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아부
개원은 쉬지 않고 이동해 자신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개시시를 통해 전달받은 낯선 서신을 펼쳤다.
반듯하게 접은 서신. 먹물에서는 이름 모를 향이 섞여 풍겨 오고 있고, 서신을 묶은 끈에선 희미한 광택이 난다.
개시시가 ‘천 귀인이 보낸 답서’라면서 자신의 편지 사이에 끼워 보낸 편지였다.
개원은 개시시를 위해 마지못해 사과 서신을 보내긴 했으나 천 귀인과 연락을 주고받는 건 그게 끝이라 생각했다.
더 연락할 이유도 없고.
이 때문에 그는 받은 답서를 펼치지 않고 서랍에 넣어둔 채 곧장 가짜 천년비를 잡으러 마교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궁궐 후궁 중 누군가의 몸속에 그녀가 있었다.
‘전엔 시시의 생일이라 입궁할 수 있었지.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시시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 시시는 천년비를 경멸하니까.’
개원은 개시시가 사랑스럽고 착한 동생이라 생각했지만, 그녀가 천년비를 몹시 싫어한단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개시시는 절대로 천년비의 영혼을 찾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 터.
그렇다고 다른 후궁과 또 이런 식으로 안면을 트고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긴 힘드니, 어떻게 해서든 이 천 귀인이란 여자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천년비를 찾아보아야 했다.
‘천 귀인은 무림에 대해 아는 게 없을 테니 잘 이용하면 도움이 될 거다.’
순진한 명문가 출신 후궁의 눈과 귀를 이용하자니 좀 미안하기도 하지만, 해가 되는 건 아니니 괜찮겠지.
개원은 냉철하게 생각하면서 서신에 묶인 끈을 잡아당겼다.
끈이 풀어지자 반듯하게 접은 서신의 종이가 붕 뜨면서 사이로 또박또박한 글자가 보였다.
하지만 비장한 각오로 서신을 펼친 개원은 내용을 읽자마자 당황해서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 * *
소협의 편지를 받고 놀랐어요. 말을 진짜 X 같이 하시네요.
하지만 소협이 잊으신 게 있습니다. 바로 내 품계가 그대 동생보다 높단 거지요.
근데 어쩌죠?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거든요!
소협이 이 서신을 읽는 순간 개 답응이 무엇을 하게 될지 알아맞혀 보세요.
네, 맞습니다. 내 밑에서 구르고 있을 거예요.
연무장 백 바퀴 돌리고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죄다 시킬 겁니다.
소협은 무림인이니 동생분도 아마 재능이 있겠죠?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면 알려줄게요.
아, 개 답응이 울면서 ‘왜 내게 박정하게 구세요?’라고 물으면, 전부 소협의 탓이라 전하겠습니다.
이건 소협이 만든 연죄자입니다. 안녕.
* * *
개원은 눈을 비볐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뭘 본 건지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는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후궁이 썼다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편지 내용 때문에.
게다가 그 후궁. 분명 개시시가 말해주기로는 대단한 명문가 적녀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단한 집안의 적출이라며,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방방 뛰어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연죄자는 또 뭐란 말인가?
그러나 개원이 가장 충격을 받은 건 편지의 내용이나 알 수 없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를 가장 놀랍게 한 건…….
‘글씨.’
개원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이 글씨. 천년비의 글씨와 비슷했다.
* * *
“비원 그자는 왜 소식이 없는 거야!”
차를 마시던 우 귀인이 갑자기 찻잔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화를 내자, 우 귀인의 궁녀가 일을 하다 말고서 고개를 돌렸다.
“네?”
“촉비도 천 귀인도 모두 멀쩡하지 않느냐. 촉비는 평소처럼 지내고. 천 귀인은 폐하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우 귀인은 오원요가 찾아와 황제의 꾸짖음을 대신 전하던 순간의 모욕감을 떠올리고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일은 돌이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잠이 확 달아나고 분기가 치솟았다.
