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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00화 (100/283)

##  100화. 황제를 손 안에 넣고 주무를 수 있어

당황해서 손을 놓았다가 재차 확인하려 하는데, 한발 앞서 황제가 손을 내려 내 손을 막더니 항의했다.

“지금, 지금 짐더러 송사리라 한 게냐?”

좀 화가 난 목소리였다.

하긴. 협박당하고서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 ‘없다’가 아니라 ‘아주 드물다’고 표현한 건 그런 인간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타천천이다. 걔는 좋아한다. 타천천을 내가 괜히 변태라고 부르는 게 아냐.

어쨌든 황제는 그런 부류가 아니니 화가 나겠지. 좀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얼른 야무지게 둘러댔다.

“그럴 리가. 송사리는 조그맣지만 폐하는 조그맣지 않던걸?”

그러고서 눈치를 살피니 다행이다. 떡돌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화가 가라앉아 보였다.

나는 안도해서 ‘베갯머리 송사리’의 부작용에 관해 기술해 놓지 않은 역사가들을 원망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떡돌이의 기분을 풀기 위해 얼른 아부도 계속했다.

“폐하는 숭어야 숭어! 이만했어!”

“…….”

기분이 풀린…… 게 아닌가? 왜 표정이 더 이상해지지?

슬그머니 표정을 살피고 있자니, 떡돌이는 입을 벌리고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기 이마를 짚고서 끙 소리를 냈다.

“계란아.”

“응.”

“자거라.”

“우 귀인은?”

우 귀인을 뭘 어찌할 거란 말도 없이 떡돌이는 이불을 끌어다가 덮어주고는 토닥토닥 자라고 두드려만 주었다.

모든 걸 초탈해버린 담백한 표정을 띠고서.

* * *

그 시각.

개원은 잠시 일행에서 떨어져 나온 가짜 천년비를 습격하고 있었다.

개원의 검과 가짜 천년비의 원형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쇳덩어리에서는 날카로운 소리와 빛이 튀었다.

빠른 속도로 접전이 오가는 동안 개원은 그리운 얼굴에 휩쓸리려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저 사람은 천년비가 아니다. 저 사람은 천년비를 흉내내는 적이다.

개원은 속으로 연거푸 중얼거렸다.

하지만 온 정신을 결투에 몰입해야 할 판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움직임은 평소보다 둔해졌고 칼날은 평소보다 무뎌졌다.

게다가 개원은 평소만큼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반면, 가짜 천년비의 움직임은 전의 어색함을 제법 떨치고 날카로워진 상태이다 보니 생각보다 결투는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투가 계속될수록 개원은 평정심을 되찾아갔고, 개원의 공격이 매서워지고 정교해질수록 가짜 천년비의 움직임은 흐트러져갔다.

마침내 개원의 검을 가짜 천년비가 비껴 막아내는 순간.

커다란 팔찌형 무기를 지나간 검은 가짜 천년비의 팔을 베었고, 가짜 천년비는 짧게 신음을 뱉으며 비틀했다.

개원은 검 등으로 가짜 천년비를 밀쳐내듯 강하게 쳐낸 다음, 그녀가 뒤로 넘어지자 일부러 소리를 내어 이를 갈았다.

“천년비의 이름을 사칭한 복수다.”

천년비의 얼굴을 한 이를 공격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며 낸 소리였다.

이렇게 안 하면 최후의 순간, 또다시 마음이 약해지고 말까 봐.

아까와 달리 이번에 개원은 제대로 검날을 겨누고서 가짜 천년비의 심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이 어깨를 베고 지나가 심장에 닿기 전. 가느다랗고 긴 사슬이 그의 검신을 통째로 붙잡아 강한 힘으로 당겼다.

“!”

개원은 검을 뺏기는 척 힘을 빼다가, 검이 손을 벗어나기 전에 사슬을 다리로 걷어차 누르면서 다시 검을 낚아챘다.

커다란 바위를 걷어차고 사슬을 날린 이를 보니 사하비단의 수장 타천천이었다.

‘마교에 다녀가는 사하비단 일행에 타천천이 합류했단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는데. 그 역시 이쪽에 온 거였나.’

의아한 생각을 하면서도 개원은 이번에는 타천천을 향해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 그의 신형이 타천천의 코앞에 다다랐다.

그러나 타천천에게 닿기 전. 그는 거미줄처럼 펼쳐진 사슬에 가로막혀 뒤로 튕기듯 물러나야 했다.

