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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97화 (97/283)

##  97화. 일부러 그랬잖아

떡돌이가 나한테 올 줄은 나도 몰랐는데, 황후는 어떻게 알고 이런 걸 보냈을까. 상상은 그걸 또 어떻게 받아 왔고?

참 희한한 일이라 그 얼음물에 담근 시원해 보이는 과일을 보고 있자니, 떡돌이가 고개를 기웃하다가 손가락으로 상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는 염 귀인의 궁녀가 아니었던가.”

황제가 자신을 알아보자 상상은 사뿐 날아가는 나비처럼 부드럽게 인사를 올렸다.

“예, 폐하. 그 후로 배속 없이 잡일을 돕다가, 지금은 천 귀인의 처소에서 일하게 되었답니다.”

“넌 염 귀인이 사가에서 데려온 궁녀였지?”

“예.”

염 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아직도 슬픈 듯 상상이 눈시울을 붉혔다. 슬픈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슬퍼 보였다.

떡돌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염 귀인이 떠날 때도 울다가 혼절했다 들었다. 그간 고생이 많았나보구나.”

떡돌이의 목소리는 위로하는 투여서, 대각선 뒤쪽에 선 원웅과 부성의 표정이 잠시 꿈틀했다.

황제 앞이라 표정 관리를 하는 듯했지만, 황제가 잠시 돌아서기라도 한다면 온 인상을 구기고 고함이라도 지를 만큼 눈빛들이 흉흉했다.

하지만 떡돌이는 이런 분위기를 모르겠는지 그저 안타깝다는 듯 혀만 찼다.

상상은 더욱 애처로운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천 귀인께서 저를 가엾게 여기고 받아주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천 귀인은 염 귀인의 친구이기도 했으니, 앞으론 염 귀인을 모신 마음으로 천 귀인을 잘 모시려 합니다.”

둘이 대화를 참 잘 나누네.

나는 멍하니 떡돌이와 상상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내 처소 숙수가 열심히 만든 요리들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먹고 싶어. 황제보다 먼저 먹어도 되나?

그런데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떡돌이가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로 말하는 게 들려왔다.

“네 마음이 참 갸륵하다. 하지만 천 귀인과 있으면 아픈 기억을 떨치기 어려울 거다. 내내 옛 주인이 생각날 테니.”

“소인은-.”

“황후에게 말해둘 테니 배속을 바꾸도록 해라. 희원궁은 염 귀인이 지내던 곳이니 같은 이유로 피해야 할 테고 ……그래. 오월궁이 좋겠군.”

오월궁은 내가 머무는 동영궁과 가장 거리가 먼 곳인데? 날 보면 염 귀인 생각이 날 테니 나한테서도 멀리 떨어져 있으란 건가?

언제부터 저렇게 배려심이 좋아졌대? 기가 차서 떡돌이를 보고 있자니, 상상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아니옵니다, 폐하. 저는 천 소주 곁에 남고 싶습니다.”

황제는 그 말에 잠시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어 번 두드리더니 내 쪽을 보며 물었다.

“너도 저 아이를 여기에 두고 싶으냐?”

나는 온기가 점차 식어가는 국을 쳐다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 생각도 없어요, 폐하. 배가 고프단 것 외에는요.”

내 말에 면사 아래로 드러난 떡돌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가 싶더니, 곧 그는 다시 상상 쪽을 쳐다보며 손짓했다.

“일어나라.”

“그럼 폐하, 소인은…….”

“원웅.”

황제가 상상의 말을 끊으며 원웅을 부르자, 사태를 불만스레 지켜보던 원웅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원웅, 네가 염 귀인의 측근 궁녀를 내무부로 데려다주어라.”

원웅은 황제의 말 한마디에 아까의 분노가 싹 풀리는지 활짝 웃으면서 밝게 대답했다.

“예, 폐하!”

“그리고 염 귀인의 측근 궁녀.”

“……예, 폐하.”

“원한다면 출궁해도 좋다.”

“!”

“출궁하고 싶지 않거든 오월궁에 있는 후궁 아래로 들어가거라. 내무부에 말하면 숫자가 가장 적은 후궁을 안내해 줄 거다.”

그런데 이 한밤중에 궁녀 배속을 바꿀 수 있나?

모르겠다. 어쨌든 원웅은 황제가 지시를 내리며 바로 가라고 하자, 가벼운 걸음걸이로 얼른 밖으로 나갔다.

부성과 상상이 그 뒤를 따라 나가자, 나는 얼른 떡돌이에게 내내 내가 눈여겨보던 국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 먹어도 될까? 다 식어가.”

하지만 떡돌이는 아직도 일이 덜 끝났는지, 내 말에 대답은커녕 혀를 차면서 고개만 저었다.

