그건 아닙니다. 뒤에선 당신을 도울 겁니다. 실망스럽긴 하지만 단주님 부탁이 있으니까요.”

“그럼 됐잖아. 뭐가 문제야.”

“대외적으론 못 돕지 않습니까. 지금 그쪽에겐 대외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비원은 말을 비비 꼬아서 해 놓고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당부했다.

“후궁과 관리의 교류를 막는 나라도 있다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문화는 아니지요. 그러니 그쪽도 내명부 밖에서 당신을 도울 사람을 찾아보세요. 원래 몸에 돌아갈 때까진 잘 지내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 *

비원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결론은 명확했다.

다른 후궁들과 손잡은 대신들이 황제 앞에서 나를 헐뜯거나 할 때, 그들을 말리고 나를 두둔해 줄 대신들과 결탁하란 거지.

아…… 그래. 그러고보니 전에 비슷한 말을 하면서 찾아온 관리가 한 명 있었던 것 같아.

당시엔 못 알아들어서 그냥 보냈지만.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야 대신들과 손을 잡을 수 있지?

“조심하셔야 해요, 소주. 잘되면 그 대신들이 소주에게 큰 도움이 되지만, 잘못하면 이상한 오해를 받고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르니까요.”

고민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원웅과 부성에게 슬쩍 물어보자, 두 사람은 걱정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의외로 둘 다 연비 애비를 부르면 되지 않느냔 말은 하지 않았다.

“난 너희가 아버지를 부르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이상해서 대놓고 묻자,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천 대인은…… 물론 아버지시니까 소주를 많이 챙겨 주시겠지만요. 연비마마도 와 계시잖아요.”

“모두 한 가문 사람이니, 혹시라도 연비 마마와 영빈 마마와 소주가 이해관계 하나를 두고 부딪치게 된다면 천 대인께서 누구를 돕겠어요.”

“가문에 가장 도움 될 사람을 도와주실 텐데. 그러면 안 되니까요.”

그렇구나. 완전히 이해는 안 갔지만 어렴풋하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러면 어쩐다…….

* * *

“떡돌아. 내가 궁궐에서 세력을 길러 볼까 하는데. 추천해 줄 대신이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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