몇 걸음을 뒤로 물러나며 개원은 이를 갈았다.

개원이 또다시 ‘천년비’를 죽이러 나타날 줄 알고 일부러 몰래 일행을 따라왔던 타천천은, 그런 정의검을 보며 비웃었다.

“천년비를 죽여 놓고서 무슨 복수를 한다고. 우습기도 하지.”

그러나 비웃음이 가시기도 전에 내공이 실린 돌이 날아와 그가 펼쳐놓은 사슬 거미줄에 꽂혔다.

“누가 누굴 죽였다고?”

정파 고수답지 않은 행동을 한 개원은 한번에 여러 개의 돌을 내공을 담아 던져 놓고는, 타천천을 향해 자신도 몸을 날렸다.

타천천이 거추장스럽게 사슬 여기저기에 박힌 돌을 사슬을 휘둘러 털어내는 사이, 눈 깜짝할 순간 개원이 다시 코앞에 나타나 그를 걷어찼다.

“!”

타천천은 뒤로 날아갈 뻔했으나, 자신의 쇠사슬을 이번에는 뒤에 펼쳐 몸을 받치는 용도로 쓰고는, 위에서부터 크게 걷어차는 개원의 다리를 피하며 그의 발목을 사슬로 낚아챘다.

사슬은 개원의 검에 가로막혔으나, 이번에는 가짜 천년비가 뒤에서 팔찌를 단도처럼 휘둘러 그의 머리를 노리자 개원은 사슬을 밀어내고 검을 뒤로 보내 그녀를 다시 튕겨내야 했다.

개원은 연달아 타천천과 가짜 천년비의 접근을 막고서 뒤로 물러나며 검을 세웠다.

어느새 사하비단 무리가 그들이 있는 숲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적은 여럿인데 이쪽은 하나. 어두운 밤에 눅눅한 달빛은 제대로 앞을 비추어주지도 못한다.

오싹한 상황이었으나 개원은 위태로워지자 오히려 더욱 차분해졌다.

그때.

“잠시.”

타천천이 갑자기 한 손을 들어올렸다.

부하들을 막으려는 건지 개원을 막으려는 건지 알 수 없으나, 하여튼 대화를 원하는 것 같았다.

타천천의 지시에 가짜 천년비는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으나 개원은 오히려 검을 세웠다.

그는 천년비의 이름을 팔아먹는 이들과 대화를 나눌 마음 따위는 없었다.

“우리 서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타천천의 말을 들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검을 손안에서 고쳐 쥐고서 곧장 경공을 펼쳐 타천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호선을 그린 검은 타천천의 정수리 부근까지 아슬아슬하게 닿았고, 이를 본 가짜 천년비는 놀라서 그쪽으로 달려가 개원의 옆구리를 향해 다리를 뻗었다.

“사칭이 아닌데.”

한발 앞서 있던 개원의 검은 타천천이 태연히 중얼거린 말에 정수리 위에서 아슬하게 멈추어 섰다.

하지만 잠시 주춤한 사이, 그는 가짜 천년비에게 옆구리를 얻어맞고 바로 옆으로 굴러야 했다.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데도 한 번 구르자마자 벌떡 일어난 개원은 바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역시 개소리였지?’ 하는 투로 또 공격하려 했으나, 타천천은 방어하는 대신 가짜 천년비를 자신의 앞에 끌어다 놓으며 말했다.

“일단, 이 애는 사칭이 아니거든.”

그 말을 뱉은 타천천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개원의 위아래를 오갔다.

“그런데 그쪽은. 천년비를 죽이지 않았다고?”

* * *

“소주, 소주! 들으셨어요?”

아침 식사를 떡돌이와 한 다음 내 처소로 돌아와 씻고 옷을 입는 도중이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부성이 꾸며주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는데, 원웅이 요란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내게 물었다.

내가 ‘나 졸고 있었어’란 시선으로 쳐다보자, 원웅은 방긋 웃더니 입은 크게 벌리면서 목소리만 한껏 낮추었다.

“폐하께서 오 공공을 직접 우 귀인 처소로 보내서 함부로 손찌검을 하지 말라 경고하셨대요!”

“진짜?”

“네.”

품계를 낮추고 싶진 않았나 보구나. 경고만 하다니. 아니, 경고라도 해 줘서 다행인가?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머리에서 달랑거리는 진주를 매만지다가, 원웅과 부성이 좋아서 서로 손뼉을 치는 걸 발견하고 물었다.

