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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95화 (95/283)

##  95화. 두 사람이 같은 보고

염 귀인은 죽었지만 그녀가 가르쳐준 자수 실력은 내 손끝에서 살아남았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나는 결국 안비가 요구한 대로 자수 하나를 멋들어지게 완성시켰다.

“이걸 봐.”

내가 당당하게 수를 보여주자 귀자가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 잘 구분하지 못하긴 했지만 뭐. 괜찮다.

태초에 고양이는 호랑이랑 한 배에서 나왔으니까.

내가 본 건 아니지만 아마 내 말이 맞을 거다. 태초에 일어난 일을 본 사람은 다 죽고 없으니까!

게다가 내 자수가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큰 장점이 있지.

“이게 무엇이지?”

“마마를 위해 제가 호랑이를 수놓았답니다.”

이렇게 속일 수도 있거든.

안비는 내가 찾아가서 자수를 내밀자 ‘고작 이거 하나 하는 걸 왜 이리 오래 걸렸냐’고 잔소리를 퍼붓다가, 나중에는 좀 미심쩍은 얼굴로 나와 자수를 자꾸 번갈아 보았다.

“본궁의 눈엔 고양이로 보이는데.”

“마마는 새끼 호랑이를 본 적이 없으셔서 그래요. 새끼 호랑이는 고양이랑 비슷하게 생겼거든요.”

“넌 본 적이 있단 게냐?”

“암요. 저는 쉰 번이나 보았지요.”

“명문가 적녀로 나고 자란 네가 어디서?”

“산에서요. 마마는 귀하게 자라서 잘 모르시겠지만 호랑이는 산에서 산답니다.”

안비는 의외로 안목이 밝은지 내 말을 계속 믿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내가 계속 고양이라 아니라 호랑이라고 우기자 결국 수긍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내게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이 넘치는지, 그녀는 내가 만든 게 새끼 호랑이란 걸 납득하자마자 이번에는 또다른 시비를 걸어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수를 놓기에 얼마나 대단한 명작을 만들려다 기대했더니. 아주 형편없구나.”

이렇게.

그 말에 당혹스러워서, 그러면 직접 하지 왜 나한테 시켰냐고 물었더니 안비는 성질을 내면서 내가 기껏 수놓아준 걸 집어 던지고 마구 발로 밟기까지 했다.

진짜 성격 나쁘네, 저 사람?

“이 엉터리는 다시 가져가고 새로 해 와라!”

* * *

“안비는 정말 못된 거 같아. 안 그래? 내가 열심히 수를 놓아서 바쳤더니, 저렇게 싫어하고.”

결국 시간과 고생만 하고서 내 처소로 시무룩하게 돌아가고 있으려니, 원웅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걱정마세요, 소주. 소주가 승리했어요.”

“뭐가?”

“화낸 건 안비지만 성질 난 것도 안비일 거 같거든요.”

“왜?”

“소주는…… 긍정적이시니까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쳐다보자 원웅이 내게 부채질을 해주면서 실실 웃었다.

뭐. 어쨌든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원웅은 사회 생활을 잘하니까.

“원웅아.”

“네, 소주.”

“오랜만에 청적이나 가야겠다. 오늘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서 좀 덜 덥네.”

방향을 도로 바꾸어 동영궁에서 나가게 되자, 원웅은 이번에는 부채를 옆구리에 끼더니 내가 들고 있던 자수, 안비가 도로 가져가라고 팽개친 그 자수를 받아 들면서 웃었다.

“이건 제가 이따 돌아가서 깨끗하게 빨아 드릴게요. 제가 볼 땐 정말 잘 놓은 자수니까 버리기 아깝잖아요. 제 눈에도 고양이 같긴 하지만요.”

“고양이야.”

“예?”

“고양이 맞아.”

“!”

그런데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심궁과 동쪽 구역 사이의 갈림길을 지나는데 낯익고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흑합 장군이었다.

서신을 주고받은 후로 내내 연락을 하지 않다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지라, 나는 웃으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천 귀인을 뵙습니다.”

하지만 인사를 올리는 흑합을 보자 웃을 수가 없어졌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 어두워서.

맞아. 흑합 장군은 염 귀인이랑 어린 시절부터 친구라 했지. 그런 친구가 죽었으니 지금 흑합 장군은 속이 말이 아니겠어.

