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아유정
사자 친왕은 잠시 고약한 냄새를 맡은 고양이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 요구했다.
“귀인께선 빈말을 못 하시는군요. 빈말로라도 걱정돼서 묻는다고 해 주세요.”
참 까다로운 사람이로구만.
“걱정돼요. 무슨 일이 있나요?”
어쨌든 말 한마디 하는데 뭐가 대수랴 싶어서 원하는 대로 해주자, 사자 친왕은 푹 한숨을 내쉬더니 바위 아래로 내려가 풀에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귀인은 ‘이상’이 있습니까?”
“건강해요.”
“다행이로군요. 귀인은 꿈…… 밤에 꾸는 꿈 말고요. 귀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래라던가, 그런 게 있습니까? 낙원. 그래요. 귀인이 만들고 싶은 낙원 말입니다.”
“있지요.”
개원이에게 복수를 한 다음,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실컷 자면서.
친구가 하나둘 정도 있어도 좋겠지. 친구인 척하다가 뒤통수를 내려치는 그런 배신자들 말고, 진짜 친구.
연인도…… 있어도 괜찮겠지. 사랑하는 척 굴다가 독을 먹이는 연인 말고, 같이 알콩달콩 챙겨줄 수 있는 연인.
그런 연인과 살다가 날 닮은 아이가 태어나도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내게도 가족이 생기는 거니까.
“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내 말에 사자 친왕은 고개만 부자연스럽게 들어올려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몹시 당혹스러워하는 소리를 냈다.
“안 어울리는 꿈이로군요. 귀인의 꿈이라면 분명 아주 이상하고 괴상할 거라 생각했는데.”
“근데 그게 왜요? 전하는 꿈이 없어요?”
사자 친왕은 고개를 도로 내리더니,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있습니다. 아주 큰 꿈이 있지요. 보고 싶은 세상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있고요.”
“근데 그게 왜 고민이에요?”
사자 친왕은 대답 대신 또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귀인은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
또다. 또 사자 친왕이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들어서 나를 희한하게 쳐다본다.
왜 그러나 싶어 마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는 픽 웃더니 목에서 힘을 빼고 누우며 대답했다.
“난 있습니다. 그래서 고민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소중한 사람이 상처받는데. 소중한 사람을 상처 주지 않으면 내가 상처받거든요.”
“전하의 소중한 사람은 누구고 전하가 하고 싶은 건 뭔데요? 둘 다 할 수는 없어요?”
둘 다 하면 되잖아? 뭘 저렇게 고민까지 하지?
하지만 사자 친왕은 내 말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하늘만 계속 쳐다보았다.
뭐가 그리 재밌다고 쳐다보나 싶어 덩달아 고개를 들자,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한 조각 덩그러니 흘러가고 있었다.
그 옆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그 구름만큼 느린 속도로 흘러왔다.
“귀인도 고민이 많겠습니다.”
나는 왜?
* * *
숲속을 세 사람만이 걸어갔다. 타천천과 개원, 가짜 천년비.
개원을 아는 이들이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나, 이곳에는 그들을 엿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인적이 아예 없는 깊숙한 숲속에 들어서자 타천천은 손뼉을 딱 치고서 개원을 보며 웃었다.
“자, 그러면 얘기를 나눠 봅시다.”
개원은 타천천의 옆에 달라붙어 있는 가짜 천년비에게서 가까스로 시선을 떼고 물었다.
“사칭하는 게 아니라니.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입니다.”
타천천은 빙그레 웃고서 근처의 커다란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 천년비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입니다. 손바닥의 상처부터 흉터까지 그대로죠. 그쪽이 천년비에 대해 잘 안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걸요.”
개원이 가짜 천년비를 바로 죽이지 못한 것도 손바닥에 있는 그 흉터 때문이었기에, 그는 눈썹을 찡그리고서 타천천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 말을 어찌 믿지?”
“믿으니 따라오신 거 아닙니까?”
“!”
“나 역시 그쪽이 천년비의 복수를 한답시고 피폐하게 지내는 꼴을 못 봤다면 절대로 이런 얘기를 안 해줬을 겁니다.”
“피폐하게 지내는 꼴?”
“우리도 개 대협을 보고 있었거든요. 천년비를 속여 죽인 복수를 하려고.”
무서운 말을 하면서도 타천천의 눈은 가느다랗게 휘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몹시 흉흉해서 전혀 빈말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점이 개원에겐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나는 천년비를 죽이지 않았다.”
“압니다. 그래서 여기 데려온 거 아닙니까. 얘기를 해 보자고.”
개원의 눈이 차가워졌다.
“난 분명 천년비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체는 확인했어. 내 손으로 그녈 묻었지. 그런데 너는 저 여자가 천년비라 주장하는군. 이 얘기부터 해라.”
타천천은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두더니, 가짜 천년비를 향해 눈짓했다.
“보여드려.”
지시를 받은 가짜 천년비가 가까이 오자 개원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으나, 가짜 천년비는 거리를 두고 서서 소매를 치켜올려 손목을 내밀 뿐이었다.
이걸 뭐 어쩌란 건가 싶어서 개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뭘 하자는 거지?”
“손목에 맥을 짚어 보시지요.”
“맥이라니?”
가짜 천년비가 손목을 좀 더 가까이 들이대자, 개원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 위에 두 손가락을 얹었다.
그러기를 잠시. 개원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손을 확 거두었다.
“이건……!”
“우리가 발견했을 때 천년비는 죽어 있었습니다. 나는 천년비를 부활시키고 싶었고, 실행했죠.”
개원의 눈동자가 흉흉해졌다.
“천년비를 강시로 만든 거냐!”
