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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98화 (98/283)

##  98화. 두 명 중 하나

“폐하. 괜찮으신지요?”

오원요가 걱정스럽게 물으며 두 손으로 차가운 계란을 내밀자, 황제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다가 계란을 보고는 치를 떨며 손을 휘휘 저었다.

“도로 가져가라.”

오원요는 황제가 부르는 천 귀인의 별명이 ‘계란’인 걸 알기에 얼른 밑의 태감에게 계란을 건넸다.

아래에 있는 태감이 계란을 받아 들고 나가자 오원요는 이번에는 금창약을 가져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어의를 부르지 않아도 괜찮으실지요?”

“조금 까졌을 뿐이니 괜찮다. 어의들이 괜히 호들갑을 떨어서 모후 귀에 들어가면 그게 더 골치 아프니.”

“하오나…….”

“약이나 바르라.”

황제의 명령에 오원요는 손을 깨끗하게 씻은 다음 약 뚜껑을 열었다.

그가 손가락에 약을 묻혀 조심조심 상처 부위 여기저기에 바르자, 승언이 다가와 들췄던 황제의 옷매무새를 다시 정돈해주었다.

이 모든 절차가 끝나자 황제는 한숨을 내쉬고서 침상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고 앉아 중얼거렸다.

“설마 미동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을 줄이야. 짐이 계란이를 너무…….”

황제는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지 중간에 말을 끊고서 헛웃음을 뱉었다.

“과대평가했다 해야 할지 과소평가했다 해야 할지.”

승언은 황제의 곁에 시립한 채 미간을 찌푸렸다.

“냉정한 분인 건 확실합니다.”

“글쎄.”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냉정한 건 모르겠고. 눈썰미는 확실히 좋은 모양이다.”

오원요는 금창약을 원래 두던 장소에 넣어둔 다음,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어 황제가 기대앉은 침상에 내려놓고 물러서며 물었다.

“그러면 이제 어찌하실 건지요? 아예 반응을 하지 않으셨으니 무공이 강한지 아닌지도 알기 어렵게 되었지 않습니까. 혹시…… 또 그런 위험한 시험을 하실 생각이신지요?”

황제가 그렇다고 하면 말릴 태세였다. 물론 그가 말린다고 해서 황제가 듣진 않겠지만.

다행스럽게도 황제는 또 자신의 몸을 이용해 천 귀인을 시험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되었다. 내공도 미약하고 순간적인 판단력도 제멋대로라면 알기 어렵지.”

“하오면-.”

“생각해보니 천 귀인이 천년비란 가명으로 활동했는지가 중요하지도 않아.”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천 귀인이 천년비와 동일인이면 어마어마한 문제가 되는 게 아닌가? 오원요와 승언이 서로를 힐긋거렸다.

천년비는 평범한 무림인이 아니라 무림에서 공적이었다. 심지어 최근에 수상쩍은 행보를 보였다.

그런데 중요하지 않다니? 황제가 천 귀인에게 너무 빠져서 천 귀인 한정으로 마음 씀씀이가 확 넓어진 걸까?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짐의 말이 믿기지 않는가 보구나.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아라. 천 귀인이 천년비와 동일인이라 해도, 어쨌든 이중생활을 했다면 입궁 전 일일 게 아니냐.”

“그렇지요.”

승언이 두 손을 모으고 순순히 수긍했다.

“천년비란 자는 이곳저곳 사방팔방 돌아다녔으니까요.”

“그러니까. 천 귀인이 입궁하기 전 천년비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 독불장군이었다더라. 사하비단과도 당연히 함께하지 않았지.”

“그렇군요.”

“천년비가 수상한 행보를 보이게 된 건 천 귀인이 입궁한 후. 즉, 두 사람이 과거에는 동일인이었더라도 현재의 천년비는 천 귀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야 오원요와 승언은 황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황제는 중요한 건 천 귀인의 현재이지 과거가 아니란 말을 하고 있는 거였다.