자신이 지속적으로 천 귀인의 궁녀를 괴롭혔나? 아니었다.
천 귀인의 궁녀가 건방지게 굴기에 훈계를 했을 뿐인데, 황제가 측근 태감을 보내서 꾸짖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에 있을까!
“염려 마세요, 소주. 회임한 온 귀인은 소주를 아주 좋아하시잖아요. 천소여가 아무리 위세를 부려봐야 결국 회임하지 못한 많은 후궁 중 하나일 뿐입니다.”
궁녀의 위로에 우 귀인은 한숨을 내쉬고서 부채를 집어 빠르게 얼굴을 부쳤다.
“그래. 그래야겠지. 하지만 비원 그놈, 시간을 더 끌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 * *
‘우 귀인이 지금쯤 화가 나서 못 견디려 하겠군.’
타천천에게서 온 서신을 다 읽은 비원은 혀를 차면서 생각했다.
그는 다 읽은 서신을 촛불에 태우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타천천이 서신으로 알리길, 혼령술이 아직 불완전하니 당장 천년비 영혼을 부르기는 힘들다고 했다.
자칫 잘못해서 천년비 영혼이 또 이상한 곳으로 가버리면, 그땐 정말로 찾기가 더 어려워질 거라고.
그러면서 타천천은, 본인은 혼령술을 안정시킬 방법을 찾을 테니 자신에게 궁중에 남아서 천년비를 지켜 달라고 했다.
서신이 귀퉁이만 남기고 완전히 타 사라지자, 비원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을음을 입바람으로 불어 날렸다.
타천천은 천년비 보호를 부탁하면서, ‘몸이 바뀌었으니 무공 실력이 이전만 하지 않을 텐데, 천년비는 궁궐에 잘 적응할 성품이 아니다’는 이유를 들었다.
직접 천년비를 만나 보았기에, 비원은 타천천이 뭘 염려하는지 충분히 잘 이해했다.
확실히. 눈치가 백 단이어야 하는 궁궐 속에서 천년비는 너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천년비가 외롭고 고강한 늑대가 아니라 맹추라니.’
별개로 환상이 깨져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우 귀인. 천 귀인을 몰락시켜 달라고 의뢰했던 우 귀인에 대한 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 귀인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면 그의 명성이 깎여나갈 텐데.
그렇다고 우 귀인의 소원을 들어줄 수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우 귀인이 증오하는 천 귀인의 몸속에는 그가 보호해야 할 천년비의 영혼이 들어 있으니까.
‘이를 어쩐다.’
* * *
황제를 손안에 넣고 주무를 방법을 알았으니 실천을 해 보아야지.
수련을 하러 비밀 장소에 가기 전. 나는 우선 청적에 들러서 떡돌이가 있나 없나를 살폈다.
어제는 없었고 그제도 없었는데, 오늘도 없으려나?
‘있다!’
다행히 떡돌이가 오늘은 있었다. 평소처럼 아주 게으른 자세로 나태하게 바위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어!
옆에 손수건을 깔고 종이로 싼 뭔가를 둔 걸 보니, 저건 필시 내게 바칠 공물, 아니, 선물.
그렇다면 떡돌이도 나와 놀 준비를 하고 왔단 거지. 좋아!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자마자 나는 얼른 떡돌이 앞으로 나아갔다.
예상대로 떡돌이는 “우연히 만났군.” 하고 웃더니 옆에 놓아둔 종이로 싼 떡을 건넸다.
“자.”
나는 흐뭇하게 포장을 벗겨 떡을 꺼내 입안에 넣고 씹으면서, 떡돌이의 오늘 기분을 살폈다.
내가 황제를 손안에 넣고 주무를 방법을 터득했다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조종하는 건 아주 조심히 해야 한다.