그러고는 나를 아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구박했다.

“맹하긴. 널 원망하던 궁녀가 네게 얼마나 충심을 보일 거라고 곁에 두느냐? 넌 암투도 못 하느냐?”

“내가 데려온 거 아닌데.”

좀 억울한 평가라 단호하게 정정해주었으나 떡돌이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원치 않게 데리고 있게 생겼으면 짐에게 말하면 되지 않느냐. 짐이 그 정도도 못 해줄까.”

그러고는 잔소리를 퍼붓기에, 그가 준 계란떡을 우물우물 씹어 먹으면서 보고 있자니 떡돌이가 한숨을 내쉬고서 내게 물었다.

“짐이 이렇게 말하는데 할 말 없느냐?”

“떡돌이는 암투 좋아하는구나.”

“짐이 지금 좋아서 하는 거 같으냐?”

그럼 뭘 기대하고 한 질문이지? 의아해서 쳐다보자, 떡돌이는 눈살을 구기고서 숟가락을 집어 들다가, 갑자기 탁자 위에 숟가락을 도로 내려놓으면서 항의했다.

“떡 하나는 남겨 놓아라. 짐도 먹을 거다.”

* * *

창문을 꼭 닫았는데도 어디선가 바람이 흘러들어와 촛불을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타천천이 손에 든 서찰에 진 그림자도 잔물결처럼 흔들렸다.

서찰을 보는 타천천의 눈동자가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럴 수가 있나. 천년비가 후궁일지도 모른다고?”

한참을 그렇게 웃어대다가 타천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서찰을 내려놓았다.

그러고서 앞을 보니, 서찰을 전달한 총관 상락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상락이 말했다.

“단주님께선 천 대인을 사모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다른 사내의 첩으로 있다는데 즐거워하시니 신기합니다.”

재밌어하는 말투에 타천천이 정색하자 상락은 큼큼 헛기침을 하면서 주먹을 쥐고 제 목을 툭툭 괜히 두드렸다.

마치 목이 고장 나서 헛말이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타천천은 그 모습을 보자 이번에는 정색을 풀더니, 두 손을 모으고 황홀하다는 듯 웃으면서 되물었다.

“금지된 사랑일수록 뜨거워지지 않을까?”

아주 위험한 발언이었다. 물론 천년비는 진짜 후궁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타천천에게 관심도 없으니 금지된 사랑은커녕 그냥 사랑도 이루어질 가능성은 적어 보였지만.

“그럼요.”

어쨌든 상사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무조건 동의한 상락은, 타천천이 몽롱한 얼굴로 춤을 추듯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자,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며 다음 보고를 했다.

“수오부 군왕이 암살당한 사건 말입니다. 아무래도 황제가 한 짓 같습니다.”

“내 연적 말인가?”

황제가 왜 단주 연적입니까, 라고 묻는 대신 상락은 순순히 대답했다.

“예.”

타천천은 손을 내리고서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었다.

“증거는 있는가?”

상락은 대번에 대답했다.

“심증뿐입니다.”

증거 하나 없이 보고하는 사람치고는 참으로 당당한 태도였으나, 타천천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법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지. 나는 자네의 머리를 믿고.”

증거가 없더라도 상락의 말을 믿겠단 뜻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총관이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것 같은 태도였으나, 상락은 타천천이 믿기지 않는 보고는 증거를 가져와도 끊어버린단 걸 알기에 딱히 감동을 받진 않았다.

대신 그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수오부 군왕은 신분이나 입지, 머리까지 괜찮았지만, 성정에 큰 문제가 있었지요. 저희들이 아무리 충고를 해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굴기만 했으니까요.”

“신분제에 밀려 황제 자리에 앉지 못한 놈이 자기보다 신분 낮은 이들은 나서서 무시해댔지.”

“예.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알면서 추천한 건 너였다, 상락.”

타천천이 비원이 보낸 서신을 집어 촛불에 가져다 대자, 편지가 끝에서부터 검게 그을기 시작했다.

서신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남기고 타들어 가자, 그는 손을 휘저어 불을 끄고는 상락을 웃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와 별 변화가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상락은 이번에는 고개를 황급히 숙였다.

“죄송합니다.”

타천천이 말을 계속해 보라고 손을 저으며 다리를 꼬고 앉았으나, 상락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서 말을 이었다.

“증거가 없긴 이쪽도 그쪽도 마찬가지일진대, 황제는 제 이복동생을 암살로 위장해 죽여 버렸습니다. 머리가 좋은 데다 결단력까지 빠른 자입니다. 냉정하고요.”

“황제들은 비정하지.”

“황제가 저렇게 나온다면 계획을 바꾸는 게 낫겠습니다. 쓸모없는 종친들을 데리고 가봤자 황제에게 꼬리만 잡힐 뿐입니다. 소수의 인원을 골라 집중해야 합니다, 단주.”

