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손해볼 일이 없다
개시시의 사촌이라면…… 개원이? 개원이가 나한테 사과하는 서신을 썼다고?
내 손이 통제를 잃고 서신을 집어 던질 뻔했다.
내가 한 손으로 서신을 던지려다가 다른 한 손으로 막고서 씩씩거리자, 원웅은 눈을 토끼처럼 뜨더니 나를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소주……?”
나는 손을 저어 그들에게 나가라고 한 다음 개원이 이 새끼가 뭐라고 주절댔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신을 펼쳤다.
사과? 흥! 웃기시네! 싹싹 빌어도 내가 용서할 줄 알아? 답서도 당연히 없어!
* * *
일전에 제 동생의 생일을 축하해주려 찾아오신 분께 무례하게 대해 죄송합니다.
천 귀인께서 천년비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경솔하게 대하긴 하셨지만, 천 귀인은 천년비에 대해 듣기만 했지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란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안 좋게 말하면 거기에 휩쓸리기 쉽지요. 귀인께서도 소문에 휩쓸린 그저 많고 많은 사람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귀인께서 천년비를 직접 보신다면 다른 평가를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귀인은 가문이 한미하단 이유로 후궁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제 동생을 챙겨주시는 분이니까요.
-무례를 몹시 반성하고 있는 개 답응의 사촌 올림.
* * *
이걸 지금 사과하는 서신이라고 쓴 거야? 서신을 다 읽자마자 나는 바닥에 팽개치고서 마구 밟아 버렸다.
열이 받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건 사과가 아니었다. 시비 거는 거지!
‘네가 그날 잘못 행동한 건 맞지만 네가 아는 게 없어서 그랬으니 이해하고 넘어갈게’라는 말 아닌가!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한텐 내 해석이 옳으니까.
‘에이! 에이! 에이!’
나는 한 번 더 서신을 마구 뭉갠 다음 얼른 종이와 벼루, 먹, 붓을 챙겼다.
“원웅아! 먹 갈아와!”
밖에 나가 있던 원웅은 다시 안으로 들어오다가 바닥에 반쯤 찢긴 채 늘어져 있는 서신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소주, 무슨 내용이길래 이렇게 화내세요?”
“개시시의 사촌 오라비가 나를 모욕했다.”
“네?”
원웅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부성도 들어오다가 내 말을 듣고서 씩씩거렸다.
“개 답응이 소주께 시비를 거는 건가요?”
“개 답응이 아니라 개 답응의 사촌 오라비가! 어쨌든 먹 갈아줘. 답서는 안 쓰려 했는데. 나도 써야겠다.”
원웅이 먹을 가는 사이, 나는 팔짱을 끼고 어떻게 해야 개원을 말로 후릴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한참 답서를 쓴 다음, 말리면서 원웅에게 ‘나중에 개 답응 궁녀를 보면 이걸 갖다주어라’고 지시하고 있을 때였다.
귀자가 들어오더니 경사방 태감이 찾아왔다고 알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부성은 바닥에 팽개쳐진 서신을 들어올려 숨겼고, 원웅도 덜 마른 서신을 얼른 접어서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그 행동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사방 태감이 들어와 내게 웃으면서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귀인, 오늘도 폐하께서 귀인을 찾으십니다. 온 귀인이 회임을 해도 폐하께는 귀인 뿐이신가 봅니다.”
나는 알겠다고 중얼거리고서 옷을 벗기 위해 옷자락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평소에는 밖으로 나가 내가 준비할 동안 기다려 줄 경사 태감이 오늘은 손을 휘저으며 말렸다.
“오늘은 그냥 가시면 됩니다, 귀인.”
“계란말이는?”
“예? 허기지십니까?”
“아니, 이불에 돌돌 마는 거 말이네.”
“아아. 여러 번 시침을 들어 폐하의 윤허를 받으면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가마를 타고 편하게 이동하시면 되니 얼른 준비하시지요. 소인은 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늘 이불에 돌돌 말려서 태감들이 업고 갔던 길을 가마를 타고 지나가고 있으려니 기분이 아주 괜찮은데?
저 앞에서 태감들이 든 등불은 꼭 커다란 반딧불이 궁둥이처럼 보인다.
게다가 팔을 괴고서 느긋하게 앉아있자니, 마침 우 귀인과 온 귀인이 서로 팔짱을 끼고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내 쪽을 보고 흠칫 굳기에 손을 흔들어주자 두 사람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그걸 보고 한 번 더 웃고서 손을 내리자니, 경사방 태감이 두 사람과 거리가 멀어지자 걱정스럽게 물었다.
“귀인. 그러셔도 괜찮습니까?”
“뭐가 말인가?”
“너무 장난치시는…… 그래도 회임한 분인데. 혹시 오해하셔서 소주님들 사이가 멀어지실까 걱정입니다.”
아아.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내가 온 귀인한테 손 흔든 거?
“장난이라니? 난 장난친 게 아니라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경사방 태감이 떨떠름하게 뒤를 살피며 물었다.
“그럼 방금 손 흔든 그건 무엇인지요?”
뭐긴 뭐겠어.