떡돌이 기분이 나쁠 때 하면 안 된다. 가끔 만만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떡돌이는 황제 아니던가.
“왜 그리 빤히 보지?”
“네가 기분이 좋은지 아닌지 살피는 중이야.”
“짐의 기분은 왜? 부탁할 게 있느냐?”
좋아. 기분도 좋아 보이는군! ‘부탁할 게 있어?’ 하고 묻는데 눈빛이 온화하다.
준비가 잘됐단 판단이 서자마자, 나는 얼른 떡돌이 옆으로 가 앉았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
그러면서 슬그머니 판을 깔자, 떡돌이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물었다.
“무엇이지?”
질문을 한 그는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직접 떡을 들어 포장 하나를 깐 다음 내 입에 물려 주려 시도도 했다.
“손 씻었어?”
내 말을 듣자마자 온화한 기색이 좀 가셨지만.
한숨을 내쉰 떡돌이가 떡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는 걸 유심히 보다가, 나는 딱 마음을 먹었다.
그래. 이 정도면 분위기도 괜찮아. 내가 터득한 ‘황제를 손안에 넣고 주무르기’를 해봐도 되겠구만!
“떡돌아.”
내가 은근하게 부르자, 떡돌이는 떡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면서,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덩달아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에게 내가 준비한 필사의 아부를 펼쳐 보였다.
“오늘 밥상을 보니 네 거시기가 생각났어.”
“!”
하지만 떡돌이는 기뻐하기는커녕 오물오물 씹던 떡을 뱉더니, 혼자 사레가 들려서 마구 기침이나 해댔다.
승언이 달려와서 등을 마구 두드리는 사이. 나는 내 말실수를 알아차렸다.
이런! 내가 너무 추상적으로 표현했구만!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기다리자, 마침내 승언이 물러가고 떡돌이는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두드리면서 내게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오늘 반찬으로 숭어가 나왔단 이야기를 돌려서 한 거였는데. 내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나 봐.”
떡돌이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끙 소리를 내면서 면사를 벗고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으며 구시렁거렸다.
“도대체 왜 갑자기 이번엔 숭어에 꽂힌 거냐. 전에는 짐더러 내시라고 놀려 대더니.”
“폐하를 손에 넣고 조물조물하고 싶어서.”
“!”
손수건을 집어넣고 면사를 착용하던 떡돌이가 갑자기 ‘풉’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입바람을 세게 부는 바람에 면사가 저만치 날아갔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내게 괜히 신경질을 냈다.
“시침은 네가 거부하는 거다, 짐이 아니라.”
“여기서 시침 이야기가 왜 나와?”
“네가 말을…… 네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내가 너무 솔직했지?”
황제가 나를 째려보는 사이, 승언이 달려와서 날아간 황제의 면사를 주워와 내밀었다.
하지만 황제는 바닥을 나뒹군 면사를 도로 착용하긴 싫은지, 그 면사는 옆에 두고 새 면사를 꺼내서 착용했다.
“대체 몇 개를 가지고 다니는 거야?”
그게 황당해서 물었지만, 황제는 나를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재차 째려보기만 할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 표정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내 계략이 실패한 건가.
아부를 잘했으니 떡돌이가 오늘도 끔뻑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 아부는 일회성이었나 보다.
너무 실망스러워서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으려니, 떡돌이는 한숨을 내쉬고서 물었다.
“시험해 보고 싶다는 게 그 말이었느냐? 사실 듣고도 네가 뭘 한 건지 모르겠지만.”
“네가 기뻐할 줄 알았어.”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에서 기뻐할 줄 알았냐’고 묻는다는 건 어느 지점에서도 기쁘지 않았단 건가?
눈치를 보고 있으려니, 떡돌이는 재차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네가 그냥 날 기쁘게 해주고 싶을 리가 없지. 뭘 원하는 건데 그래? 그냥 솔직하게 말하거라. 너는 오해 사는 말을 자주 하니 그게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