“너희는 왜 그렇게 좋아해?”

그냥 황제가 사람 보내서 말 한마디 전한 거잖아?

“왜 좋아하느냐니요. 폐하께서 꾸짖으신 거잖아요.”

“황제들은 소란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 한 내명부 일은 관여하지 않잖아요. 황후 소관이라고 해서요.”

“그런데 이번에 대놓고 소주 편을 들어주셨으니…… 다들 알겠지요! 우리 소주가 품계는 귀인이지만 실세 중의 실세란 걸요!”

그런 건가? 이것도 좋은 거야?

“난 잘 모르겠어.”

“폐하께서 우 귀인에게 사람을 보내셨단 건 경고예요, 소주. 앞으로 지켜볼 거라는 경고요. 일단 총애와는 완전히 멀어진 거라고요!”

그래? 그럼 떡돌이가 날 위해 행동을 하긴 한 건가? 하지만 왜? 송사리 협박은 실패한 거 같았는데.

아니면 숭어라고 치켜세워준 게 기분이 좋아서…… 아! 이건가 보다!

* * *

수련을 마친 후.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쭉 펴고서 청적에 잠시 들렀을 때였다. 떡돌이를 보고 싶어 들렀는데, 그곳에 떡돌이는 없고 사자 친왕만 보였다.

사자 친왕은 웬일로 평소보다 좀 그늘져 보였는데, 내가 다가가서 “머리에 꽂은 깃털이 줄었네요.”라고 아는 척을 하자 눈썰미가 좋다고 감탄하더니 옆에 앉으라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맞습니다, 귀인. 나는 고민할 거리가 있어서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요. 하지만 귀인께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시는군요?”

맞다. 나는 기분이 아주 좋다.

하지만 너무 실실 웃으면 방정맞아 보일 것 같기에, 나는 대놓고 웃는 대신 흠흠 헛기침을 하고 허리를 쭉 펴면서 아주 맹숭맹숭하게 대답했다.

“조금요.”

사자 친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히죽 채신머리없게 웃으면서 내 쪽으로 자기 머리를 슬그머니 가져와 물었다.

“폐하께서 귀인을 위해 오원요를 다른 후궁에게 보냈단 얘기를 들었지요. 다들 폐하가 귀인께 푹 빠졌다고 수군거리더군요. 혹시 그 일 때문입니까?”

맞다. 나는 그 일 때문에 기분이 좋다.

하지만 여기서 수긍하면, 내가 떡돌이의 배려에 휩쓸리는 가벼운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아서, 나는 조금 돌려서 표현해주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전하.”

“음? 반은 틀리다니요?”

“내가 기쁜 건 우 귀인이 엿 먹어서가 아니에요.”

“엿…….”

“내가 기쁜 건 그거죠. 내가 이제 득도를 했거든요.”

“득도까지 하셨습니까?”

“암요. 난 이제 폐하를 손바닥에 넣고 주무르는 법을 알았어요.”

내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사자 친왕을 아주 영민한 눈빛으로 쳐다봐주자, 사자 친왕이 감탄하며 물었다.

“호오. 그건 어찌 알았답니까? 나도 좀 알고 싶군요. 비법이 있는 겁니까?”

“암요. 비법이 있죠.”

“그게 뭐지요?”

“폐하를 치켜세워주면 돼요. 아부를 하는 거죠.”

“아부를요? 아부는 나도 늘 하는데요. 별로 효과는 없었습니다. 귀인은 어찌 아부하셨기에?”

어찌 아부하긴! 거시기가 숭어만 하다고 하면 되지!

“거…….”

“거?”

나는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그래. 이 이야기는 하지 말자.

아무리 그래도 부부 사이 일인데, 떡돌이 동생에게 이 이야기는 하면 안 되지. 떡돌이도 체면이라는 게 있지 않던가.

나는 입을 다물고서 그에게 고개만 저어 보였다.

다행히 사자 친왕은 더 조르는 대신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눈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대충 짐작이 가긴 합니다. 또 이상한 소리를 하셨겠지요. 폐하는 귀인이 그럴 때마다 껌뻑 넘어가시니까요.”

나는 그의 추측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해주는 대신,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한데 전하는 뭐가 고민인 거예요? 늘 밝은 분이 고민거리가 있는 걸 보니 호기심이 들어요.”

“걱정이 된단 뜻이지요?”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무슨 일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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