“조롱한 거야. 내가 한 행동을 미화하지 말게나.”
“아…….”
* * *
떡돌이에게 가마를 타고 짠 등장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막상 황제의 침궁에 도착해보니 그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태감이 이렇게 말하고서 물러가고 나니, 넓은 방 안에 남아 있는 건 나 하나였다.
나는 멀뚱히 방 안을 돌아다니다가 침상에 우두커니 앉았다. 떡돌이는 사람을 오라 해놓고 어디 간 거야?
그래도 늘 계란말이 상태로 오다가 내 발로 와서인가. 좀 신기한 기분이긴 했다.
방 안 여기저기도 평소보다 새롭게 보이고.
“…….”
하지만 구경도 잠깐이지. 방 내부를 다 살폈는데도 황제가 오지 않자 너무 지루해져서, 나는 시간이나 때울 겸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밖에서 대기라도 하고 있던 건가.
그렇게 기다려도 안 오던 황제는 내가 노래를 부르자마자 바로 들어오면서 놀려댔다.
“전에 ‘야앙야앙’ 할 때도 생각했지만 넌 정말 노래를 못하는구나.”
“하지만 내 노래엔 영혼이 담겨 있어.”
“영혼?”
떡돌이가 코웃음을 치면서 옆으로 와 앉는다. 내 노래에 영혼이 있단 말을 전혀 못 믿는 얼굴로.
“폐하도 내 노래를 듣고 흥분했었잖아요.”
사람을 한껏 기다리게 해놓고서는 들어오자마자 저러는 게 괘씸해서 지난번 일을 떠올리게 해주자, 떡돌이는 심지어 발뺌까지 했다.
“짐이 흥분했다니? 언제?”
“발-.”
내가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해 설명해주려 하자 황급히 내 입을 막아 버렸지만.
“그건 네 노래 때문이 아니라 네가 준 보약 때문 아니냐!”
“내가 약을…… 아아. 떡돌이가 폐하니까.”
음. 그러면 내 노래를 듣고 흥분한 건 확실히 아니었네. 다행이다.
당시에 나는 황제가 진짜로 변태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아니면 아닌 거지 싶어서, 나는 침상 위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사실 아까도 이러고 있고 싶었는데. 그래도 황제 방이라서 멋대로 눕지 못했어.
“아이구 좋다 아이구 좋아. 계란말이 안 하고 오니 이리 좋아. 진작 이리 오라 해줬으면 얼마나 이뻤을까.”
늘 불편하게 누워 있던 침상에 팔을 쭉 펴고 눕자 저절로 좋아하는 소리가 나왔다.
나는 마음껏 침상 위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웃으면서 떡돌이의 허벅지를 찔렀다.
하지만 떡돌이는 내가 평소처럼 계란 상태가 아닌 게 마음에 안 드나.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또다시 시비를 걸었다.
“지금은 안 이쁜가보지?”
“그럼! 뭐가 이쁘겠어?”
시비를 거는데 순순히 대답할 마음이 없어서 내가 당당하게 대꾸해주자, 떡돌이는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 그의 얼굴을 덮은 면사를 치워주었다. 황제는 잠시 움찔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이러면 좀 이뻐.”
내가 자기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가 칭찬하자, 손을 치우게 하면서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지만.
“넌 짐의 얼굴이 그리 좋으냐.”
“그나마 이쁜 부분이 얼굴밖에 없는걸.”
“무엄하다.”
“내가 폐하 얼굴이 곱다고 말해서 싫어?”
“그래. 짐이 얼굴만 고운지 다른 곳도 고운지 네가 어찌 아느냐.”
“성능도 불확실한 판에 곱고 말고를 따질 때가 아냐.”
“짐은 그 부위 이야기를 한 게 아닌데.”
그가 민망해할까 봐, 면사를 도로 펼쳐서 그의 눈가를 가리고서 웃자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바람이 내 목덜미에 닿아 간지러워졌다.
결국, 더 크게 웃으면서 나는 면사를 치우고 이번에는 아예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본격적으로 자려고.
그런데 왜 저러지? 황제는 눕는 대신 유심히 나를 내려다보다가 아까보다 좀 더 진지하게 물었다.
“후궁들이 모여 노는 데 너만 없던데. 다른 후궁들은 네가 안 오겠다 초대를 거절 했다더라. 참이냐?”
“누가 그래?”
“우 귀인이 말하고 온 귀인이 수긍했지.”
“…….”
“거짓이냐?”
“떡돌이 네가 보기엔 어떤 거 같은데?”
“난 모르겠다.”
“아는 게 없네.”
“어쩔 수 없다. 네가 어떤 행동을 할지, 무슨 생각을 할지 짐은 도무지 모르겠으니. 넌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을 다 합해서 가장 행동의 갈피를 잡을수가 없지 않으냐.”
칭찬인가? 내가 빤히 쳐다보자, 황제는 내가 덮은 이불 끄트머리를 토닥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너라면 후궁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할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아.”
그가 토닥이는 이불 아래쪽에는 내가 있지도 않았다.
