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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96화 (96/283)

##  96화. 염 귀인의 궁녀

두 장군이 다녀간 뒤 월요 황제는 뒷짐을 지고서 창가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원요는 몇 번이나 안으로 들어와 찻잔을 바꾸고 갔으나, 차 양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기를 다섯 번 정도. 녹색 찻잔에 차를 받쳐 온 오원요는 아까 교체한 찻잔 무게가 그대로이자 두 손을 모아 맞잡고서 황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시름이 있으신지요?”

월요 황제는 얼굴을 가린 면사를 거추장스럽다는 듯 벗어 툭 옆으로 던지고서 돌아섰다.

확실하게 시름이 있는 얼굴이라 오원요는 불안해졌다.

그는 늘 황제의 곁에 머무르기에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기몽 장군과 흑합 장군이 둘 다 천년비와 마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돌아간 것도 알고 있었다.

수오부 군왕 사건을 조사할 때 사하비단에 관한 이름이 나왔으나 주시하는 정도로 넘어간 것은, 그 단체가 황실에서 관심을 가지기에는 너무나도 작고 미약한 단체였기 때문이었다.

무림에서야 사파니 정파니 하며 자기들끼리 패를 나눌지 모르나, 황실의 입장은 또 달랐다.

무림 내에서도 작게 여겨지는 집단은, 무력 집단이 아니라 그저 몇 명이 뭉쳐 다니는 패거리 정도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무림맹이나 마교, 종교와 결합한 무림 단체 정도가 되면 황실에서도 주시하게 되었다.

무림맹은 수많은 무림인들이 힘을 모아 만든 단체이기 때문이었고, 종교와 결합하면 대중이 따르게 되기 때문이었다.

마교는 이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였는데, 그들은 무림맹처럼 많은 문파와 무림세가가 모여서 만든 집단이 아닌데도 소속된 숫자가 무림맹과 맞먹을 정도로 많았다.

심지어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구석까지 있어서, 좀 더 다루기 까다롭기도 했다.

그런 집단에 최근 들어 부정적인 주시를 받던 사하비단과 천년비가 방문하려는 소문.

심지어 천년비는 기몽 장군이 ‘천 귀인이 입궁 전 사용하던 가명일지도 모른다’고 한 인물 아니던가.

기몽 장군의 추가 조사를 들어보니 천년비와 천소여가 동일인일 가능성은 더 줄어들긴 했다.

그래도 어쨌든 천 귀인과 이름이 얽힌 인물이 수오부 군왕 사건에 거론되는 무림 세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단 추측 자체가 월요 황제에게는 몹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폐하. 천 귀인을 의심하시는지요?”

오원요가 더욱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월요 황제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말을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구나, 싶어서 오원요는 얼른 식은 찻잔을 쟁반 위에 올렸다.

오원요가 쟁반을 들어 올릴 때쯤에야 월요 황제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닐 거다. 제멋대로란 점 말고는 같은 점이 없는 사람 같으니.”

“그럼요.”

오원요는 쟁반을 든 채 허리를 굽신거렸다.

“당연합니다. 그 천년비란 무림인은 천 귀인께서 입궁한 후에도 내내 활동한 사람이 아닙니까. 동일인일 수가 없지요.”

“한데 왜 그 이름을 묻었을 때 천 귀인이 자꾸 쓰러졌던 걸까.”

“…….”

월요 황제는 오원요가 막 가져와 내려둔 찻잔을 쥐었다. 조금 뜨겁기까지 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찻잔 뚜껑을 내려놓고 김이 올라오는 찻물을 후 후 불었으나, 시선은 찻잔 조금 위쪽에 멍하니 고정되어 있었다.

오원요는 나가지도 다시 말을 걸지도 못하고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황제의 반응을 기다렸다.

황제는 한참을 그러고 서 있다가, 결국 차를 마시지 않고 도로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천 귀인이 진짜 무림인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겠다.”

“하지만 그건 기몽 장군이 이미 확인하였다 하지 않았습니까, 폐하? 천 귀인은 무림인이라 하기엔 내공이 너무 빈약하다 하였습니다.”

“그렇지.”

월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의자를 끌어다가 그 위에 앉으며 치렁이는 소맷자락을 한 뼘 걷어 올리고 붓을 쥐었다.

“그래도 확인해 봐서 나쁠 건 없지. 오원요.”

“예, 폐하.”

“천 귀인에게 오늘 짐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 일러라.”

“예, 폐하.”

* * *

흑합 장군에게 자수를 맡기길 잘했어. 아주 한가해졌는걸!