“천 귀인이 과거를 묻고 후궁으로 사는 거라면 그냥 지금처럼 지내면 되니 아무 문제 없지.”

“영명하십니다.”

“천 귀인이 지금 문제 되는 천년비와 동일인이거나…… 동일인이 아니라도 이어져 있다면, 그때 법대로 처리하면 될 일이다.”

“예.”

황제는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마시다가, 계단을 구를 때 씹은 혀가 아픈지 인상을 찌푸리고서 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승언아.”

“예, 폐하.”

“그림자들은 천 귀인이나 천씨 가문이 수오부 군왕에게 접근했던 이들과 소통하진 않는지를 잘 살피도록 해라.”

“예.”

* * *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감자조림을 입에 넣고 씹고 있자니, 떡돌이가 갑자기 계단 아래로 떨어지던 게 떠올라 탄식이 나왔다.

“폐하는 취향이 좀 이상해.”

부성은 내가 가리키는 반찬을 덜어 접시에 담아주다가 “뭐가요?”하고 물었다.

부성과 원웅은 어젯밤 나와 떡돌이가 밤 산책하는 데 따라오지 않았기에, 황제가 계단을 혼자 뛰어내려 구른 일을 모른다.

이후 확인해보니 황제가 그 일을 조용히 처리한 건지, 아침이 되도록 아무도 그 일을 모르고 있고.

“소주?”

“아니야.”

난 아직도 모르겠어. 걔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하지만 다친 황제가 스스로 함구했는데 내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하고 다니기도 이상하지.

나는 ‘폐하가 어제 계단에서 구르더라. 그게 좋으신가 봐’라고 말하는 대신 다시 감자조림을 덜어 먹었다.

부성은 고개를 기우뚱하면서 이번에는 연근조림을 덜어주었다.

반면 원웅은 황제 이야기가 나오자 새삼 어젯밤의 감동이 떠오르는지, 뜨거운 물을 찻잔에 새로 따라 주다 말고서 주전자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소주, 어제 폐하께서 정말 대단하지 않으셨어요?”

대단했지. 계단에서 혼자 뛰어내렸다니까?

부성도 원웅의 말을 듣자 갑자기 눈이 별처럼 빛나기 시작하더니, 긴 젓가락을 내려놓고 원웅과 손을 마주 잡으면서 밝게 감탄했다.

“상상이 그렇게 가여운 모습을 보였는데도 넘어가지 않으시고. 소주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는데 알아서 다른 곳에 보내 주시고. 저도 어제 정말 좋았어요.”

“상상이 처연하게 생겼잖아요. 그런데 옷까지 갑자기 가냘프게 입고 와서 막 우는데…… 어휴, 진짜 놀랐다니까요?”

“전 상상이 그 복장하고 나타났을 때부터 기겁했어요. 어제 소주가 들어오라 했는데도 바로 못 들어왔던 거 기억나시죠?”

“상상이 그 복장 한 걸 그때 봐서 그래요. 상상이 황후 마마 명령을 듣고 잠시 어디로 가는가 싶더니 그때 온 거여서요.”

아아. 그래서 들어왔을 때 원웅이랑 부성이 표정이 그랬구나. 어쩐지.

상상이 그런 옷을 입고 나타난 게 싫으면 진즉에 말리면 됐을 텐데, 썩어들어가는 표정으로 그냥 오기에 뭔가 싶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야? 불쌍하게 울어도 우리 폐하께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셨는데. 그렇죠, 소주?”

“암. 폐하는 비정하시지. 눈물엔 넘어가지 않아.”

“!”

“왜?”

“약간 어감이…… 다른 거 같아요, 소주.”

“어디가?”

“그게…….”

원웅과 부성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리고 있을 때였다.

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밖에서 그보다 먼저 귀자가 들어와 알려주었다.

“소주. 연얼 군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연얼 군주가?

“들어오시라고 해.”

말을 마치자마자 연얼 군주가 바로 스치듯이 귀자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오며 호탕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귀인.”

인사를 한 그녀는 아직 반 정도 음식이 남은 탁자를 쳐다보더니 곧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따가 올 걸 그랬나?”