떡돌이도 뒤늦게 그걸 알아챈 걸까.
엄청 그윽하게 말하던 떡돌이는 자연스럽게 손 위치를 바꾸더니, 이번에는 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주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누가 그러냐’고 묻는 걸 보니, 너는 초대받지도 못했던 모양이군.”
행동은 너무 뻔했지만 맞는 말이긴 해서,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맞아.”
그러고서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황제가 나를 또 불렀다.
“소여야.”
아까보다 좀 더 무거워진 목소리로.
이불에 손을 올리고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좀 쓸쓸한 표정인 그가 보였다.
왜 갑자기 저렇게 혼자 분위기를 잡나…… 싶어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온 귀인이 아이를 낳는다 해도…… 거기서 끝일 거다.”
“뭐가?”
“그 아이 때문에 내가 널 뒤로 하고 온 귀인을 총애할 일은 없다고 말하는 거다. 아마 그 아이는…….”
그러고서 더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황제는 애매한 지점에서 말을 멈추어버렸다.
말을 시작할 때처럼 갑자기.
뒷말이 몹시 궁금한 데서 끊어서 항의하려 했지만, 그는 더 말하는 대신 내 머리통을 잡아다가 자기 무릎을 베게 하더니 이불 위를 토닥거리며 물었다.
“오늘은 짐이 노래를 불러 줄까?”
“노래 잘 불러?”
“너보단 잘 부르지.”
거만하게 웃는 황제는 바로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못 부르면 구박하고서 그만 부르라 하려 했는데.
정말로 그의 입에서 나온 노래는 쓸쓸하면서도 듣기 좋아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 * *
“폐하께서는 또 천 귀인을 부르셨답니다.”
그 시각. 황후는 상에 앉아 서책을 읽고 있었고, 곁에서는 상궁녀 영영이 이 말을 전했다.
황후는 영영의 말에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책을 넘겼다.
그리 관심 없어 보이는 얼굴이어서, 영영은 그런 황후를 보다가 물었다.
“황후 마마. 우 귀인의 말을 들어주실 건가요?”
이건 두 시진 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때 우 귀인이 황후를 찾아와서, 염 귀인의 궁녀가 주인이 죽은 일로 처지가 애매해져 이리저리 계속 소속 없이 옮겨 다니고 있다며, 염 귀인이 천 귀인과 친하게 지냈으니 천 귀인의 궁녀로 보내면 어떨지 청했던 것이다.
황후는 책장을 한 장 더 넘기며 이번에도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쁠 것 없지.”
“우 귀인은 천 귀인을 싫어하지요. 생각해주는 척 머리를 굴리는 게 우습습니다.”
영영은 우 귀인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조롱조로 말했으나, 황후는 오히려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만 지었다.
영영은 입술을 삐쭉이다가, 부채를 꺼내 황후에게 살살 부쳐주면서 다시 말을 걸었다.
“온 귀인과 우 귀인이 주도해서 천 귀인을 따돌리려 한다는데. 폐하께서 천 귀인을 그리 아끼시는데, 제 무덤들을 파는 게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몇 해 만에 처음으로 회임했으니 그러는 거겠지.”
“마마께서 말리지 않으셔도 괜찮을까요? 그래도 같은 가문 사람이라, 잘못했다가 마마께 폐를 끼치는 건 아닐지 걱정입니다.”
“폐를 끼치겠지. 온 귀인이 지금은 조심성 있게 굴지만 이런 일이 계속되면 점점 거만해질 거다. 나중에는 좋지 못한 실수를 저지르겠지, 결국.”
“그 전에 말려야 하는 게 아닐지…….”
영영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온 귀인을 회임을 해도 천 귀인을 향한 황제의 총애가 전혀 식지 않으니, 마음에 안 드는 온 귀인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보호를 해야 하지 않을까,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황후는 이번에도 별 감흥 없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무엇 하러 그러겠느냐.”
“네?”
“온 귀인에게 일이 생겨도 그 배 속 아이는 황손이다.”
과연 그게 진짜 황손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은 황후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게다가 그 아이가 진짜 황손이 아니어도 황후의 계획에는 별 차질이 없기도 했다.
자신에게 대역이 있단 이야기는 황제 역시도 웬만한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밝힐 수 없는 비밀.
아이가 문제가 될 것 같다면 황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상관이 없고, 아이가 위협이 되지 않을 공주라면 낮은 품계를 주고서 키울 확률도 있긴 했다.
후궁들이 아무도 회임하지 못하면 종국에는 황제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쏠릴 텐데, 그 아이는 그런 의심을 지워줄 역할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 자라게 된다면…….
“온 귀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 아이는 아마 친척인 본궁이 기르게 되겠지.”
“아!”
“본궁은 폐하와 시침하지 않아 아이를 가질 일이 전혀 없어. 그렇다면 차선책이라도 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빙그레 웃고서 서책으로 다시 시선을 내린 황후는, 다시 고개를 들더니 잠시 생각해보다가 영영에게 지시했다.
“태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약들을 온 귀인에게 챙겨주어라. 황후가 아니라, 친척 언니로서 보내는 마음이라 전하고.”