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우 귀인 품계를 내려줘
개원은 마교도들이 팔 할을 차지한다는 작은 마을 객잔에 앉아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천년비가 이곳을 지나갔다고 했다.
여기서 천년비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길 기다릴 작정이었다.
개원이 이런 마을에 있는 건 몹시 위험한 일이었다.
마교인들은 원래도 자기들끼리 뭉쳐서 놀았지만, 정파인들을 특히 싫어했다.
그런데 심지어 정파의 영웅이 동행 한 명 없이 혼자서 그들 사이에 끼어 있다니. 절대 들켜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개원은 두렵지 않았다.
‘가짜 천년비…….’
그의 마음은 온통 한 곳. 가짜 천년비를 처리해 더이상 천년비가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는 데 있을 뿐이었다.
‘슬슬 나올 때가 되었을 텐데.’
궁전에 들러 사촌인 개시시를 보고 오느라 이곳에 오는 일이 좀 늦어졌으니, 가짜 천년비는 아마 슬슬 볼일을 마치고 마교 밖으로 나올 것이다.
그곳에 완전히 눌러앉을 생각이 없다면.
개원은 마시시도 않는 술잔을 초조하게 쥐었다 내려놓길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천년비다!’라고 외치며 달려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을까? 나타날 시기가 이미 지난 것 같은데도 천년비가 하도 나타나지 않자, 개원도 슬슬 불안해졌다.
혹시 다른 방향으로 갔을까? 꼭 들어간 방향으로 나오란 보장도 없지 않던가. 알려지지 않은 길이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의견이 잘 맞거나 말이 잘 통해서, 마교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객식구로 지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간…… 용서할 수 없다.’
처음부터 용서할 생각이 없었으면서, 개원은 새삼 주먹을 꽉 틀어쥐고서 결심했다.
가짜 천년비와 사하비단이 정말로 마교에 들어간 거라면 절대로 그냥 죽이지 않을 거라고.
안 그래도 여러 오명으로 상처받은 천년비의 이름에 마교를 뒤섞다니.
그때. 창밖 어디선가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날이 덥다며 시원한 술을 한 잔씩 마시자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저쪽이다.’
객잔 안 다른 손님들까지 모두 조용해지는 걸 발견한 개원은 그 무리 속에 천년비가 끼어 있으리란 확신을 하고서 허리춤에 찬 검을 확인했다.
* * *
평소처럼 무공을 수련한 다음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비원 그놈은 나중에 얘기하자 하더니, 왜 말이 없지? 얘기를 해 주겠단 거야 말겠단 거야?
내가 그놈한테 직접 찾아가 볼까? 내가 직접 찾아가도 되나?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그런데 처소에 돌아와 보니 이게 웬걸. 원웅이 눈 주변이 새빨갛게 변해 있고 귀자가 쩔쩔매면서 원웅을 위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내가 다가가서 묻자 원웅은 얼른 손을 저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주.”
“우는 게 취미야?”
“예? 아니요?”
“근데 왜 아무 일 없이 울어?”
평소에 나는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으려는 걸 캐묻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다.
원웅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지만 귀자가 내게 눈으로 ‘큰일이 있었다’고 알리고 있으니까.
원웅은 쩔쩔매면서 내 눈치를 살피다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무부에 소주 여름 옷감을 가지러 갔는데…… 거기에 우 귀인이 계셨어요.”
“걔가 너한테 헛짓거릴 했구나.”
“저는 그냥 순순히 인사하고 지나가려 했는데요, 소주. 갑자기 눈빛이 불온하다고, 자길 막 뒤에서 째려봤다고 시비를 거시더니 뺨을 때리셨어요.”
얼굴이 시뻘겋다 했더니. 뺨은 울어서 시뻘건 게 아니었나 보다.
나는 원웅의 앞으로 다가가 속이 터진 만두처럼 된 그녀의 뺨을 보았다. 진짜로 퉁퉁 부어 있었다.
“한 대 맞아서 나올 상태가 아닌데?”