이걸 어쩌나. 이럴 땐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나는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머리를 빠르게 굴려 보아도, 친구의 친구가 죽은 적이 없다 보니 위로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쩔쩔매고 있자니 다행히 흑합 장군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귀인.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난 잘 지내고 있는데…… 장군은 안색이 수척한 걸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지 않네요.”

“네. 염 귀인 생각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면 그렇구나, 할 텐데. 순순히 인정하니까 더욱 말하기 곤란해진다.

나는 괜히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그가 잘 못 지내고 있다니 나도 무어라고 한 마디를 더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아서.

원웅이 조언해 주려는 듯 눈치를 주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재량껏 그에게 위로하는 말을 건네보았다.

“염 귀인은 극락에 갔을 거예요, 장군.”

하지만 말을 하자마자 원웅이 내 옷자락을 뒤에서 황급히 살짝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다음 말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내 말에 혹시 문제라도 있던 건가?

사실 염 귀인이 극락 갈 성품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흑합 장군을 위해서 한 단계 높여서 말해준 건데. 사람들은 이런 위로를 싫어하나?

아니, 그러면 뭐라고 해야 해?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가끔 뾰족해질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선한 분이셨으니까요.”

다행히 흑합 장군에게는 내 위로가 통했나 보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올라오는 걸 보니.

나는 안심해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옆으로 물러서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난 이만 저쪽으로 가볼게요. 잘 가요, 장군.”

떡돌이한테 화가 나서 흑합 장군과 친하게 지내려 했는데 염 귀인 사건이 있어서인가, 울적한 그를 붙잡고 친한 척 굴 수가 없어.

나는 얼른 몸을 돌렸다.

“귀인.”

그러나 내가 두 걸음도 가기 전에 뒤에서 흑합 장군이 나를 재차 불렀다.

돌아보자 그가 우두커니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더 할 말이 있는가 싶어서 쳐다보자 그가 물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후궁들이 귀인을 멀리한단 소문을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소문이 돈다고? 나는 처음 듣는 소문인데. 후궁들이 나를 멀리했나?

혹시 온 귀인이 날 빼고 놀러 간 일이 알려져서 그런가?

음. 하지만 뭐, 암살자를 보내는 것도 아니고, 비수를 숨기고 있다가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천라지망을 펼쳐서 잡으려 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들이에 초대 안 하는 정도야.

내가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흑합 장군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헛소문을 들었나 봅니다. 괜한 이야기를 꺼내 죄송합니다, 귀인.”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시 흑합 장군은 참 좋은 사람이라 생각이 든다.

의젓하고 굳건해. 떡돌이랑 짜고서 사기를 치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 와중에 나까지 걱정해 주는 게 고마워서 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서 괜찮다고 말했다.

흑합 장군은 나를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내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다가 내가 말을 마치자 당부했다.

“부디 귀인께선 늘 무탈하고 무사하셨으면 합니다. 염 귀인의 몫까지요.”

“고마워요.”

그걸로도 그치지 않고서 흑합 장군은 내게 다시 물었다.

“제가 도울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하시지요. 귀인을 돕고 싶습니다.”

* * *

“장군님? 뭐 하시는 겁니까?”

흑합 장군의 부관은 흑합에게 보고할 서류를 가지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의 상사가 책상 앞에 앉아 커다란 손으로 조그마한 바늘과 실을 쥔 채 끙끙 앓고 있어서였다.

앞에 놓인 동그란 수틀, 바늘, 실.

누가 봐도 뭘 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으나 부관은 보면서도 믿기지 않아 더듬거렸다.

“자수…… 놓으십니까?”

흑합은 무표정하게 수틀 위에 바늘과 실을 도로 내려놓았다.

이건 아까 만난 천 귀인이 그에게 맡긴 일로, 도와줄 게 없냐고 물었더니 있다면서 건넨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이걸 부관에게 설명하기도 난감해서 흑합은 대답하는 대신 자기가 질문을 해버렸다.

“뭘 들고 온 거냐.”

“아. 이거요.”

부관은 들고 온 서류를 흑합에게 건네면서 요약해 설명했다.

“전에 장군께서 사하비단과 천년비란 무림인이 이상 행보를 보이진 않는지, 그들이 정말로 수오부 군왕 사건과 관련이 있진 않은지 계속 주시하라 하셨지요. 그 일 관련한 보고서입니다.”