그는 타천천의 멱살을 잡으려 했으나, 가짜 천년비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자 바로 멈추어 섰다.
개원은 혼란에 차 가짜 천년비의 얼굴을 보았다.
“천년비가…… 강시가 됐다고?”
그 허망한 목소리에는 슬픔이 짙었다. 가짜 천년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와중에 멀쩡한 건 타천천 하나뿐이었다.
“강시는 강시지만 영혼이 들어 있는 강시입니다. 죽은 몸이지만 살아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그걸 말이라고!”
그러나 개원은 타천천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저 여자. 저 강시. 네 말처럼 천년비의 몸이라 치지. 천년비와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데 천년비의 영혼이 들어갔다고? 그걸 믿으란 건가?”
“아, 그건 천년비의 영혼을 못 넣어서 그런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불완전한 술법이었거든요. 문제는 영혼이 없는 상태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영혼을 넣는 강시로 만들어도 그냥 평범한 강시가 되어 버린단 겁니다. 그건 부활이라고 보기 어렵지요. 안 그렇습니까?”
개원은 타천천의 말속에 숨은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돌려 가짜 천년비를 보았다.
가짜 천년비는 진짜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고 있었고, 숨을 쉬는 것처럼 몸이 살짝 오르락내리락하기까지 했다. 분명 맥이 없었는데도.
“그럼 저 안에는…… 지금 누가…….”
“저희 사하비단에는 천년비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저 애는 개중에서도 가장 천년비를 숭배하던 아이입니다. 천년비에 대한 모든 일화를 수집하고, 천년비의 행적을 하나하나 다 따라다녀 볼 정도로 지극정성이었죠. 천년비의 몸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이 일에 자원해 주었습니다.”
타천천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가짜 천년비가 개원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아유정이라 합니다.”
개원은 인사를 받지 않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천년비를 사칭하는 이에게 복수할 거란 생각만 했지, 설마 천년비의 몸이 강시가 되어 있을 줄이야.
이건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혈교에서 무림을 공격할 때 자주 사용했던 강시술은 위험한 건 물론 시체를 이용하는 행동이라, 사파 내에서도 꺼림칙해 하는 이가 많을 정도로 배척받는 술법이었다.
그런데 그 무서운 강시술로 천년비를 부활시키다니. 게다가 영혼을 넣은 강시술.
이건 정말로 엄청난 일이었다. 저런 방식으로 이미 고인이 된 수많은 무림 고수들을 부활시킨다면?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정파인으로서 그는 당장 이 사실을 무림맹에 알리고 사하비단과 타천천을 공격하자 주장해야 했다.
그러나 개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강시술. 저 불완전한 술법으로 깨운 게 천년비라지 않는가.
개원의 눈동자가 천년비의 얼굴에 멎었다. 제발 꿈에 나오기를 빌던 얼굴.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술에 취하면 그 얼굴이 보일까 싶어서 내내 괴로워하고 그리워하던 얼굴.
그 위험한 술법으로 부활한 게 천년비라고 한다.
정파에서 이 사실을 알면 사하비단과 타천천 뿐만이 아니라, 강시가 되어 깨어난 천년비도 없애려고 할 것이다.
사람일 때도 죽이려 했는데. 보지 않아도 뻔했다.
심지어 완전히 부활한 것도 아니고, 반쪽짜리 부활이라 영혼은 다른 사람의 것이라니.
타천천은 그런 개원을 보며 교묘하게 웃었다.
개원은 멍하니 서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영혼은. 그러면…… 천년비 영혼은?”
“술법을 완전하게 해야지요. 안전해지면 천년비의 영혼을 다시 몸에 넣을 겁니다.”
“천년비의 영혼이 어디 있는지는? 그건 알고?”
“사실 이 영혼 넣은 강시 이야기는 사하비단 내에서도 비밀입니다만. 개 대협께만 알려드리지요. 천년비의 영혼은 어느 후궁의 몸 안에 있답니다.”
개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후궁……?”
* * *
개원이 떠나간 후.
아유정은 복잡한 눈으로 오솔길을 쳐다보다가, 타천천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이야기는 사하비단 내에서도 아는 이들이 없는데, 저자에게 알려줘도 괜찮을까요? 저자는 정파 내에서도 유달리 의협심이 강하지 않습니까.”
개원을 바라볼 때 묘한 시선을 한 것과 달리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뚜렷했다.
실제로 최근까지 타천천은 천년비를 죽인 원수라며 개원을 죽이려고 했다.
개원이 다시 한번 천년비를 죽이러 오면 그 기회를 틈타 죽일 거라고.
이번에 마교 방문 행렬에 몰래 따라온 것도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지 않은가.
그런데 개원을 따로 부르는 건 물론 이런 기밀까지 이야기해주자 불안했다.
“혹시 정의검 그자가 강시 이야기를 흘리기라도 하면…….”
“그러지 못할 거다. 천년비 영혼이 엉뚱한 데 있으니.”
“단주님은 정의검이 천 대협을 살해한 게 아니라 믿으십니까?”
“그 피폐한 꼴을 봐라. 그게 악적을 살해한 사람의 얼굴인가, 제 연인을 못 잊고 괴로워하는 얼굴인가.”
“그래도 천 대협 위치를 알려준 건…….”
아유정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으나, 타천천은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후궁은 함부로 보고 싶다고 볼 수도 없지. 영혼을 만날 수 없다면 몸이라도 보고 싶을 터. 걱정 마라. 정의검은 무림맹으로 가는 게 아니라 네게로 달려올 거다. 아마…… 앞으로 꽤 쓸모 있어 지겠지. 사하비단엔 고수 숫자가 부족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