그놈의 자수 때문에 내내 바늘이랑 실을 쥐고 있다가 홀가분해지자 아주 좋다.

이 즐거운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평상 위에서 열심히 춤을 췄다.

부성은 처음에는 얼굴이 벌게져서 날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내가 온 힘을 다해 발을 움직이자 나중에는 내 춤에 감동을 받아 박수까지 쳐주었다.

“전 소주를 볼 때마다 깨달아요. 자기 자신이 당당한 게 최고란 걸요.”

내 춤에 대한 소감을 묻자 이런 말까지 해주었다. 이게 내 춤과 무슨 상관인진 모르겠지만.

“못 춘단 거야?”

“소주의 춤은 뭐랄까. 잘 추고 못 추고의 경지가 아니에요. 그 너머에 있는 영역인걸요.”

“잘 춘단 거야?”

“보는 사람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줘요, 소주.”

“그 정도야?”

내가 활짝 웃자 부성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나도 흐뭇하게 웃고서, 벗어 두었던 신을 신고 읽기 싫은 후궁 필수 서책도 펼쳤다.

기분이 좋아진 김에 이 귀찮은 서책도 몇 장 읽어 버려야지.

어휴, 이 서책은 대체 언제쯤 다 읽고 치울 수 있을까?

그런데 책을 읽으며 다리를 달랑거리고 있자니, 찻잎을 타러 내무부에 갔던 원웅이 내무부 태감과 함께 돌아오는 게 보였다.

“어? 쟤는 상상 아니에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쪽에는 낯익은 궁녀 하나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염 귀인의 측근 궁녀 말이다. 이름이 상상이란 건 나도 방금 부성에게 들어서 알았지만.

“쟤가 여긴 왜 왔을까요?”

부성은 눈살을 찌푸리고서 중얼거렸다.

“글쎄다.”

나는 고개를 젓고서 평상에 앉은 채 그들이 이 안으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잠시 뒤 사립문을 열고 들어온 내무부 태감은 내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더니, 원웅의 뒤쪽에서 따라온 상상을 가리키며 이렇게 설명했다.

“귀인, 이쪽은 돌아가신 염 귀인의 측근 궁녀였던 상상입니다. 갑자기 주인이 사라져 여기저기 떠돌고 있었는데, 우 귀인이 황후 마마께 찾아와 천 귀인께 보내 달라 부탁했지요. 천 귀인께선 염 귀인과 친하셨으니까요.”

내무부 태감의 뒤쪽에 선 원웅의 표정이 썩은 사과를 먹은 것처럼 구겨졌다.

나 역시 상상이 여기 온 게 좋은 의도로 보이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자발적으로 왔으면 몰라, 우 귀인이 보내서 왔다니까.

“여기엔 사람이 더 필요치 않는데.”

그래서 일단 돌려 거절해 보았으나 내무부 태감은 난처해하며 다시 굽신굽신하며 설명했다.

“황후 마마께서 이미 허락하신 일이라 소신의 선에서 돌려보내기가 힘듭니다, 귀인. 이 일은 상상을 가엾게 여기셔서 지시한 것이니까요.”

상상은 두 손을 배꼽 부근에 모으고 서 있다가, 내무부 태감의 말이 끝나자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꾸벅 인사하고서 야무지게 말했다.

“염 귀인께서는 소주를 늘 걱정하고 신경 쓰셨지요. 염 귀인께서는 이곳에 없으시지만, 제가 염 귀인을 대신해 소주를 보살피게 해 주십시오.”

“말은 잘하네.”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자 상상이 흠칫하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내무부 태감은 나와 상상을 번갈아 보더니, 귀찮은 일에 얽히기 싫은 듯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서 도망치듯 가버렸다.

순식간에 내 궁녀가 하나 더 늘어 버린 것이다.

부성은 상상을 노려보았지만, 상상은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저 순종적인 모습으로 손을 모으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이대로 돌려보낼 순 없는 거겠지? 일단 당분간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는 원웅에게 상상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려주라 지시했다.

그런데 지시를 마치고서 내 방으로 돌아서려 하니, 이번에는 떡돌이의 태감이 달려와서 내게 알려주었다.

“천 귀인. 폐하께서 귀인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겠네.”

내 대답에 태감은 꾸벅 인사를 하고서 다시 밖으로 달려갔다.

원웅은 황제가 내 방에 올 거란 소리를 듣자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리는지 입꼬리를 올리고서 밝게 말했다.

“가장 자신 있는 요리들로 차려 올리라 할게요, 소주.”