흑합은 미간을 찌푸리며 두루마리를 묶은 끈을 풀었다.

“그들이 왕족들에게 접근했단 확실한 증거가 나온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신중하게 눈여겨봐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흑합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부관이 건넨 서류를 빠르게 읽었다.

이윽고 흑합은 채 반 각도 되지 않아 긴 보고서를 다 읽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께 고해야겠다.”

* * *

“천년비란 자에 대해선 이미 많은 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조사가 어려웠고요.”

“이야기가 많으면 헛소문도 많지.”

“예. 너무 허황된 이야기를 빼면, 공통적으로 꼽는 건 천년비란 악적이 무척이나 강하다는 것. 힘의 출처에 대해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것. 성격이 포악한 데다 제멋대로고 본성이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성격이 포악해?”

“그런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힘의 출처가 수상하단 건? 무슨 소리지?”

“많은 무림인들은 문파에 소속되거나 스승을 두고 무공을 익히지요. 제대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어중이떠중이들도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는 무공서를 보고 익히곤 합니다. 한데 천년비란 자는 사문도 스승도 알려지지 않았답니다.”

“특이한 일인가?”

“드물지만 아예 없던 일은 아니랍니다. 일인 전승 문파나 오래전에 사망한 은거 기인이 남긴 비급을 발견하는 기연으로 강해지면 그럴 수 있지요. 소문으로는 천년비가 늘 들고 다니며 쓴다는 일기장이 있다는데, 거기에 천년비 무공의 비밀이 적혀 있단 말도 있답니다.”

기몽의 보고를 받으며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천년비에 대해 모든 걸 다 조사해 오라 하였는데, 기몽의 말은 그저 무림인으로서의 악명과 행적, 무공에 대한 게 대다수였다.

“가족이라거나 뭘 좋아했다거나 대인관계라거나 그런 건?”

“알려진 바로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답니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요.”

“…….”

“연인으로 알려진 자가 하나 있긴 했지만, 그자가 천년비를 죽이기 위해 연극을 했을 뿐이라더군요. 천년비가 죽었단 소문이 잠시 돌았는데, 천년비를 거의 죽일 뻔했던 자가 그 연인이란 자랍니다.”

“정말인가.”

“네. ‘개원’이라고, 그자 역시 무림에서 이름만 영웅이라 하지요. 개 답응과 같은 가문 사람입니다.”

월요 황제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들어서는 천 귀인과 그리 겹치는 바가 없었다. 그나마 하나 비슷한 건 제멋대로라는 정도일까.

황제는 결국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고서 나가라 손짓했다.

“별 소득은 없어 보이지만. 알았다.”

곱게 자란 명문가 적녀와 악명으로 가득한 무림인을 비교하려고 하다니. 너무 무리였던 걸까.

천년비 종이를 묻을 때마다 천 귀인이 쓰러진 게 영 이상하긴 하지만, 두 사람이 동일인일 가능성은 그래도 적어 보였다.

“이건 다른 맥락의 보고이지만, 천년비에 관해 조사하던 중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폐하.”

그러나 기몽은 나가는 대신 조심스럽게 천년비에 관해 다시 화제를 꺼냈다.

“무엇이지?”

* * *

황제에게 수오부 군왕 사건과 관련된 보고를 하기 위해 어전 앞에 도착한 흑합은 먼저 기몽 장군이 들어가 있단 이야기에 잠시 그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얼마나 그렇게 기다렸을까. 일각 정도가 지나자 마침내 기몽 장군이 안에서 나왔다.

무덤덤하게 걸어 나오던 기몽은 흑합을 보자 눈빛이 서늘해졌다.

고개를 까딱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흑합은 멀어져가는 기몽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오원요의 안내를 받아 어전으로 들어갔다.

“폐하. 일전에 말씀드렸던, 수오부 군왕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자들에 대해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황제는 뜻밖에도 책상에 팔을 괴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는데, 기몽이 대체 뭔 보고를 올린 건지 무척이나 피로한 얼굴이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해도 될까. 흑합이 잠시 망설이고 있으려니, 황제가 무거운 목소리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너도 천년비란 자가 마교에 간단 소문을 보고하러 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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