“괜찮아요.”

나는 연얼 군주에게 앉으라 하고서 원웅과 부성에게 상을 치워 달라 부탁했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남은 음식과 그릇을 치워주었고, 나는 상이 깨끗해지자마자 연얼 군주를 놀렸다.

“오늘은 술병을 안 가지고 왔네요.”

볼 때마다 같이 술 마시자고 하더니. 연얼 군주는 내 말에 또 호탕하게 웃더니, 입가에 미소를 남긴 채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온 건 걱정되는 소식을 들어서입니다.”

“걱정되는 소식이라니요?”

“후궁들 사이에서 귀인이 겉돈단 이야기요.”

아니, 나는 멀쩡히 잘 지내는데 왜 흑합 장군도 그렇고 연얼 군주도 그렇고. 대체 소문이 어떻게 나고 있기에?

내가 떨떠름해서 쳐다보자, 연얼 군주는 내 표정을 확인하더니 껄껄 웃으면서 탁자를 두드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헛소문일 줄 알았어요.”

“아. 그러세요?”

“그럼요. 귀인은 원래도 혼자 놀았잖아요.”

“…….”

진실이긴 하지만 그게 뭐 웃기다고 저렇게 좋아하면서 말하는 거야?

내가 황당해서 쳐다보자, 원웅도 같은 생각인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데 그 표정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연얼 군주도 원웅의 표정을 눈치채고는, 씩 웃더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지시했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말해 보아라.”

원웅은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었다가 연얼 군주가 갑자기 자신을 가리키자 얼른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희 소주께서 이전부터 혼자 논 건 맞지만 최근에는 소주께 공격이 너무 잦게 들어오긴 합니다, 전하.”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뭐야. 연얼 군주한테 입 삐죽인 거 아니었어?

“공격이라니?”

연얼 군주가 묻자 원웅은 하소연하듯 어젯밤에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우 귀인이 청하고 황후라 허락해서 염 귀인의 측근 궁녀 상상이 우리 처소에 잠시 온 이야기, 황제 앞에 갑자기 청초하게 차려입고 나타나서 가엾게 울던 이야기, 염 귀인이 죽은 게 나 때문이라 말해 놓고서는 갑자기 친한 척하더란 이야기 등등을.

연얼 군주는 심각하게 이야기를 들었으나 황제가 상상을 바로 내무부로 돌려보냈단 이야기를 듣자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난 폐하를 싫어하고 폐하는 사람을 싫어하시지.”

그 미소는 어딘가 씁쓸해 보이기도 해서, 이번에는 내가 좀 걱정이 되었다.

“전하. 전하는 괜찮아요?”

단순히 내가 걱정되어 왔다기엔 그녀 역시 표정이 좋지 않은걸.

연얼 군주는 기분이 좋을 때 술을 마시는데, 오늘은 술 없이 온 것도 그렇고.

군주는 내 말에 잠시 ‘네가 내 기분을 알아차릴 줄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긴 한데. 오히려 좋은 소식입니다. 나는 괜찮아요.”

좋은 소식인데 표정이 어두울 리가 있나.

하지만 연얼 군주가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라면 나도 캐묻고 싶진 않아서, 나는 원웅이 가져다준 차만 홀짝였다.

그러고서 한 대여섯 모금을 연달아 마시고 있자니,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서 탁자만 똑똑 손톱으로 두드리던 군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실은…… 이상한 서신이 왔습니다.”

“이상한 서신이요?”

연얼 군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부성과 원웅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측근 궁녀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방음이 엉망인 곳이라 나가도 소리가 다 들릴 것 같긴 하지만.

연얼 군주도 그 점이 신경 쓰이는지 평소보다 목소리를 삼분의 일 정도로 낮추어서 입을 열었다.

“내 오라비를 암살한 범인 말입니다. ……누군지 안다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전하는 범인을 꼭 잡고 싶어 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너무 수상쩍은 서신으로 받은 소식이라. 범인을 안단 자를 만나봐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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