“저는 소주를 최고로 멋지게 꾸며 드릴게요.”

부성도 평소보다 훨씬 친근하게 말하며 내게 붙었고, 나는 상상에 대한 일은 잊고서 얼른 내 방으로 들어갔다.

* * *

나도 치장을 마쳤고 요리도 치장을 마쳤다.

하지만 떡돌이가 바로 나타나지 않아서, 나는 상 앞에서 한동안 멀뚱히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다 못해 원웅과 부성도 훨씬 깨끗하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황제는 그러고서도 일각 정도가 지나서야 나타났다.

“자. 계란이가 좋아하는 계란떡이다.”

이 와중에도 떡은 꼭 챙겨와서 주는 걸 뭐라고 해야 할지…….

“사람은 착한 모습과 나쁜 모습이 있다던데, 떡돌이 너도 그렇구나?”

“착한 점은 떡 챙겨주는 모습일 테고. 나쁜 점은 뭐지? 조금 늦게 와서 서운하느냐?”

“슬슬 떡 안에 보석이라던가, 그런 걸 좀 넣어서 가져와 봐. 사람은 떡만 먹고 살 순 없다고. 넣어서 주면 내가 눈치껏 놀랄게.”

“참 당당하게도 요구하는군.”

“난 절대로 기죽지 않아.”

“그래 보인다.”

혀를 찬 떡돌이는 맞은편에 앉더니, 갑자기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이 와중에 왜 혼자 더듬거리나 싶어서 보고 있으려니,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찌푸리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왜 그래?”

“네가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잖느냐.”

내가 뭘 어쨌다고 괜히 팩 토라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떡돌이가 무언가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자. 떡에 넣어서 주긴 좀 그렇고. 대신 다른 데 넣어 왔지.”

“뭐야?”

의아해서 받아들고 봉투를 북 찢자, 놀랍게도 안에서 반짝거리는 자잘한 팔찌가 나왔다.

“와.”

촛불을 받아 붉게 반짝이지만 햇볕 아래에서 보면 흰빛일 것 같은데?

하여튼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서 번쩍거리는 것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내 거야?”

너무 기뻐서 얼른 입에 집어넣으며 묻자, 떡돌이는 먹는 게 아니라며 황급히 내 팔을 잡아 꺼내더니 도끼눈을 뜨고 작게 항의했다.

“떡에 보석 넣어 달라더니. 먹으려 그랬던 게냐? 이걸 왜 먹어, 이걸?”

“이런 건 씹어봐야 돼. 그래야 진짜인지 구분할 수 있어.”

“설마 황제인 짐이 네게 짝퉁 보석을 주겠느냐?”

“떡돌이 너도 속아서 산 걸 수도 있어.”

“황제에게 가짜 보석을 진상하는 미친 짓거리를 할 나라가 있을까.”

아하.

“상납받은 거야?”

“진상 받은 거다.”

한숨을 내쉰 황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보석 팔찌를 씁쓸하게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짐이 직접 팔에 끼워주려 했는데. 바로 입에 넣을 줄이야…….”

나처럼 쫓기면서 살아보라지. 양손에 무기가 들려 있으면 급할 땐 입에 물고 뛰어야 한다고.

어쨌든 떡에 보석 넣어달란 얘긴 그냥 농으로 한 건데. 진짜로 가져다주니 좋긴 좋다.

나는 히히 웃으면서 보석을 옆에 잘 챙겨둔 다음, 탁자를 두드리며 지시했다.

“얼음 넣은 차를 가져와.”

다른 음식은 미리 차려 뒀는데, 얼음은 빨리 녹으니까 꺼내두지 않고 얼음 상자에 넣어 뒀지. 시원하게 먹으라고.

그런데 뭐지? 지시를 했는데도 어째 궁녀들이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칼같이 딱딱딱 들어왔을 원웅과 부성인데?

의아해서 고개를 기웃하고 있자니, 마침내 문이 좀 황급히 열리고서 원웅이 가장 앞에서 얼음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 뒤에는 부성이 쟁반에 잔을 들고 들어왔고.

그런데 왜 둘 다 표정이 안 좋지? 이상해서 보고 있자니, 뒤쪽으로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염 귀인의 궁녀 상상이 아주 청초한 차림새를 하고, 내가 준비하지 않은 얼음물에 담근 과일 그릇을 들고서.

저게 뭐가 싶어 보고 있자니, 상상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탁자에 자기가 가져온 그릇을 내려놓고서 말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날이 너무 덥다고, 폐하께 이 과일을 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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