내가 혀를 차자 원웅은 ‘어떻게 아셨지?’ 하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몇 대 때리셨어요.”
“몇 대?”
“한…… 대여섯 때쯤이요.”
그 말을 듣는데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아니, 무공을 배운 적도 없는 약해 빠진 애를 때릴 때가 아니 있다고 대여섯 대를 후려친 거야?
“소주, 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원웅이 저렇게 나오니 더 화가 났다. 원웅은 내게 ‘복수해주세요 소주!’라고 나섰다면 차라리 화가 덜 났을 텐데.
나는 원웅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서 이번에는 부성에게 물었다.
“부성아. 다른 사람 측근 궁녀를 저렇게 두들겨 패도 돼?”
“두들겨…….”
부성은 내 질문에 잠시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으나, 곧 퍼뜩 정신 차린 얼굴로 대답했다.
“두들겨……패는 건 안 됩니다, 소주.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면 거기에 적당한 벌은 줄 수 있어요. 만약 원웅이 정말로 우 귀인을 나쁘게 쏘아보았다면…… 지금 하신 처벌 정도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부성은 원웅을 향해 빠르게 덧붙였다.
“네가 우 귀인을 째려봤을 거라고 믿진 않아. 말하자면 그렇단 거야.”
“응 알아.”
“며칠 전에 소주께서 상상을 돌려보낸 게 화가 나서 그러는 걸 겁니다.”
원웅이 중얼거리고 부성이 위로하고 귀자도 위로한다.
하지만 셋이서 우 귀인을 씹어봐야 그녀는 고막도 간지럽지 않을 테고.
나는 그 세 사람을, 팔짱을 끼고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서러워하는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이상한 게 막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 * *
“암투의 범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허용되는 거야?”
시침을 들라며 떡돌이가 또 날 불렀을 때였다.
나는 그의 맞은편 이불에 기어들어 가면서 떡돌이에게 물어보았다.
떡돌이는 면사를 벗어 옆에 내려두다가 “음?”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왜?”
“우 귀인이 내 궁녀 뺨을 때렸어. 그것도 여러 대나.”
평소에는 대인의 풍모를 풍기는 내가 화를 내는 게 신기한가?
떡돌이는 면사를 내려놓고서 한쪽 팔로 머리를 괴더니, 내 옆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며 신기한 듯 물었다.
“너도 암투에 참여해 보려고? 눈치 없어서 잘 알아차리지도 못하더니.”
“내가 바본 줄 알아? 난 공부를 못하는 거지 멍청한 게 아니야. 우 귀인이 날 싫어하는 건 알고 있어. 상상이 돌아간 일로 나한테 화난 것도 알아.”
“대단한걸.”
“암!”
웃어? 지금 나는 심각한데 웃어?
내가 도끼눈을 뜨자, 떡돌이는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고서 얼른 표정을 관리한 다음 심각한 척 다시 물었다.
“그래. 그래서. 우리 계란이는 어떻게 복수하고 싶은 거지?”
“일번. 손을 딴다. 이번. 다리를 딴다. 삼번. 목을 딴다.”
“네 궁녀 뺨을 때렸단 이유로 우 귀인 궁녀 사지를 부러뜨리거나 죽이겠다고?”
“무슨 소리야, 당연히 우 귀인 모가지를 딴단 소리지.”
“!”
떡돌이는 내 말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으음.” 하고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내가 제시한 세 가지 방법이 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
“다 별로야?”
그 표정을 분석해 내고서 묻자, 떡돌이는 내 뺨을 쿡 찌르고서 타박했다.
“짐의 귀엔 네가 하려는 건 암투가 아니라 그냥 결투 같은데.”
“뒤에서 하면 암투지.”
“아니. 뒤에서 목을 따는 건 암투가 아니라 암살이라 한단다.”
“그럼 나더러 어쩌란 거야? 나도 똑같이 내무부 앞으로 가서 우 귀인 뺨을 때리란 거야? 내가 우 귀인 뺨을 때리면 우 귀인 턱이 무사할 거 같아?”
“……그러니까, 주먹을 휘두른다면 이미 암투가 아니라니까.”