“누구와?”

미리 명단을 작성해 온 건지 상락은 품 안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타천천의 책상 앞에 내려놓고 물러섰다.

“하나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인물이고, 다른 하나는 새롭게 고른 인물입니다.”

“나머지 종친들은?”

“비밀 유지를 위해선 죽이는 게 빠르지요.”

잔혹한 말에도 타천천은 표정 변화 없이 상락이 건넨 명단만 펼쳤다. 그러고서 명단에 시선을 내리려는 찰나.

“천년비에 관해서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상락이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더 꺼냈다. 타천천은 명단을 도로 접고 책상에 내려놓았다.

타천천의 시선을 받은 상락은 아까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로, 한 글자 한 글자 단어까지 고르며 제안했다.

“천 대인이 진짜 후궁으로 가 있다면 지금 당장 불러오진 않는 게 낫습니다, 단주.”

“…….”

“천 대인은 무공이 고강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역할은 할 성정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껍데기만 이용하자?”

“사파를 집결시키는 역할은 천 대인 몸 안에 들어간 아유정에게 맡기는 게 낫습니다. 천 대인의 위치는 확인되었지 않습니까. 일이 다 완료되면 대인은 그때 다시 불러도 됩니다.”

* * *

나는 떡돌이가 저녁을 다 먹은 후에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떡돌이는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 뿐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잠자리에 들자면서 씻고 오지도 않았다.

“떡돌아? 음식이 맛없었어?”

그 모습이 이상해 묻자, 떡돌이는 내가 다 먹어놓고 무슨 맛을 물어보는 거냐고 항의하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내게 물었다.

“산책하겠느냐?”

“이 밤중에?”

“밤에 하는 산책이야말로 운치가 있지.”

산책하자는 사람치고는 표정이 오묘한데, 싶긴 했지만 나는 알겠다고 했다. 나야 뭐. 소화도 시킬 겸 좋지.

“그래 그럼.”

그러고서 벌떡 일어서자 떡돌이는 자신도 면사를 다시 착용하더니,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자.”

* * *

승언은 황제와 천 귀인이 나란히 걸어가는 동안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서 뒤를 쫓았다.

하지만 평범한 산책을 따라가는 것치고 그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걱정이 되서 그랬다. 황제가 지금부터 뭘 할지 알기에.

-천 귀인이 무공을 익혔는지 시험해 볼 거다.

저녁 식사를 하러 오기 전, 황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행동이 있으니 그걸 시험해 볼 거라고.

그 방법으로 황제가 제안한 건 분명 효과적일 것 같았다.

계단에서 황제가 직접 몸을 굴려 천 귀인의 반응을 보겠단 거니까.

하지만 황제의 충복 된 입장에서 승언은 그 방법이 너무 위험하게 여겨졌다.

-낮은 계단에서 할 테니 괜찮다. 천 귀인이 무공을 못 익혔더라도 짐을 잡아는 주겠지. 반응이 느릴 뿐.

황제는 염려 말라 말했지만…… 그리고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상념에 젖어 따라가는 사이. 마침내 천 귀인과 황제가 청적으로 가는 작은 계단을 지나게 되었다.

열 개짜리 계단. 황제의 말처럼 여기서 넘어져도 목숨이 위험하진 않은 계단이었다.

하지만 넘어지면 분명 다칠 계단이기에, 승언은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눈치껏 앞쪽으로 다가가 오원요의 곁에 붙었다. 오원요 역시 긴장해 있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오원요와 승언은 서로를 마주 보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때였다. 미리 말했던 대로 황제가 계단을 먼저 내려가는 척하더니, 갑자기 발을 헛디디면서 몸을 휘청했다.

승언은 뻗어나가려는 손과 다리를 가까스로 막았다.

대신 황제가 당부한 대로 천 귀인의 반응을 관찰했다.

과연 무림인처럼 빠르게 황제를 잡을 것인지, 아니면 보통 사람들처럼 한 박자 늦게 황제를 잡을 것인지.

그 순간.

‘아예 구하려는 시도도 안 하잖아?!’

황제가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폐하!”

놀란 승언은 기겁해 펄쩍 뛰고서 황제에게 달려가 부축했다. 오원요도 놀라 황제에게 달려갔다.

승언은 옷이 흙투성이가 된 채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를 대신해, 아직도 계단 위에 멀뚱히 서 있는 천 귀인에게 항의했다.

“귀인, 왜 폐하를 그냥 방치하시는 겁니까!”

그 원망스러운 추궁에 천 귀인은 “어?”하고 고개를 기울이더니 해맑게 웃었다.

“일부러 뛰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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