떡돌이는 작게 강아지가 신음하는 소리를 내더니 내 뺨을 또 쿡 찔렀다.
“우 귀인이 네 궁녀에게 시비를 걸었으니 너는 우 귀인 궁녀에게 시비를 걸면 되지 않느냐. 아니면 우 귀인 태감이나.”
“나는 대가리만 노린다.”
떡돌이는 다시 개가 신음하는 소리를 내면서 내 어깨에 자기 머리를 파묻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는 바람에 간지러워서 몸을 들썩였으나, 그는 머리를 들지 않은 채 그 상태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어느 황제가 자기 후궁과 암투 방법을 의논하고 있을까.”
“내가 특별하단 얘길 하는 거야?”
“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다 칭찬으로 받아들이는구나.”
그가 말할 때마다 목덜미가 더욱 간지러워서 몸을 비틀었더니, 떡돌이는 그제야 내 어깨에서 머리를 떼고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암투 방법은? 생각났느냐?”
“떡돌이 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 거야? 너한테 화난 사람이 네 부하 뺨을 막 때리면?”
“강등시키겠지.”
“좋아. 그러면 나도 우 귀인을 강등시키겠어.”
떡돌이는 묘하게 웃으면서 나를 빤히 보았는데, 그 시선이 마치 ‘네가 뭔데?’라고 물어보는 듯했다.
그래. 난 우 귀인 품계를 떨어뜨릴 권력이 없긴 해.
그러면…….
“떡돌아. 우 귀인을 강등시켜 줘.”
“짐에게 매달리는 건가? 우리 계란이는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어?”
그의 말투는 명백히 날 놀리고 있었지만, 그가 나를 무능력한 것처럼 놀려대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거봐. 떡돌이는 역시 날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가 만약 날 정말로 좋아했다면, 내가 우 귀인 품계를 떨어뜨려 달라고 말하자마자 ‘그럼!’ 하고서 바로 떨어뜨려야 했잖아? 이렇게 놀려대는 게 아니라.
하지만 내가 아무리 빤히 쳐다봐도 떡돌이는 정말로 우 귀인 품계를 떨어뜨릴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결국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소문으로 전해지는 후궁 비책을 사용해 보기로 결심했다.
“떡돌이 네가 그러면 나한테도 방법이 있어.”
“무슨 방법이지?”
“이건 아주 위험한 방법이야. 역사책에도 이 방법에 넘어간 황제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알아? 조심해야 돼, 떡돌이.
내가 이 방법을 쓰면 너는 콩고물처럼 흘러내려서 우 귀인 품계를 떨어뜨리게 돼.”
내가 목소리를 쫙 깔면서 경고했지만, 떡돌이는 여전히 날 놀리는 미소를 띤 채 묻기만 했다.
“무슨 방법인데? 네가 그 방법을 쓰면 짐이 우 귀인 품계를 떨어뜨린단 건가?”
“그럴걸?”
내가 단호하게 말하며 눈을 맞추자, 떡돌이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같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난 네가 뭘 하려는지 알겠는데, 계란아.”
“알겠어?”
“‘그걸’ 시도해 보려고?”
“진짜로 내가 뭘 하려는지 알겠어?”
“역사책에도 나오고. 예로부터 자주 전해져 내려온 거고. 이 상황에서 후궁들이 사용할 수 있는 비책이라면 짐작 가는 게 있지.”
거만한 미소를 지은 떡돌이는 자기가 되게 똑똑한 것처럼 웃더니, 천천히 한 자 한 자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베갯머리…….”
저기까지 나오는 걸 보니, 제대로 알고 있군.
“맞다.”
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송사리.”
“응?”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손을 내려 그의 급소를 틀어쥐고 목소리를 쭉 내리깔았다.
“폐하의 송사리는 내 손에 있다. 송사리를 살리고 싶으면 내 말을 들어.”
“!”
황제는 내 말을 듣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나도 협박을 더 이어갈 수는 없었다.
아니, 정말로 이상해. 이거…… 송사리가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